토라포션 3주 레크 레카: 너는 가라 — 창세기 12:1–17:27을 히브리어·유대 전승·개혁신학으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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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포션 3주 · 창세기 12:1–17:27

레크 레카(לֶךְ־לְךָ) — ‘너는 떠나라(가라, 너를 위하여)’.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첫 말씀의 첫 두 낱말입니다. 문자대로는 ‘가라, 너 자신에게로’입니다.

라쉬는 ‘레크 레카’를 ‘네 유익을 위하여, 네 좋음을 위하여’로 풉니다(12:1). 여기서는 큰 민족을 이룰 수 있으나 고향에서는 자녀의 복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벨에서 흩어진 인류 이야기(11장) 다음에 한 사람이 불립니다. 바벨 사람들은 ‘우리 이름을 내자’고 했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하십니다. 12:3은 이 한 사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이번 주 일곱 날의 구성: ① 부르심과 이주(12:1–13) → ② 이집트(12:14–13:4) → ③ 롯과의 갈라섬(13:5–18) → ④ 왕들의 전쟁과 멜기세덱(14:1–20) → ⑤ 소돔 왕, 별 같은 후손과 믿음(14:21–15:6) → ⑥ 쪼갠 고기 사이의 언약과 하갈(15:7–17:6) → ⑦ 할례의 언약(17:7–27).

미쉬나 아보트 5:3은 아브라함이 열 번의 시험을 받고 모두 이겼다고 합니다. 레크 레카가 첫 시험, 이삭을 바치는 일(22장)이 마지막으로 꼽힙니다. 하프타라는 이사야 40:27–41:16이며, 41:8에서 하나님이 ‘내 친구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부르십니다.

토라 두루마리 근접 사진
토라 두루마리. (CC0 · Wikimedia Commons)

이번 주 읽는 순서

유대 회당은 한 주에 한 편(파라샤)을 일곱 번에 나누어 읽습니다. 안식일에는 일곱 번째를 마치고 예언서(하프타라)를 읽습니다. 날짜는 올해(5787년) 이스라엘 밖(디아스포라) 일정입니다.

요일 날짜 낭독 범위
일요일 10월 18일 첫째 낭독 · 리숀 창세기 12:1–13
월요일 10월 19일 둘째 낭독 · 셰니 창세기 12:14–13:4
화요일 10월 20일 셋째 낭독 · 슐리쉬 창세기 13:5–18
수요일 10월 21일 넷째 낭독 · 르비이 창세기 14:1–20
목요일 10월 22일 다섯째 낭독 · 하미쉬 창세기 14:21–15:6
금요일 10월 23일 여섯째 낭독 · 쉬쉬 창세기 15:7–17:6
안식일(토요일) 10월 24일 일곱째 낭독 · 슈비이 창세기 17:7–27

마프티르(안식일 마지막 낭독 반복): 창세기 17:24–17:27 · 하프타라(예언서 낭독): 이사야 40:27–41:16

인용 읽는 법 · 용어 설명

라쉬(Rashi) — 11세기 프랑스의 랍비 슐로모 이츠하키(1040–1105). 토라 전체에 주석을 단 사람입니다. 평이한 뜻(페샤트)을 먼저 쓰고, 필요하면 옛 미드라쉬를 인용합니다.

람반(Ramban) — 13세기 스페인의 랍비 나흐마니데스. 라쉬를 존중하되 자주 반론하고 깊은 신학을 다룹니다. 이븐 에즈라 — 12세기 스페인의 문법학자·주석가로 평이한 뜻과 문법에 밝습니다.

미드라쉬 — 고대 랍비들이 성경을 풀어 낸 해석 문헌의 종류입니다(‘창세기 라바’, ‘탄후마’, ‘시프라’ 등). 본문에 없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설교가 많아, 라쉬의 ‘(창세기 라바 36:7)’은 “이 풀이는 미드라쉬에서 옴”이라는 표시입니다.

탈무드 · 미쉬나 — 미쉬나(2세기 초)와 그 토론인 게마라(5세기경)를 합한 책이 탈무드입니다. ‘산헤드린 108b’는 한 논문 책의 쪽수 표기입니다(a=앞면, b=뒷면).

온켈로스 · 탈굼 — 토라를 아람어로 옮긴 번역(탈굼)입니다. 번역자의 해석이 섞여 있어 ‘가장 오래된 주석’으로도 읽습니다.

바로잡기 — 본문이 말하는 것과 전승이 덧붙인 것을 가르기 위한 칸입니다. 전승 인용은 영어 번역본(세파리아)을 읽고 한국어로 옮겼으므로, 중요한 곳은 원문과 대조해 확인해 주세요.

이 글의 차례

  1. 일요일 · 창세기 12:1–13
  2. 월요일 · 창세기 12:14–13:4
  3. 화요일 · 창세기 13:5–18
  4. 수요일 · 창세기 14:1–20
  5. 목요일 · 창세기 14:21–15:6
  6. 금요일 · 창세기 15:7–17:6
  7. 안식일(토요일) · 창세기 17:7–27

1. 일요일 · 첫째 낭독 · 창세기 12:1–13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시며 큰 민족과 복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으로 가서 제단을 쌓지만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내려가며 아내를 누이라 말하게 합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2:1 ‘레크 레카’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네 유익을 위해’로 풀며 고향에서는 자녀의 복을 얻지 못하나 그곳에서는 큰 민족이 되고 이름이 알려질 것이라 합니다(로쉬 하샤나 16b). 이븐 에즈라는 이 명령이 아브람이 아직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내려졌다고 봅니다(행 7:2–3과 같은 읽기).

12:1 ‘네 땅…아버지 집’라쉬

이미 아버지와 함께 하란까지 왔는데 또 떠나라고 하시는 것은 ‘더 멀리 가라, 이제 아버지의 집도 떠나라’는 뜻이라고 풉니다.

12:2 ‘큰 민족…복…이름’라쉬

길을 떠나면 세 가지가 줄어든다고 봅니다. 가족(자녀), 재산, 명성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 복이 약속된다고 풉니다. 자녀(큰 민족), 재산(복), 이름(창대케)입니다(창세기 라바 39:11).

12:2 ‘복이 될지라’라쉬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직접 복을 주셨으나(아담, 노아) 앞으로는 아브람에게 복이 맡겨져 그가 원하는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다고 풉니다. 또 우리가 기도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부르는 이유와 이어 풉니다.

12:3 ‘네게서 복을 받으리라’라쉬

미드라쉬가 많지만 평이한 뜻은 이렇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아들에게 ‘아브라함처럼 되어라’고 축복하는 말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븐 에즈라는 ‘너를 축복하는 자들’은 복수이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단수인 점을 짚습니다.

12:5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라쉬

아브라함이 남자들을, 사라가 여자들을 돌이키게 하여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데려왔고 성경은 그들을 ‘만든’ 것으로 친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9:14). 그러나 평이한 뜻은 노예로 얻은 사람들이라고 밝힙니다.

12:6 ‘세겜 땅 모레의 상수리나무’라쉬 · 람반

라쉬는 아브람이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에서 싸울 때를 내다보고 기도했고, 모레는 세겜이며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을 보여 주셨다고 풉니다. 람반은 여기서 한 원칙을 말합니다. ‘조상들에게 일어난 일은 자손들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조상의 여정을 길게 적는다고 합니다.

12:7–8 ‘제단을 쌓고’라쉬

12:7은 자녀와 땅의 좋은 소식에 감사하는 제단, 12:8은 후손이 아이 성에서 아간 때문에 쓰러질 것을 내다보고 기도하는 제단이라고 풉니다. ‘그의 장막(אהלה)’이 ‘그녀의 장막’으로도 읽혀, 먼저 아내의 장막을 치고 그다음에 자기 장막을 쳤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9:15).

12:10 ‘기근이 들었으므로’라쉬 · 람반

라쉬는 기근이 아브람의 시험이었다고 봅니다. 가나안으로 가라 하시고 이제는 떠나게 하시는 것에 불평하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피르케 드라비 엘리에제르 26). 람반은 아브라함이 ‘기근 때문에 이 땅을 떠나 이집트로 간 것’과 ‘아내를 죄의 걸림돌에 놓은 것’을 모두 ‘무심코 지은 큰 죄’라고 하며, 이것이 후손의 이집트 종살이가 정해진 이유라고 말합니다.

12:11 ‘내가 아노니’라쉬

이제야 사래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렸다는 말입니다. 그때까지는 두 사람 모두 지극히 정숙해서 몰랐다는 풀이와, 여행의 고단함이 사람의 외모를 상하게 하는데 사래는 그렇지 않았다는 풀이가 있습니다(탄후마).

12:13 ‘나를 위하여’라쉬

‘누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아브람에게 선물을 줄 것이라는 뜻으로 풉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לֶךְ־לְךָ
레크 레카
너는 떠나라(가라 너를 위하여)

‘레카(לְךָ)’는 ‘너에게’라는 덧말입니다. 라쉬는 ‘네 유익을 위하여’, 다른 풀이는 ‘네 자신에게로(네 참된 정체성으로)’로 읽습니다.

מֵאַרְצְךָ וּמִמּוֹלַדְתְּךָ וּמִבֵּית אָבִיךָ
메아르체카 우미몰라드테카 우미베이트 아비카
네 땅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나라 → 친족 → 아버지의 집으로 범위가 좁혀 갑니다. 떠나기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 순서라는 풀이가 있습니다.

אֶל־הָאָרֶץ אֲשֶׁר אַרְאֶךָּ
엘 하아레츠 아쉐르 아르에카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땅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십니다. 라쉬는 땅을 귀하게 여기게 하고 순종마다 보상하시려고 일부러 알리지 않으셨다고 풉니다(22:2와 같은 방식).

וֶהְיֵה בְּרָכָה
베헤예 브라카
너는 복이 될지라

명령형입니다. 복을 ‘받는 자’에서 복을 ‘나누는 자’로 바뀝니다. 라쉬는 이제까지 하나님이 직접 복을 주셨으나 앞으로는 아브람이 원하는 이에게 복을 준다고 풉니다.

וְנִבְרְכוּ בְךָ
베니브레쿠 베카
네게서 복을 받으리라

니팔형이라 ‘복을 받게 되리라’로도, ‘복을 빌 때 너를 들어 말하리라’(‘아브라함 같기를’)로도 읽힙니다. 22:18에서는 재귀형 ‘히트바레쿠’가 쓰입니다.

הַנֶּפֶשׁ אֲשֶׁר־עָשׂוּ בְחָרָן
하네페쉬 아쉐르 아수 베하란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

문자대로는 ‘만든(עָשׂוּ) 영혼들’입니다. 라쉬의 평이한 풀이는 노예로 얻은 사람들이고, 미드라쉬는 아브라함이 남자를, 사라가 여자를 믿음으로 이끌었다고 풉니다.

וַיִּקְרָא בְּשֵׁם יְהוָה
바이크라 베셈 아도나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니라

12:8. 아브람이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가나안 한복판에 예배 자리를 세우는 행동입니다.

אֲחֹתִי־אָתְּ
아호티 아트
너는 내 누이라

12:13. 반쯤은 사실입니다(20:12에서 이복누이임이 밝혀짐). 본문은 이 거짓을 판단하는 말을 이 자리에서 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배경

11장의 바벨은 ‘이름을 내려는 사람들이 흩어지는’ 이야기였고, 12장은 흩어진 인류 가운데서 한 사람을 불러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고 하십니다. 12:2–3의 약속은 다섯 겹입니다. 큰 민족, 복, 큰 이름, 복이 되는 자, 땅의 모든 족속의 복입니다. 아브람이 간 길(하란 → 세겜 → 벧엘 → 네게브)은 고대 근동 상인과 목자가 다니던 산악 길을 따릅니다.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세겜은 고대부터 성소로 쓰이던 곳입니다. 기근에는 나일 강이 있는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집트 베니 하산의 고분 벽화에는 아시아 유목민 일행이 이집트에 이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일행이 아브람과 직접 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이주가 실제로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12:1) · 로쉬 하샤나 16b

‘레크 레카’는 ‘너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라고 풉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짐이 아니라 복의 길로 읽는 전통입니다.

람반(12:6) · 탄후마

‘조상들의 행적은 자손의 표징’(마아세 아보트 시만 라바님)이라는 원칙으로 창세기를 읽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집트행은 훗날 이스라엘의 이집트행의 예고입니다.

라쉬(12:10) 대 람반(12:10)

기근을 시험으로 읽는 라쉬와 아브라함의 잘못으로 읽는 람반이 갈립니다. 같은 본문이 한쪽에서는 믿음의 증명으로, 다른 쪽에서는 후손의 고난의 원인으로 읽힙니다.

창세기 라바 39:14 · 라쉬(12:5)

‘하란에서 얻은 영혼들’을 아브라함과 사라가 모은 개종자로 풉니다. 이것이 유대 전승에서 ‘개종자를 받아들이는 일의 시초’로 자주 인용됩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아브람은 언제 부르심을 받았나
유대 전승

라쉬는 12:1을 ‘아버지의 집도 이제 떠나라’는 더 멀리 가라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이븐 에즈라는 하나님이 아브람이 아직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이미 떠나라고 명하셨다고 봅니다.

본문 문맥

12:1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행 7:2–4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하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나타나셨다고 하고, 창 15:7은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라고 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2:1을 11:31의 끝과 이어 읽으며, 아브람이 아버지가 죽은 뒤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풀이는 이미 나그네였다면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이 불필요했을 것이므로 맞지 않고 스데반이 ‘적합한 해석자’라고 합니다. 부르심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린 것이지 변덕이나 도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평가

이븐 에즈라, 칼빈, 스데반이 같은 방향입니다. 12:1을 ‘갈대아에서의 첫 부르심의 확인’으로 읽는 것이 본문(창 15:7)과 행 7장에 가장 맞습니다. 라쉬의 ‘더 멀리 가라’는 읽기는 이 시간 순서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보완12:3 ‘네게서 복을 받으리라’
유대 전승

라쉬는 평이한 뜻이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아브라함처럼 되라고 축복하는 것’이라고 풉니다. 이븐 에즈라는 ‘너를 축복하는 자들’이 복수이고 ‘저주하는 자’가 단수인 점을 짚습니다.

본문 문맥

12:3의 ‘니브레쿠’는 니팔(수동)이라 ‘복을 받으리라’로도 ‘복을 빌 때 너를 들어 말하리라’로도 읽힙니다. 22:18은 재귀형을 씁니다. 행 3:25와 갈 3:8은 이 약속을 복음의 예고로 읽습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2:3에서 히브리어 표현이 ‘행복의 본보기’의 뜻도 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유대인들이 제시하는 용례가 ‘자주는 맞으나 항상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22:18과 갈 3:17(430년)의 논증을 따라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은 본보기뿐 아니라 복의 원인이며,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가 숨어 있다’고 봅니다.

평가

두 읽기가 모두 문법적으로 가능합니다. 전승의 ‘축복 공식’은 이 약속의 평이한 쓰임을, 칼빈은 신약이 이 약속을 읽는 방식을 반영합니다. 칼빈이 상대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한 뒤 신약의 근거로 확장하는 순서를 따르면, 본문의 문법과 신학적 읽기를 구별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보완12:10–13 아브라함의 두려움과 ‘누이’라는 말
유대 전승

람반은 아브라함이 기근 때문에 땅을 떠난 것과 아내를 죄의 걸림돌에 놓은 것을 ‘무심코 지은 큰 죄’로, 후손의 이집트 종살이의 원인이라고 봅니다. 라쉬는 기근을 시험으로, 사래의 아름다움을 이집트 사람들이 주목했기 때문이라고 풉니다.

본문 문맥

12:18–19에서 바로가 ‘네가 어찌 내게 이렇게 행하였느냐’고 꾸짖습니다. 20:12는 사라가 이복누이임을 밝힙니다. 히 11:8–10은 아브라함의 이주를 믿음으로 평가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2:10에서 기근이 ‘믿음이 뿌리까지 시험받는 큰 시련’이었으나 모세가 ‘이집트에 나그네로 내려갔다’는 한 마디로 그가 약속의 땅을 마음에서 버리지 않았음을 보인다고 풉니다. 12:11에서는 ‘누이’라 한 일을 두고 ‘거짓이 섞여 있고 아내의 정절을 지킬 방어를 빼앗은 점에서 크게 잘못’이라 하면서도, 그가 높은 목적을 가졌을 것이라고 변호합니다.

평가

람반과 칼빈 모두 아브라함의 잘못을 말한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칼빈은 믿음과 약함을 함께 보여 줍니다. 본문은 이를 직접 평가하지 않다가 바로의 꾸짖음(12:18)으로 간접 평가합니다. ‘성경의 영웅도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그 믿음은 실제였다’는 사실을 함께 말하는 것이 정직한 읽기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12:1의 ‘명령이 아브람이 하란에 있을 때’ 내려졌는지, 우르에서 내려졌는지는 본문만으로 분명하지 않습니다. 12:1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고 하여 완료로 쓸 수 있고, 이븐 에즈라는 우르에서 이미 말씀하셨다고 봅니다. 행 7:2–4도 하란 이전(메소포타미아)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창 11:31(데라가 가나안으로 가려고 떠났다)과 함께 읽으세요.

12:3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를 메시아적 약속으로 읽는 것(갈 3:8)은 신약의 읽기이고, 라쉬는 ‘너 같기를’이라는 축복 공식으로 읽습니다. 히브리어 ‘니브레쿠’가 니팔(수동)인지 재귀인지가 갈리기 때문에 문법만으로는 하나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두 읽기가 이 약속의 폭을 보여 줍니다.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이 곧 ‘개종자’라는 것은 미드라쉬이고 평이한 뜻은 얻은 종들입니다. 라쉬도 두 풀이를 나란히 적습니다.

아브람이 사래를 누이라 한 것을 본문은 평가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바로가 ‘네가 어찌 이렇게 행하였느냐’(12:18)고 꾸짖는 장면이 나오고, 람반은 이를 ‘죄’라고 부릅니다. 한편 20:12는 사라가 이복누이임을 밝힙니다. ‘반은 참’이라는 점으로 변명하기보다 본문이 말하는 긴장을 그대로 읽으세요.

오늘의 물음

‘가라,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아브람은 목적지를 알지 못한 채 떠났습니다. 지금 내게 ‘네 아버지의 집’은 무엇입니까? 다 알려지지 않은 길로 한 걸음 내딛어야 할 일이 있습니까?

2. 월요일 · 둘째 낭독 · 창세기 12:14–13:4

바로가 사래를 궁에 데려가자 하나님이 재앙으로 개입하시고, 바로는 아브람을 꾸짖고 재산과 함께 내보냅니다. 아브람은 돌아와 벧엘의 제단 자리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2:14 ‘이집트에 이르매’라쉬

‘그들이 이르렀을 때’가 아니라 ‘아브람이’라고 단수로 쓴 것은 아브람이 사래를 상자에 숨겼다가 세관에서 열어 보여졌음을 가르친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0:5).

12:15 ‘바로 앞에서 칭찬하매’라쉬

바로의 신하들이 ‘이 여자는 왕께 합당하다’고 서로 말했다고 풉니다.

12:16 ‘그를 후대하여’라쉬

바로가 사래 때문에 아브람을 후대했다는 뜻입니다.

12:17 ‘재앙을 내리시니’라쉬

부부 관계를 해롭게 하는 ‘라아톤’이라는 병이 바로를 쳤다고 풉니다. ‘사래의 말로 말미암아’는 사래가 천사에게 ‘쳐라’ 하면 천사가 쳤다는 뜻이라고 합니다(탄후마). ‘그 집’은 탈굼처럼 ‘그의 집 사람들’로 읽는 것이 평이합니다.

12:19 ‘데리고 떠나라’라쉬

아비멜렉은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 좋은 대로 거하라’(20:15) 했으나 바로는 ‘가고 머물지 말라’고 했다고 대조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음란에 빠지기 쉬워서라는 이유를 겔 23:20에서 찾습니다.

12:20 ‘바로가 명하여’라쉬

‘그를 위해’ 호위하고 지키라고 명했다는 뜻으로 풀고, 탈굼처럼 ‘배웅했다’고 읽습니다.

13:2 ‘아브람이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라쉬

‘카베드(무겁다)’는 짐이 많다는 뜻입니다. 람반은 이 대목 전체를 후손의 이집트 종살이와 출애굽(재산을 가지고 나옴)의 예고로 읽습니다.

13:3 ‘그가 가던 길을 따라’라쉬

아브람이 이집트로 갈 때 묵었던 여관들에 그대로 묵으며 돌아왔다고 풉니다. 여관을 바꾸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가르칩니다(아라힌 16b).

13:4 ‘처음에 제단을 쌓은 곳’라쉬

‘거기서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가 새로운 행동이 아니라 이전에 한 일을 다시 가리킨다고 풉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וַיְנַגַּע יְהוָה
바이낭가 아도나이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시니

‘네가(נֶגַע)’는 출애굽기에서 이집트에 내린 재앙에 쓰이는 말입니다. 아브람의 이집트행과 출애굽 이야기가 같은 어휘로 이어집니다.

וַיְהַלְלוּ אֹתָהּ
바예할루 오타
그를 칭찬하더라

‘힐렐(찬양하다)’이 바로의 신하들이 사래의 미모를 말하는 데 쓰입니다. 찬양이라는 낱말이 위험이 되는 경우입니다.

מַה־זֹּאת עָשִׂיתָ לִּי
마 조트 아시타 리
네가 내게 이렇게 행함은 어찌 됨이냐

이방 왕이 믿는 이를 꾸짖는 대목입니다. 13:9의 ‘네가 어찌’와 같은 형식이며 20:9, 26:10에도 이어집니다.

וַיְשַׁלְּחוּ
바예샬레후
그를 보내니라

‘샬라흐(내보내다)’는 출 12:33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서둘러 내보냈다’와 같은 동사입니다.

כָּבֵד מְאֹד
카베드 메오드
매우 부유하더라

‘카베드(무거운)’는 12:10에서 기근이 ‘심하다’고 한 낱말과 같습니다. ‘무거운 기근’이 ‘무거운 재산’으로 바뀝니다.

הַנֶּגְבָּה
한네그바
네게브 쪽으로

‘네게브’는 남쪽을 뜻하는 말이자 광야 이름입니다. 이집트에서 ‘올라가며’(13:1) 가나안의 남쪽에 닿습니다.

히브리 배경

12:10–13:4의 이야기는 출애굽기의 줄거리를 미리 보여 주는 모형으로 읽힙니다. 기근 → 이집트로 내려감 → 이집트 왕이 약자를 취함 → 하나님이 재앙으로 개입 → 이집트가 ‘내보냄’ → 짐승·은·금을 많이 가지고 나옴. 람반은 이 구조를 ‘조상들의 행적은 자손의 표징’이라는 원칙으로 읽습니다. 사래의 나이는 65세 안팎이지만, 본문은 나이를 말하지 않고 아름다움만 말합니다. 고대 궁정에서는 외국 사절이 왕에게 여자를 바치는 일이 있었고, 형제나 누이라는 신분이 의미를 가졌습니다. 아브람이 벧엘 천막으로 돌아가 ‘처음에 쌓은 제단’에서 다시 부르는 모습(13:4)은 시작점으로의 복귀를 보여 줍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람반(12:10)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겪은 일은 이스라엘이 훗날 이집트에서 겪을 일의 ‘표징’이라고 읽습니다. 기근, 이집트로 내려감, 왕에게 아내가 끌려감, 재앙, 내보냄, 부유하게 나옴이 모두 대응됩니다.

라쉬(12:17) · 탄후마

사래의 기도와 말에 따라 천사가 바로를 쳤다는 풀이는 하나님이 약한 이를 지키시는 방식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아라힌 16b · 라쉬(13:3)

아브람이 이전에 묵은 여관에 다시 묵는다는 데서 ‘묵은 곳을 바꾸지 말라’는 예절을 가르칩니다. 본문이 지명 순서를 정리하는 곳에서 생활 윤리를 이끌어 내는 사례입니다.

라쉬(12:19)

바로의 ‘데리고 떠나라’는 외국 왕의 호의가 아니라 이집트 풍속에 대한 경계로 풉니다. 아비멜렉과 비교하는 방식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보완‘조상들의 행적은 자손의 표징’과 ‘본보기’
유대 전승

람반(12:6, 12:10)은 아브라함의 이집트행과 바로의 일이 후손의 이집트 종살이와 출애굽의 표징이라는 원칙으로 읽습니다.

본문 문맥

12:10–20과 출애굽기는 같은 낱말(기근, 내려감, 재앙, 내보냄, 부유해짐)을 공유합니다. 고전 10:11은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을 ‘본보기’라 하고, 갈 4:24는 아브라함 가정의 이야기를 비유로 읽습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2:10에서 아브람을 ‘믿는 자들의 몸의 한 지체가 아니라 모든 신자의 공동의 아버지’로 보고, 따라서 모든 이가 그의 본보기를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기근과 전쟁으로 어디로 쫓기든 ‘우리의 몸은 이리저리 옮겨져도 믿음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끌어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5는 율법 시대에 은혜언약이 모형과 제사와 약속으로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평가

람반은 이 이야기를 이스라엘 민족사의 예표로, 칼빈은 믿는 개인의 본보기로 읽습니다. 둘 다 신약의 모형론(고전 10:11, 갈 4:24)과 닿아 있습니다. 본문이 스스로 선언한 틀이 아니라 읽는 이가 발견하는 구조이므로, 본문의 서술(12:10–20)과 신약의 용례를 함께 확인하며 쓰세요.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사래를 상자에 숨겼다’(12:14 라쉬)와 ‘라아톤 병’은 미드라쉬의 상상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큰 재앙’(נְגָעִים גְּדֹלִים)이 바로와 그의 집에 임했다는 것뿐입니다.

사래가 정절을 지켰는가(바로가 접근했는가)에 대해 본문은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12:19의 ‘내가 그를 취하여 내 아내로 삼았나니’라는 바로의 말도 접근이 있었는지를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20:3–6의 아비멜렉 이야기는 하나님이 접근을 막으셨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12장의 사래에 대해서는 이 점을 단정하지 않는 것이 본문에 충실합니다.

‘조상들의 행적은 자손의 표징’이라는 람반의 원칙은 유익한 읽기이지만 본문이 스스로 선언한 틀은 아닙니다. 읽는 이가 구조적 대응을 발견하는 해석입니다.

재산이 늘어난 것(13:2)을 ‘이집트에서 얻은 부당한 이득’으로만 읽을 필요도, 순전한 복으로만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본문은 바로가 ‘후대했다’(12:16)와 ‘내보냈다’(12:20)를 함께 적습니다.

오늘의 물음

아브람은 두려워서 아내를 ‘누이’라고 했고 하나님은 그 실수 위에서도 아내와 그를 지키셨습니다. 두려움에서 나온 내 선택을 하나님이 어떻게 덮어 주셨던 적이 있습니까? 아브람이 ‘처음 제단’으로 돌아간 것처럼 내가 돌아갈 자리는 어디입니까?

3. 화요일 · 셋째 낭독 · 창세기 13:5–18

아브람과 롯의 가축이 늘어 목자들이 다투자 아브람이 먼저 양보하고, 롯은 요단 들을 택해 소돔 가까이 장막을 칩니다. 롯이 떠난 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땅 전체를 영원히 주리라 약속하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3:5 ‘롯에게도’라쉬

롯이 이 모든 소유를 가진 이유가 ‘아브람과 함께 다녔기 때문’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1:3).

13:7 ‘다툼이 있었으므로’라쉬

롯의 목자들이 악해서 남의 밭에서 가축을 먹였고, 아브람의 목자들이 도둑질이라 꾸짖자 ‘이 땅은 아브람에게 주어졌고 아브람에게 아들이 없으니 롯이 상속자라 우리가 먹는 것은 자기 것을 먹는 것’이라고 대꾸했다고 풉니다. 그러나 본문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다’(13:7)고 적혀 있으니 아브람은 아직 땅을 차지할 자격이 없었다고 라쉬는 반박합니다(창세기 라바 41:5).

13:8 ‘우리는 형제’라쉬

미드라쉬는 두 사람의 얼굴이 닮았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1:6).

13:9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라쉬

아브람이 ‘어디 있든 내가 너를 지켜 주는 방패와 도우미가 되겠다’고 한 뜻으로 풉니다. 실제로 14:14에서 롯이 포로가 되자 아브람이 구하러 갑니다.

13:10 ‘여호와의 동산 같고’라쉬

나무로는 동산 같고 곡식으로는 이집트 같다고 풉니다. 미드라쉬(호라요트 10b, 창세기 라바 41:7)는 롯이 이 땅을 택한 것을 불리하게 읽어, 소돔 사람들이 음란에 빠진 곳이라 택했다고 풉니다.

13:11 ‘동으로 옮기니’라쉬

롯이 아브람에게서 떨어져 서쪽으로 가며 ‘나는 아브람도 그의 하나님도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미드라쉬가 풉니다(창세기 라바 41:7).

13:13 ‘소돔 사람은 악하며’라쉬

몸으로 악하고(라) 재물로 죄를 지었다고 풉니다(산헤드린 109a). ‘여호와 앞에’는 그들이 자기들의 주인을 알면서도 일부러 반역했다는 뜻입니다(시프라). 롯이 그들과 함께 살았기에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잠 10:7)가 롯에게 적용된다고 풉니다(요마 38b).

13:14 ‘롯이 떠난 후에’라쉬

악한 롯이 곁에 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하지 않았다고 풉니다(탄후마).

13:16 ‘티끌같이’라쉬

티끌을 셀 수 없듯 후손도 셀 수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13:18 ‘마므레’라쉬

마므레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רִיב
리브
다툼

목자들 사이의 다툼(13:7)이 두 사람의 갈림으로 이어집니다. 아브람은 ‘다투지 말자, 우리는 형제다’(13:8)고 합니다.

אֲנָשִׁים אַחִים
아나쉼 아힘
형제 된 사람들

‘아힘’은 혈연뿐 아니라 가깝다는 뜻입니다. 숙질인데도 형제라 부르는 것은 관계를 지키려는 말입니다.

וַיִּשָּׂא לוֹט אֶת־עֵינָיו
바이싸 로트 에트 에이나브
롯이 눈을 들어

13:10. 같은 표현이 13:14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보라’고 하실 때 쓰입니다. 롯은 자기 눈으로 보고 고르고, 아브람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을 봅니다.

כְּגַן־יְהוָה כְּאֶרֶץ מִצְרָיִם
케간 아도나이 케에레츠 미츠라임
여호와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더라

요단 들의 풍요를 에덴(여호와의 동산)과 이집트 곡창에 견줍니다. 롯의 눈은 풍요를 봅니다.

רָעִים וְחַטָּאִים לַיהוָה מְאֹד
라임 베하타임 라도나이 메오드
여호와 앞에 악하고 죄인이었더라

‘라(악)’는 사람에 대한 악, ‘하타(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로 나누어 읽습니다(산헤드린 109a).

כַּעֲפַר הָאָרֶץ
카아파르 하아레츠
땅의 티끌같이

13:16. 별(15:5)·모래(22:17)와 함께 후손의 수를 가리키는 세 가지 비유 가운데 첫째입니다.

הִתְהַלֵּךְ בָּאָרֶץ לְאָרְכָּהּ וּלְרָחְבָּהּ
히트할레크 바아레츠 레오르카 울르라흐바
이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니라

땅을 ‘밟아 보라’는 것은 소유의 행위입니다(신 11:24, 수 1:3). 아브람이 다니는 곳이 곧 약속의 땅이 됩니다.

히브리 배경

고대 목축 사회에서는 풀과 우물을 놓고 다투는 일이 흔했고, 이 경우 가까운 친족이라도 갈라서는 것이 오히려 관계를 지키는 길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눈여겨볼 것은 ‘연장자인 아브람이 선택권을 양보한 것’입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가장이 먼저 고릅니다. 롯의 선택은 눈에 보이는 풍요(‘여호와의 동산 같고’)를 기준으로 하지만, 본문은 곧바로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고 큰 죄인이었더라’(13:13)고 덧붙입니다. 요단 들과 사해 남쪽은 당시에 물이 많은 땅이었다고 학자들은 봅니다. 롯이 떠난 뒤에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다시 말씀하시고(13:14), 땅을 ‘눈에 보이는 모든 곳’으로 확장하십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미쉬나 아보트 5:10

‘내 것은 내 것, 네 것은 네 것’이라고 하는 사람을 보통 유형이라 하면서도 ‘어떤 이는 이것이 소돔의 성품이라 한다’고 덧붙입니다. 소돔의 죄를 이웃에게 베풀지 않는 인색함으로 읽는 한 갈래의 전승입니다.

산헤드린 109a · 라쉬(13:13)

소돔 사람이 ‘몸으로 악하고 재물로 죄를 지었다’는 풀이는 소돔의 죄를 음란과 재물의 인색으로 나눕니다.

라쉬(13:14) · 탄후마

롯이 곁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하지 않았다는 풀이는 ‘악인과의 동행은 영적 귀를 막는다’는 가르침입니다.

라쉬(13:9)

양보하는 아브람이 ‘어디 있든 내가 곁에서 방패가 되겠다’고 말한다는 풀이는 갈라서면서도 책임을 놓지 않는 모습으로 읽힙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롯의 선택과 ‘눈에 보이는 풍요’
유대 전승

라쉬는 롯이 소돔 지역을 택한 것을 불리하게 읽어(호라요트 10b), 그들이 음란에 빠진 곳이라 택했다고 풉니다. 또 롯이 ‘나는 아브람도 그의 하나님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고 미드라쉬는 전합니다.

본문 문맥

13:10–11은 ‘롯이 눈을 들어’ 풍요로운 요단 들을 택했다고 하고, 13:13은 곧바로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한 죄인’이라고 덧붙입니다. 13:14는 롯이 떠난 뒤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보라’고 하십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3:10에서 롯이 ‘마치 자신이 모든 면에서 윗사람인 듯 더 좋은 몫을 가로챘고’ 아브람은 조용히 이를 참았다고 합니다. 13:13에서는 롯이 ‘욕심만큼이나 성급했던 선택’으로 사나운 이웃의 악함과 부딪히게 되었다고 풀고, ‘우리의 눈을 믿어서는 안 된다. 낙원에 있다고 여기던 롯이 지옥의 깊이에 거의 빠질 뻔했다’고 합니다. 13:5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람의 부요함에 쓴맛을 섞어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신다고 풉니다.

평가

라쉬의 부정적 읽기와 칼빈의 읽기가 같은 방향입니다. 본문 자체가 롯의 선택(‘눈을 들어’)과 소돔의 악(13:13)을 나란히 두고, 하나님이 ‘눈을 들어 보라’고 하시는 이는 아브람(13:14)이라는 대조를 만들어 둡니다. 다만 롯을 ‘의인’이라 부르는 벧후 2:7–8도 같은 성경이므로 롯에 대한 평가를 한쪽으로만 읽지 마세요.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소돔의 죄를 하나로만 말하는 것은 본문보다 좁은 읽기입니다. 13:13은 ‘악하고 큰 죄인’이라고만 말하고, 19장은 손님에 대한 집단적 폭력을 보여 줍니다. 겔 16:49–50은 소돔의 죄를 ‘교만, 음식의 풍족, 평안한 안일,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돕지 않음’과 ‘가증한 일’이라고 말하며, 미쉬나 아보트 5:10은 ‘내 것은 내 것’이라는 태도를 두고 ‘어떤 이는 소돔의 성품이라 한다’고 합니다. 한 가지만 골라 확정하기보다 본문과 이 증언들을 함께 읽으세요.

롯을 ‘의인’으로 부르는 신약(벧후 2:7–8)과 롯을 낮추어 읽는 라쉬·미드라쉬는 같은 인물에 대한 다른 시선입니다. 본문은 롯이 눈에 보이는 풍요를 따라간 선택(13:10–11)을 담담히 적고, 이후 19장에서 그 결과를 보여 줍니다.

‘롯이 아브람의 상속자라서 남의 밭에서 먹어도 된다’는 목자들의 변명(라쉬 13:7)은 미드라쉬의 상상이지 본문이 아닙니다. 본문은 ‘다툼이 있었다’고만 적습니다.

13:15의 ‘영원히’(עַד־עוֹלָם)는 땅의 약속에 붙은 낱말입니다. 17:8의 ‘영원한 기업’과 함께 땅의 약속이 영구적이라는 근거로 읽히지만, 이 약속이 사람의 순종에 어떻게 이어지는지(신 28–30장)는 오경의 뒤 본문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오늘의 물음

아브람은 권리가 있었는데도 ‘다투지 말자’며 먼저 양보했습니다.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권리’ 가운데 관계를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까? 롯처럼 ‘눈에 보이는 좋음’을 기준으로 한 선택은 없었는지 돌아봅시다.

4. 수요일 · 넷째 낭독 · 창세기 14:1–20

메소포타미아의 네 왕이 소돔 왕 등 다섯 왕을 쳐서 롯이 포로로 잡히자, 아브람이 318명의 사병과 함께 추격하여 구해 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축복합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4:1 ‘아므라벨’라쉬

아므라벨은 님롯과 같다고 풉니다. 아브람에게 ‘불가마에 뛰어들라(פול) 하여 말(אמר)’한 이이기 때문입니다(에루빈 53a).

14:2 ‘베라, 비르사, 시납, 세메벨’라쉬

이 이름들을 뜻으로 풉니다. 베라는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악함, 비르사는 악함으로 올라선 자, 시납은 하늘의 아버지를 미워함, 세메벨은 하나님께 반역하려 날개를 폈음입니다(탄후마).

14:3 ‘싯딤 골짜기’라쉬

들(שדות)이 많아 이렇게 불렸고, 훗날 바다가 들어와 소금 바다가 되었다고 풉니다.

14:7 ‘아말렉 족속의 온 땅’라쉬

아말렉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훗날의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창세기 라바 42:7). ‘엔미스밧’은 훗날 모세와 아론이 심판받을 일(므리바)과 이어지는 이름이라 풉니다.

14:12 ‘소돔에 거주하였음이라’라쉬

롯에게 이런 일이 생긴 이유는 그가 소돔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2:7).

14:13 ‘도망한 자’라쉬

라쉬는 이 사람이 르바임과의 전쟁에서 도망쳐 온 옥이라고 풉니다. ‘히브리 사람’은 강 건너편에서 온 사람입니다(창세기 라바 42:8).

14:14 ‘훈련된 사병 삼백십팔 명’라쉬

‘하니카브’의 철자가 ‘그의 훈련된 자’로도 읽혀, 아브람이 종교 의무를 가르쳐 온 엘리에셀을 가리킨다고 풉니다. 엘리에셀(אליעזר)의 수치가 318이라 ‘엘리에셀 혼자 무장했다’고 풉니다(네다림 32a). ‘단까지’는 아브람의 힘이 여기서 빠진 것으로, 후손이 거기 금송아지를 세울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이라 풉니다(산헤드린 96a).

14:15 ‘밤에’라쉬

평이한 뜻은 ‘그와 그의 종들이 나뉘어 밤에 쳤다’입니다. 미드라쉬는 밤을 둘로 나누어 전반은 아브람을 위한 기적에, 후반은 이집트에서의 한밤중 기적을 위해 비축했다고 풉니다.

14:17 ‘왕의 골짜기’라쉬

온켈로스는 ‘왕의 경기장’으로 옮깁니다. 미드라쉬는 모든 민족이 아브람을 우두머리로 세우는 데 합의한 골짜기라고 풉니다.

14:18 ‘멜기세덱’라쉬

멜기세덱은 노아의 아들 셈과 같다고 풉니다(네다림 32b). ‘떡과 포도주’는 전쟁에 지친 이를 위한 대접이고, 아브람이 그의 후손(왕들)을 죽인 데 원한이 없음을 보인 것이며 훗날의 소제와 전제를 암시한다고도 풉니다.

14:19–20 ‘천지의 주재’라쉬

시 134:3의 ‘천지를 지으신’과 같은 뜻으로, 지으심으로 소유가 되셨다고 풉니다. ‘십분의 일’은 멜기세덱이 제사장이었기에 주었다고 합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הָעִבְרִי
하이브리
히브리 사람

성경에서 ‘히브리 사람’이 처음 나오는 대목(14:13)입니다. 라쉬는 ‘강 건너편(עבר) 사람’으로 풀고, 일부 학자는 고대 문헌의 ‘하비루’와 연결 지으려 하지만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חֲנִיכָיו
하니카브
그의 훈련된 사병

14:14. 이 낱말은 성경에서 여기뿐입니다. ‘하나크(훈련하다·봉헌하다)’와 같은 뿌리입니다. 이 뿌리가 ‘하누카’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וַיָּרֶק
바야렉
무장시켜

칼을 ‘빼다’에서 온 낱말(출 15:9 ‘내가 칼을 뽑아’)입니다. 훈련된 사병을 소집해 무장한 모습입니다.

מַלְכִּי־צֶדֶק
말키 체덱
멜기세덱(의의 왕)

‘말키(내 왕)’와 ‘체덱(의)’의 합성입니다. 그는 ‘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אֵל עֶלְיוֹן
엘 엘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가나안과 페니키아에서 쓰이던 신의 칭호입니다. 아브람은 이 칭호를 ‘여호와’와 같은 분으로 동일시합니다(14:22).

קֹנֵה שָׁמַיִם וָאָרֶץ
코네 샤마임 바아레츠
천지의 주재(소유자)

‘카나’는 ‘얻다·소유하다·창조하다’입니다. 라쉬는 ‘지으시어 소유하셨다’로 풉니다.

מִגֵּן
미겐
넘겨주신

14:20. ‘마겐(방패)’과 같은 뿌리이나 여기서는 ‘넘겨 주다’(호 11:8 ‘어찌 너를 넘기겠느냐’)로 읽는다고 라쉬는 풉니다.

מַעֲשֵׂר
마아세르
십분의 일

성경에서 십일조가 처음 나오는 자리(14:20)입니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줍니다.

히브리 배경

창세기 14장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국제 전쟁을 다룹니다. 네 왕(엘람, 시날, 엘라살, 고임)이 동쪽에서 내려와 요단 들의 다섯 성읍을 ‘열두 해’ 동안 지배했고 열세째 해에 반역하자 열네째 해에 진군합니다. 진군 경로는 ‘왕의 대로(King’s Highway)’로 알려진 요단 동편의 길을 따릅니다. 그돌라오멜이라는 이름은 엘람어 ‘쿠두르’로 시작하는 왕의 이름 형식과 맞아 이름 자체는 자연스럽다고 학자들은 말하지만, 성경 밖 자료에서 이 인물이 확인된 적은 없습니다. 살렘은 시 76:2에서 예루살렘과 이어지고, ‘엘 엘욘’은 가나안의 신 칭호입니다. 멜기세덱은 시 110:4와 히 7장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이 장의 인물은 아브람이 ‘히브리 사람’으로 소개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14:18) · 네다림 32b

멜기세덱을 노아의 아들 셈으로 봅니다. 홍수 뒤에도 살아 있던 셈이 살렘(예루살렘)의 왕이 되었다는 계보적 해석입니다.

라쉬(14:14) · 네다림 32a

318명을 엘리에셀 한 사람으로 풀이하는 것은 숫자 풀이(게마트리아)입니다. 히브리 글자의 수 값(א1+ל30+י10+ע70+ז7+ר200)이 318입니다.

라쉬(14:7) · 창세기 라바 42:7

본문에 아직 없는 이름(아말렉, 단)이 나오는 것을 ‘훗날의 이름으로 적었다’고 설명하는 방식은 라쉬가 지명 문제를 푸는 흔한 방법입니다.

산헤드린 96a · 라쉬(14:14)

아브람이 단에서 힘이 빠진 이유를 후손의 우상숭배를 내다본 데서 찾는 풀이는 조상의 행적에 후손의 역사를 비추는 읽기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멜기세덱은 셈인가
유대 전승

라쉬는 멜기세덱을 노아의 아들 셈이라고 풉니다(네다림 32b).

본문 문맥

창세기 14장은 그를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만 소개합니다. 시 110:4는 메시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라 하고, 히 7:1–3은 그가 ‘아비도 어미도 계보도 없다’고 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4:18에서 ‘셈이라 상상하는 사람이 많으나 나는 여러 이유로 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며 세 가지를 듭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기억에 합당한 이를 이처럼 새롭고 모호한 이름으로 부르실 리 없고, 셈이 동쪽에서 유대로 옮겨 왔다는 증거가 없고, 셈이 가나안에 살았다면 아브람이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뒤늦게 찾아갔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타락한 시대에 홀로 정직하게 하나님의 종교를 지킨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보며, 히 7:3의 ‘근원 없이’를 근거로 듭니다.

평가

본문은 멜기세덱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므로, 셈이라는 라쉬의 계보적 풀이는 추정입니다. 칼빈은 이 침묵을 하나님이 일부러 두신 모형의 자리로 읽고, 히 7:3이 그 읽기를 따릅니다. 이 침묵을 읽는 방식에서 갈라지는 대목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멜기세덱의 정체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것은 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아브람을 축복하고 십분의 일을 받았다는 것뿐입니다. 라쉬는 셈이라 풀고, 시 110:4와 히 7:1–3은 그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읽습니다. 히 7:3의 ‘아비도 어미도 계보도 없다’는 창세기 본문의 침묵을 모형론적으로 읽은 것이며, 창세기가 그렇게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므라벨=님롯(에루빈 53a)과 318명=엘리에셀은 미드라쉬이고, 아므라벨 등 왕들의 정체와 연대는 성경 밖 자료에서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름 형식이 자연스럽다는 것과 사건이 입증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이 ‘히브리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인종·민족 명칭인지 사회적 신분(고대 문헌의 하비루)인지는 학계에서 논쟁 중입니다. 본문은 ‘에벨의 후손’(10:21, 11:14)이나 ‘강 건너편’에서 온 사람이라는 읽기에도 열려 있습니다.

십일조의 시작을 이 대목에서 찾는 것은 가능하지만, 본문은 아브람이 ‘전리품에서’ 주었다고 하며 율법의 십일조 제도(레 27, 민 18)와 같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이 넘겨 주신 승리에 대한 응답’으로 읽는 것이 본문에 가깝습니다.

오늘의 물음

아브람은 혼자가 아니라 ‘자기 집에서 훈련된 사람들’과 함께 롯을 구하러 갔습니다. 나는 갈라서 간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승리 뒤에 멜기세덱 앞에서 십분의 일을 드린 것처럼, 내 성공을 어디서 ‘감사’로 돌려드립니까?

5. 목요일 · 다섯째 낭독 · 창세기 14:21–15:6

소돔 왕이 전리품을 주겠다 하나 아브람은 ‘실 한 오라기도’ 받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이어 하나님이 ‘나는 네 방패요 상급’이라 하시고 아브람이 자녀 없음을 호소하자 별을 보이시며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은 믿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4:22 ‘내가 손을 들어’라쉬

‘나는 지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내 손을 든다’는 맹세의 표현입니다. 이 동사 형태는 22:16의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와 같은 방식이라고 풉니다.

14:23 ‘한 오라기 실로부터’라쉬

전리품의 한 오라기도 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왕이 자기 재물로 보상해 주려 해도 받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브람을 부유하게 하였다 하지 못하게’는 하나님이 이미 ‘내가 너에게 복을 주리라’(12:2)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풉니다.

14:24 ‘나와 동행한 사람들’라쉬

아브람은 자기 사병이 전투에 나갔으나 마므레·에스골·아넬은 짐을 지켰으므로 그들의 몫을 정하라고 하며 자기 사병의 몫은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15:1 ‘이 일 후에’라쉬

‘아하르(이후에)’는 ‘바로 그 일 직후’를 뜻합니다. 아브람은 왕들을 죽이고 ‘이 승리에 내 선행의 보상을 다 받아 버린 것은 아닌가’ 불안했고, 하나님이 ‘너는 이 사람들을 죽인 일로 벌을 받지 않으리라(방패), 상급은 매우 크리라’고 답하셨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4:5).

15:2 ‘자식이 없이 가나이다’라쉬 · 람반

라쉬는 ‘아리리’를 메나헴의 풀이에 따라 ‘상속자가 없는’으로 읽고, ‘다메섹’은 아브람의 종이 다메섹까지 왕들을 추격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 미드라쉬(창세기 라바 44:9)도 소개합니다. 람반은 아브람이 ‘왕들에게서 구하셨으나 후손의 끊김은 막아 주지 않으셨다’고 호소한 것으로 읽습니다.

15:5 ‘밖으로 이끌고’라쉬

평이한 뜻은 장막 밖으로 데려가 별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미드라쉬는 ‘점성술(운명)에서 나오라. 아브람은 아들이 없지만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고 사래는 낳지 못하나 사라는 낳으리라’는 뜻으로 풉니다. 또 하나님이 아브람을 별 위로 올리셔서 ‘위에서 내려다보라’(하벳트)고 하셨다는 풀이도 있습니다(창세기 라바 44:12).

15:6 ‘믿으니’라쉬 · 람반 · 이븐 에즈라

라쉬는 하나님이 아브람의 믿음을 공로(의)로 여기셨다고 풉니다. 그가 이 약속에는 표징을 구하지 않았으나 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리이까’(15:8)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람반은 이 풀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며 ‘아브람이 이 약속(아들)을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여겼다’는 읽기를 제안합니다. 이븐 에즈라는 ‘츠다카’를 ‘정의·옳음’으로 풉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הֲרִמֹתִי יָדִי
하리모티 야디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였노니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은 맹세의 몸짓입니다. 라쉬는 ‘내가 들었다’가 아니라 ‘내가 손을 든다’(지금 맹세한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מִחוּט וְעַד שְׂרוֹךְ־נַעַל
미후트 베아드 스로크 나알
한 오라기 실로부터 신발 끈까지

가장 작은 것에서 작은 것까지라는 강조입니다. 소돔 왕의 재물로 ‘내가 아브람을 부유하게 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는 뜻입니다(14:23).

מָגֵן
마겐
방패

15:1. ‘나는 너의 방패’. 라쉬는 이 방패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인 데 대한 벌로부터 지켜 준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שְׂכָרְךָ הַרְבֵּה מְאֹד
스카르카 하르베 메오드
네 상급이 매우 크리라

‘방패’와 ‘상급’이 한 문장에 있습니다. 보호자가 곧 보상이라는 읽기도 가능합니다(‘네 상급은 매우 크신 분’).

עֲרִירִי
아리리
자식이 없이

아브람이 15:2에서 ‘나는 자식 없이 가나이다’라고 합니다. 라쉬는 메나헴의 풀이로 ‘아들도 손자도 없는’ 뜻으로 소개합니다.

בֶּן־מֶשֶׁק בֵּיתִי
벤 메쉐크 베이티
내 집에서 길린 자(집을 관리하는 자)

법적 상속자 역할을 하는 종입니다. 라쉬는 ‘집안 사람이 모두 먹도록 명령하는 자’로 풉니다.

הַבֶּט־נָא הַשָּׁמַיְמָה
하벳트 나 핫샤마임마
하늘을 우러러

‘하벳트’는 ‘위에서 아래로 보다’의 뜻이라는 풀이가 있습니다(창세기 라바 44:12). 하나님이 아브람을 별 위로 올려 보게 하셨다는 풀이로 이어집니다.

וְהֶאֱמִן בַּיהוָה
베헤에민 바아도나이
그가 여호와를 믿으니

‘헤에민(믿다)’은 ‘아멘’과 같은 뿌리로, ‘단단히 서다·의지하다’입니다.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말씀 위에 서는 행동입니다.

וַיַּחְשְׁבֶהָ לּוֹ צְדָקָה
바야흐쉬베하 로 츠다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샤브(셈하다)’는 장부에 기록하는 낱말입니다. 주어가 누구인지가 해석을 가릅니다(바로잡기 참고).

히브리 배경

14:21–24와 15장은 한 흐름입니다. 승리한 아브람이 소돔 왕의 보상을 거절하고(14:23) 곧이어 하나님이 ‘나는 네 방패, 네 상급’이라 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받지 않은 보상을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셈입니다. 15:1은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로, 성경에서 처음으로 ‘말씀이 임하다’는 선지자의 어법이 나옵니다. 아브람이 후계자로 ‘다메섹 엘리에셀’을 내세우는 것은 고대 근동의 입양 관습과 맞습니다. 누지(Nuzi)의 문서들에 자녀 없는 사람이 종을 입양해 상속자로 삼고, 친자가 태어나면 친자가 상속하는 규정이 있다고 학자들이 소개합니다. 15:6은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약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롬 4:3, 갈 3:6, 약 2:23).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15:6)

하나님이 아브람의 믿음을 ‘의(공로)’로 여기셨다는 읽기입니다. 바울(롬 4:3)이 이 구절을 읽는 방식과 가장 가까운 전통적 풀이입니다.

람반(15:6)

라쉬의 풀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며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의 의로움(진실하심)’으로 여겼다고 읽습니다. 믿음이 ‘특별한 공로’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응답이라는 읽기입니다.

창세기 라바 44:12 · 라쉬(15:5)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어 별자리(마잘)가 바뀐다는 풀이는 이름이 운명을 바꾼다는 믿음에 서 있습니다.

라쉬(15:1)

전쟁에서 사람을 죽인 아브람의 불안을 하나님이 ‘방패’로 덮으신다는 풀이는 하나님이 정당한 전쟁의 짐까지 돌보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구분15:6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의 주어와 뜻
유대 전승

라쉬는 하나님이 아브람의 믿음을 공로(의)로 여기셨다고 풉니다. 람반은 이 풀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고, 아브람이 하나님이 아들을 반드시 주신다는 약속을 ‘하나님의 의로움(진실하심)’으로 여겼다고 읽습니다.

본문 문맥

15:6 ‘바야흐쉬베하(그가 여기시고)’의 주어는 본문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롬 4:3, 22–24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기셨다고, 갈 3:6과 약 2:23도 같은 구절을 인용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5:6에서 ‘하샤브(셈하다)’가 하나님의 재판석에서의 판단을 가리키며, 시 106:31(비느하스의 열심이 의로 여겨짐)과 레위기의 용례를 들어 ‘전가’라고 풉니다. 이 말을 ‘정직한 사람이라는 인격’으로 바꾸는 이들, 그리고 ‘아브람이 하나님께 의로움의 영광을 돌린 것’이라고 읽는 이들을 어리석고 본문을 왜곡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아브람의 믿음이 의 대신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1은 믿음 자체를 의로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전가하며 믿음은 이를 받는 도구라고 하고, 11.6은 구약 신자의 칭의가 신약의 것과 ‘한 가지’라고 합니다.

평가

람반의 읽기를 칼빈은 정면으로 물리칩니다. 두 읽기는 모두 문법적으로 가능하지만 칼빈의 근거는 ‘하샤브’의 법정적 용례와 롬 4장의 바울의 읽기입니다. 칼빈의 표현(‘믿음이 의 대신으로’)과 신앙고백 11.1(‘믿음 자체를 전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의 뉘앙스 차이도 함께 보세요. 개혁신학 안에서 후자가 더 정제된 표현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15:6의 ‘그가 이를 여기시고(וַיַּחְשְׁבֶהָ)’의 주어는 본문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라쉬와 바울의 읽기(하나님이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가 가장 널리 퍼져 있고, 람반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진실하심)로 여겼다’는 읽기를 제안합니다. 문법이 두 읽기를 모두 허용하므로 신학적 결론은 앞뒤 문맥과 신약의 읽기(롬 4:3, 22–24)로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믿음(헤에민)’을 지적 동의로 좁히면 본문과 어긋납니다. 이 낱말은 ‘단단히 서다·의지하다’로, 아브람이 곧바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물을 준비하는 15:9의 행동과 이어집니다. 약 2:23은 이 구절을 아브라함의 행위(22장)와 함께 읽습니다.

‘별 같은 후손’을 ‘별 헤아리는 점성술을 벗어나라’고 읽는 풀이(라쉬)는 미드라쉬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하늘을 우러러 별을 셀 수 있거든 세어 보라’는 장면뿐입니다.

‘다메섹 엘리에셀’(15:2)의 히브리어 문장은 어렵습니다. 라쉬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로도, 다메섹까지 추격한 사람으로도 읽습니다. 본문은 이 사람이 후계자로 거론되었다는 점을 보이면 충분합니다.

오늘의 물음

아브람은 사람이 주는 부를 거절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기다렸습니다. 내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사람의 손에서 받고 싶어 하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별을 세어 보라’고 하실 때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믿고 그 위에 섭니까?

6. 금요일 · 여섯째 낭독 · 창세기 15:7–17:6

하나님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며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고, 후손이 이방에서 종살이하리라 예고하십니다. 사래는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십삼 년 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시며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5:9–10 ‘삼 년 된 암소…’라쉬

삼 년 된 암소·암염소·숫양은 훗날 이스라엘의 제사(속죄일의 황소, 속죄 제물 등)의 종류를 가리킨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4:14). 새는 쪼개지 않은 이유를, 다른 나라들은 황소·숫양·숫염소에 견주고 이스라엘은 비둘기에 견주어서라고 풉니다.

15:11 ‘솔개가…’라쉬

솔개를 쫓은 것은 다윗이 이방 민족을 없애려 하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것을 상징한다고 풉니다.

15:12 ‘캄캄함이…’라쉬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의 고난과 어둠을 상징한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4:17).

15:13 ‘사백 년’라쉬

이삭이 태어난 때부터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난 때까지가 400년입니다. 이삭이 60세에 야곱을 낳았고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갈 때 130세였으며 이집트에서 210년을 보냈으므로, 60+130+210=400이라고 계산합니다. ‘그들의 것이 아닌 땅’은 이집트라고 하지 않고 이삭 때부터 객이 된 것을 가리킵니다.

15:14 ‘그 나라를 내가 징벌하리니’라쉬

‘또한(ג)’이 다니엘서의 네 제국도 이스라엘을 압제한 일로 망한다는 뜻을 포함한다고 풉니다. ‘징벌’은 열 재앙입니다.

15:15 ‘너는 평안히 네 조상에게로’라쉬

조상은 우상 숭배자 데라인데도 ‘그에게로 간다’고 한 것은 데라가 회개했음을 가르친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0:4). ‘좋은 나이에 장사되리라’는 아브라함이 살아 있는 동안 이스마엘이 돌이킬 것이고 에서가 아직 악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15:16 ‘사 대 만에’라쉬

이집트에 가서 세 세대를 지나고 넷째 세대에 돌아옵니다. ‘아모리의 죄악이 차지 않았다’는 하나님이 한 민족의 분량이 차기 전에는 벌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사 27:8).

15:17 ‘연기 나는 화덕’라쉬

이 제국들이 게힌놈으로 떨어질 것을 미리 보이신 것이라 풉니다(피르케 드라비 엘리에제르 28).

15:18 ‘내가 주노니’라쉬

하나님의 약속은 ‘완료형’으로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4:22).

16:1 ‘이집트 사람 여종 하갈’라쉬

하갈은 바로의 딸이었고 사래를 위해 일어난 기적을 보고 ‘내 딸이 다른 이의 여주인이 되느니 이 사람 집의 여종이 낫다’고 했다는 풀이입니다(창세기 라바 45:1).

16:2 ‘내가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라쉬

‘아브네(내가 세워지리라)’는 자식이 없는 사람은 세워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는 사래 안에 있던 성령의 말을 들은 것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5:2).

16:3 ‘십 년 후에’라쉬

이는 열 해 동안 자녀가 없는 아내를 둔 남편이 다른 아내를 맞아야 하는 정해진 기간입니다. 가나안 밖에서 산 기간은 포함하지 않는다는 뜻도 됩니다(예바못 64a).

16:4 ‘여주인을 멸시하더라’라쉬

하갈이 ‘사래가 속으로는 의로운 척하나 이 오랜 세월 동안 아이를 얻지 못했으니 정말 의로울 리 없다’고 말했다는 풀이입니다.

16:5 ‘내게 받은 불법’라쉬 · 람반

라쉬는 ‘내가 받은 해(חמסי)의 벌이 당신에게 있기를’이라 풀고, 아브람이 15:2에서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고 사래가 말한 것이라 풉니다. 또 자신이 멸시받는 것을 들으면서도 침묵하여 보호의 말을 빼앗았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45:5). 람반은 ‘우리의 어머니가 이 학대로 죄를 지었고 아브라함도 이를 허락해서 죄를 지었다’고 밝히며,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이 하갈에게 ‘들나귀 같은’ 아들을 주셔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후손을 온갖 방식으로 괴롭히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16:12 ‘들나귀 같은 사람’라쉬

광야를 사랑해 사냥을 하는 사람(21:20 ‘활쏘는 자’)이고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며’는 노상강도라는 뜻입니다.

16:13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라쉬

‘엘 로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모욕을 보시는 하나님입니다(창세기 라바 45:10). 하갈이 ‘여기서도 내가 보았구나’ 한 것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늘 천사를 보았다가 광야에서도 보았다는 놀람이라고 풉니다.

16:15 ‘이스마엘이라 불렀더라’라쉬

아브람은 천사가 하갈에게 한 말을 듣지 못했는데도 성령이 임해 ‘이스마엘’이라 이름 지었다고 풉니다.

17:1 ‘전능한 하나님’라쉬

‘샤다이’는 ‘그의 신성이 모든 피조물에게 충분한 분’(셰·다이)이라는 뜻으로 풉니다(창세기 라바 46:3). 람반은 ‘엘’과 ‘샤다이’가 각각 독립된 두 이름이라고 하며 이븐 에즈라가 이를 하나의 형용사구로 읽은 것에 반대합니다.

17:1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행하라’를 ‘나를 섬기는 데 붙어 있어라’로, ‘완전하라’를 내가 주는 모든 시험에서 온전하라는 새 명령으로 풉니다. 미드라쉬는 할례 계명을 지킴으로 완전해지라는 뜻으로 읽습니다(창세기 라바 46:4). 이븐 에즈라는 ‘완전하라’를 ‘할례의 이유를 따지지 말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17:3 ‘엎드렸더니’라쉬

할례를 받기 전에는 성령이 위에 서 계실 때 두 발로 설 수 없어 엎드렸다고 풉니다. 이방 발람은 같은 이유로 엎드려 말씀을 들었다고 비교합니다.

17:5 ‘많은 나라의 아버지’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아브(ר)함’의 철자를 말놀이로 풀고, 이전의 ‘ר’는 아브람이 ‘아람(고향)’의 아버지일 뿐임을 뜻했다고 합니다. 이븐 에즈라는 이름이 글자를 덜지 않고 보태는 이름이라 ‘민족들의 큰 아버지’의 뜻이 된다고 풉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וַיִּכְרֹת יְהוָה אֶת־אַבְרָם בְּרִית
바이크로트 아도나이 에트 아브람 브리트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문자대로는 ‘언약을 자르다’입니다. 언약 의식에서 짐승을 쪼개는 모양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הַבְּתָרִים
합브타림
쪼갠 고기들

짐승을 둘로 가르는 의식(렘 34:18–19)에서 언약 당사자들이 그 사이를 지나며 ‘어기면 이 짐승처럼 되리라’는 자기 저주의 뜻을 지닙니다.

תַּנּוּר עָשָׁן וְלַפִּיד אֵשׁ
타누르 아샨 베랍피드 에쉬
연기 나는 화덕과 타는 횃불

15:17.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것은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언약의 책임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지십니다.

לֹא־שָׁלֵם עֲוֹן הָאֱמֹרִי
로 샬렘 아본 하에모리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5:16. 가나안 정복이 늦어지는 이유를 ‘죄의 분량이 차야 한다’로 설명합니다. 라쉬는 하나님이 민족의 분량이 차기 전에는 벌하지 않으신다고 풉니다.

הָגָר
하가르
하갈

이집트 사람 여종(16:1)입니다. 이름의 뜻은 ‘이방인’과 비슷한 소리로 읽기도 합니다. 라쉬는 바로의 딸이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5:1).

פֶּרֶא אָדָם
페레 아담
들나귀 같은 사람

16:12. 자유롭고 거친 광야 사람을 뜻하는 칭호입니다. 욥 39:5–8의 들나귀의 자유와 같은 이미지입니다.

בְּאֵר לַחַי רֹאִי
베에르 라하이 로이
살아 계셔서 나를 보시는 이의 우물

16:14. 하갈이 하나님께 지은 이름 ‘엘 로이(나를 보시는 하나님)’에서 나온 우물 이름입니다.

אֵל שַׁדַּי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17:1. ‘샤다이’의 뜻은 불확실합니다. 라쉬는 ‘충분하신 분(שֶׁדַּי)’으로, 학자들은 ‘산의 하나님’ 또는 ‘강한 이’로 읽기도 합니다.

הִתְהַלֵּךְ לְפָנַי וֶהְיֵה תָמִים
히트할레크 리파나이 베헤예 타밈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אֶת)’(6:9)했고 아브라함은 ‘내 앞에서(לְפָנַי)’ 행합니다. ‘타밈’은 ‘흠 없는, 한결같은’입니다.

אַבְרָהָם
아브라함
아브라함

‘아브(아버지)’ + ‘함몬(무리)’ 중 첫머리를 조합한 말놀이(17:5)로 ‘많은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히브리 배경

‘쪼갠 고기 사이의 언약’(15:9–21)은 고대 근동의 조약 의식을 배경으로 합니다. 짐승을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것은 ‘이 약속을 어기면 내가 이렇게 되리라’는 맹세였고, 마리 문서에서는 ‘나귀 새끼를 죽여 조약을 맺는다’는 표현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의식에서 하나님만이 지나가시는 것(15:17)이 본문의 독특한 점입니다. ‘사백 년’(15:13)은 출 12:40의 430년, 행 7:6의 400년, 갈 3:17의 430년과 함께 읽히는 숫자입니다. 하갈 이야기는 고대 근동의 대리모 관습과 맞닿아 있어 누지 문서와 함무라비 법전(144–146조)에 자녀 없는 아내가 여종을 남편에게 주는 규정이 있습니다. 하갈이 도망쳐 샘 곁에서 천사를 만나는 장면은 성경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처음 나오는 대목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15:13)

‘400년’은 이삭의 출생부터 출애굽까지로 계산합니다. 출 12:40의 430년은 쪼갠 고기 사이의 언약부터라는 풀이와 맞물려 두 숫자를 조화시키는 전통적 방법입니다.

람반(16:6)

사라와 아브라함이 하갈을 학대한 일을 ‘죄’로 규정하고, 이스마엘이 후손을 괴롭히게 된 원인으로 읽습니다. 조상의 허물을 미화하지 않는 비판적 읽기입니다.

창세기 라바 46:4

‘완전하라’를 할례의 계명과 잇는 풀이는 17장 전체를 이 구절의 설명으로 읽는 전통입니다.

라쉬(15:16)

‘아모리의 죄악이 차지 않았다’를 하나님이 한 민족의 죄가 꽉 차기 전에는 벌하지 않으신다는 원칙으로 일반화합니다. 가나안 정복이 이스라엘의 의 때문이 아니라 가나안 민족의 죄 때문이라는 신 9:4–5와 같은 흐름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하갈 사건: 사래와 아브람의 책임
유대 전승

람반은 16:6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이 학대로 죄를 지었고 아브라함도 이를 허락해서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라쉬는 사래의 말을 들은 것을 사래 안의 성령의 말을 들은 것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5:2).

본문 문맥

16:2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는 3:1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와 같은 히브리어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16:7–12에서 학대받은 하갈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고 하십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6:3에서 하갈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다른 사람의 침상에 들여졌다’는 점에서 이 결합이 ‘음행과 결혼의 중간’에 있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덧붙인 인간의 고안은 겉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안에 타락이 있다고 합니다. 16:4에서는 ‘주된 책임은 사래에게, 아브람은 지나치게 쉽게 믿었으므로 하나님이 둘을 마땅하게 징계하신다’고 하고, 16:5에서는 사래의 분노가 아브람을 억울하게 책망한 것이라고 합니다. 16:6에서는 아브람이 아내와 다투지 않고 참은 겸손은 칭찬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1은 한 남자가 한 아내를 두도록 규정합니다.

평가

람반과 칼빈이 같은 방향으로 아브라함 가정의 허물을 직접 말합니다. 3:17과의 어휘 반향은 본문이 스스로 이 사건을 ‘아담과 하와의 순서의 반복’으로 암시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라쉬의 ‘사래 안의 성령’ 풀이는 본문이 아니라 사래를 변호하는 미드라쉬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것이 ‘연기 나는 화덕과 타는 횃불’(하나님의 상징)뿐이고 아브람은 지나가지 않았다는 점은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성자의 십자가를 예표’ 같은 말로 곧바로 이어 읽기보다, 먼저 본문의 뜻(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의 짐을 지신다)을 읽으세요.

15:13의 ‘사백 년’과 출 12:40의 ‘430년’, 행 7:6의 ‘400년’, 갈 3:17의 ‘430년’은 같은 기간의 다른 계산법으로 읽힙니다. 라쉬는 이삭의 출생부터 400년으로 세지만, 어느 시점에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숫자이므로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아랍 민족의 조상’으로 단정하는 것은 후대 전승입니다. 본문은 이스마엘이 ‘모든 형제 앞에 거하리라’(16:12)고 하고 25:12–18에서 열두 지파(방백)의 이름을 적습니다. 이스마엘이 구체적으로 누구의 조상인지는 본문의 범위 안에서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라가 하갈을 학대했다는 점을 람반이 ‘죄’라 부르는 것은 전통 안에서의 자기 비판입니다. 본문은 사라를 변호하지도 비난하지도 않고 ‘학대하매 하갈이 도망했다’고만 적고, 그 뒤 천사가 하갈에게 ‘돌아가라’(16:9)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하나님이 약한 이를 ‘보시는’ 하나님(엘 로이)임을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샤다이’를 ‘전능’으로만 번역하는 것은 전통의 한 갈래입니다. 라쉬는 ‘충분하신 분’, 람반과 이븐 에즈라는 ‘강한’의 뜻으로 읽고, 어원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낱말의 뜻을 하나로 단정해 가르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오늘의 물음

하나님은 아브람이 잠든 사이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가셨습니다. 내 믿음이 흔들리는 날에도 ‘약속을 지키시는 쪽’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어떤 위로가 됩니까? 사라와 아브람이 ‘기다리지 못해’ 만든 하갈 사건은 내 삶의 어떤 ‘서두름’을 비춥니까?

7. 안식일(토요일) · 일곱째 낭독 · 창세기 17:7–27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그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십니다. 사래는 사라로, 이삭의 출생이 약속되며, 아브라함은 웃으면서도 이스마엘을 위해 구합니다. 그날로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집안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습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7:7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쉬

그 언약이란 ‘내가 네 하나님이 되는 것’이라고 풉니다.

17:8 ‘영원한 기업’라쉬

그곳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시지만, 이 땅 밖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다고 풉니다(크투봇 110b).

17:9 ‘너는 내 언약을 지키라’라쉬

‘ואתה(그리고 너는)’의 ‘ו’가 17:4의 ‘ואני(나는)’와 짝을 이루어 ‘나는 내 언약을 네게 주고 너는 그것을 지키라’는 대응이 된다고 풉니다. 람반이 이 풀이를 소개합니다.

17:10 ‘나와 너희 사이’라쉬

‘너희’는 복수로, 그때 살아 있는 아브라함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네 후손’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입니다.

17:12–13 ‘집에서 난 자와 돈으로 산 자’라쉬

집에서 난 자는 여종이 집에서 낳은 아이, 돈으로 산 자는 태어난 뒤에 산 사람입니다. 둘 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라쉬

이는 남녀의 구분이 분명한 부위에서 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창세기 라바 46:13). ‘끊어지리라’는 자식 없이 일찍 죽는다는 뜻이고, 법적으로 책임질 나이가 되도록 스스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 해당합니다.

17:15 ‘사래라 하지 말고’라쉬

‘사래’는 ‘나의 공주’라는 뜻이라 나에게만 공주이고, 새 이름 ‘사라’는 모든 이에게 공주가 된다는 뜻입니다(베라코트 13a).

17: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라쉬

그 복은 사라가 다시 젊음을 얻는 것(18:12 ‘내가 쇠하였고’)이며, 두 번째 ‘복’은 젖이 풍성하게 나오는 것이라고 풉니다. 이삭의 젖 뗀 날 사람들이 ‘주워 온 아이’라고 비방하자 사라가 사람들의 아이에게도 젖을 먹였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7:17 ‘웃으며’라쉬 · 이븐 에즈라 · 람반

라쉬는 온켈로스가 아브라함의 웃음은 ‘기뻐했다’로, 사라의 웃음(18:12)은 ‘웃었다’로 옮겨 구분한다고 하며, 아브라함의 질문은 의심이 아니라 놀람을 담은 확신이라고 풉니다. 람반도 온켈로스가 옳다고 합니다. 이븐 에즈라는 노인의 정액이 차가워 불임이라고 보던 옛 의학으로 놀람을 설명합니다.

17:18 ‘이스마엘이나’라쉬

‘나는 이런 상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 이스마엘이나 살게 해 주소서’라는 뜻이며, ‘주 앞에서 살기를’은 ‘주를 경외하며 살기를’이라고 풉니다.

17:19 ‘이삭이라 하라’라쉬

이삭은 웃음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풀이와, 열 번의 시험(י), 사라의 90세(צ), 할례 후 여드레(ח), 아브라함의 100세(ק)를 따서 짓는다는 풀이(창세기 라바)를 함께 소개합니다. 언약은 이삭의 후손에게만 이어진다고 합니다.

17:22 ‘하나님이 올라가시니라’라쉬

‘올라가셨다’는 하나님께 더 합당한 표현이며 이로써 의인은 하나님의 병거(수레)라는 것을 배운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7:6).

17:23 ‘바로 그날에’라쉬

아브라함은 이방인도 비웃는 자도 두려워하지 않고 밤이 아닌 대낮에 할례를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았다면 막았을 것이라고 원수들이 말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16:16 · 17:25 ‘이스마엘은 십삼 세’라쉬

이스마엘이 열세 살에 할례를 받으면서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스마엘의 공으로 돌립니다(16:16). 17:25에서 이스마엘에게만 ‘에트’가 붙는 것은, 이미 할례받을 살이 평평해진 아브라함과 달리 아이였던 이스마엘은 포피를 자르고 젖히는 것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7:8).

히브리어 낱말 공부

בְּרִית עוֹלָם
브리트 올람
영원한 언약

17:7, 13, 19. 노아의 언약(9:16)에도 쓰였던 표현이며 언약의 ‘영속성’을 강조합니다.

אֲחֻזַּת עוֹלָם
아훗자트 올람
영원한 기업

17:8. 땅은 ‘소유(아훗자)’로 주어집니다. 라쉬는 ‘이 땅 밖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는 전승을 소개합니다(크투봇 110b).

מוֹל יִמּוֹל
몰 임몰
반드시 할례를 받을 것이니라

‘할례하다(מוּל)’를 반복해 강조하는 형태입니다. 17:12–14의 규정(여드레, 집에서 난 자와 돈으로 산 자 포함)이 이어집니다.

אוֹת בְּרִית
오트 브리트
언약의 표징

17:11. 무지개(9:12), 안식일(출 31:13)처럼 언약마다 보이는 표징이 있습니다.

וְנִכְרְתָה הַנֶּפֶשׁ הַהִוא
베니크레타 하네페쉬 하히
그 영혼이 끊어지리라

17:14. ‘카레트(끊어짐)’의 뜻은 해석이 갈립니다. 라쉬는 ‘자식 없이 일찍 죽음’으로 풀고, 아버지가 아니라 본인이 할례를 거부할 때 해당한다고 합니다.

שָׂרָה
사라
사라(여주인)

‘사래(나의 공주)’에서 ‘사라(공주)’로 바뀝니다. 라쉬는 ‘나에게만 공주였던 이가 모든 이에게 공주가 되었다’고 풉니다.

וַיִּצְחָק
바이츠하크
웃으며

17: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습니다. 18:12에서 사라도 웃습니다. 이름 ‘이삭(이츠하크)’이 이 웃음에서 나옵니다(17:19).

לוּ יִשְׁמָעֵאל יִחְיֶה לְפָנֶיךָ
루 이쉬마엘 이흐예 레파네카
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7:18. 아브라함이 이미 있는 아들을 위해 하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도 복 주시되 언약은 이삭을 통해 세우신다고 답하십니다(17:19–21).

בְּעֶצֶם הַיּוֹם הַזֶּה
베에쳄 하욤 하제
바로 그날에

17:23, 26. 아브라함은 명령을 듣고 지체 없이 ‘바로 그날’ 순종합니다.

히브리 배경

할례는 이집트와 서부 셈 지역 여러 문화에 있던 관습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 의미가 언약의 표징으로 바뀝니다. 본문의 특징은 여드레라는 시기, 집에서 태어난 종과 돈으로 산 종까지 포함, 개종자도 받는다는 확장(출 12:48)입니다. 할례를 받은 때가 15:6의 ‘믿음으로 의로 여겨지심’ 이후라는 시간 순서는 롬 4:9–11이 중요하게 읽는 점입니다. 17장은 18장의 사라 방문 이야기와 짝을 이루는 장입니다. 이름이 바뀌는 것은 새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뜻이며, 아브람의 ‘ר’와 사래의 ‘י’ 자리에 같은 ‘ה’가 들어간다는 풀이가 전승에 있습니다. 17:15–19에서 처음으로 ‘이삭’의 이름이 약속되고, 17:21에는 그가 ‘내년 이맘때’ 태어날 것이라는 시점까지 적힙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크투봇 110b · 라쉬(17:8)

‘땅 밖에 사는 자는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다’는 가르침은 땅의 약속과 하나님의 임재를 함께 묶는 전통이며, 이스라엘 땅에 대한 유대 전승의 애착의 뿌리입니다.

베라코트 13a · 라쉬(17:15)

아브라함을 ‘아브람’이라 부르는 자는 긍정 계명을 어긴다는 가르침이 있으며, 새 이름이 새 정체성의 선언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온켈로스(17:17) · 라쉬

아브라함의 웃음을 ‘기뻐함’, 사라의 웃음을 ‘웃음(의심)’으로 옮겨 구별하는 것은 두 사람의 반응을 서로 다르게 읽는 번역상의 선택입니다.

창세기 라바 47:6 · 라쉬(17:2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 올라가셨다’에서 의인이 하나님의 병거(보좌를 싣는 자)라는 가르침을 이끌어 내며, 의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사상으로 이어집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논쟁할례와 세례, 언약의 표징
유대 전승

라쉬는 17:8의 ‘영원한 기업’을 ‘땅 밖에 사는 이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크투봇 110b)고 풀고, 17:14의 ‘끊어짐’을 자식 없이 일찍 죽는 것이라고 풉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만 이어지는 이삭의 언약(17:19)이라고 합니다.

본문 문맥

17:11은 할례를 ‘언약의 표징’이라 하고, 17:12–13은 ‘집에서 난 자와 돈으로 산 자’도 포함합니다. 롬 4:11은 할례를 ‘믿음으로 얻은 의의 인’이라 하고, 골 2:11–12는 그리스도의 할례와 세례를 연결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7:13에서 할례가 ‘영원한 언약’이라 불린 것은 표징이 바뀌어도 그리스도가 중보자시라는 점에서 영속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골 2:11에서 세례를 할례의 자리에 넣었으므로 세례는 할례를 폐하며 오늘 유대인 사이에서 할례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은 오류라고 합니다. 17:14에서는 할례받지 않고 죽은 아이가 해를 입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약속만으로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5는 구약의 성례가 ‘실체에서 신약의 것과 같다’고 하고, 28.4는 ‘믿는 부모의 유아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며, 7.6은 은혜언약이 ‘실체가 다른 두 언약이 아니라 한 언약의 다른 시행’이라고 합니다.

평가

17:12–13의 ‘집안 전체(유아 포함)’와 롬 4:11의 ‘인’, 골 2:11–12의 연결이 개혁신학의 유아세례 논증의 근거이고, 침례교는 이 근거를 달리 읽으며 유대교는 할례를 지금도 영속하는 언약의 표징으로 지킵니다. 이 대목은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할례의 규정과 범위)과 그 이행의 신학적 결론(세례의 대체)을 구별해서 가르치세요.

수용17:17 아브라함의 웃음
유대 전승

온켈로스는 아브라함의 웃음을 ‘기뻐했다’로, 사라의 웃음(18:12)을 ‘웃었다’로 옮겨 구분합니다(라쉬 소개). 라쉬는 이 질문이 의심이 아닌 확신을 담은 놀람이라고, 이븐 에즈라는 옛 의학의 불임 상식으로 놀람을 설명합니다.

본문 문맥

17:17은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이고, 17:18은 ‘이스마엘이나 주 앞에 살기를’입니다. 롬 4:19–20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약해지지 않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7:17에서 엎드림은 경배와 믿음의 표시이고 웃음은 ‘불신이 아니라 뜻밖의 일에 기쁨과 놀람이 섞인 것’이라고 하며, ‘기쁨뿐’이라는 견해에는 반대하고 ‘놀라 당황한 것’이라고 봅니다. 롬 4:19를 근거로 ‘이 놀람은 믿음을 막지 않았고 오히려 믿음의 힘이 더 밝게 빛났다’고 풉니다.

평가

온켈로스·라쉬·칼빈이 모두 ‘불신이 아님’에 동의합니다. 칼빈은 온켈로스의 ‘기쁨’만으로 읽지 않고 ‘놀람’을 더해 17:18의 이스마엘 간구까지 설명합니다. 본문의 긴장(웃음과 간구)을 있는 그대로 두면서 롬 4장의 평가를 받는 읽기입니다.

논쟁‘영원한 언약’과 ‘영원한 기업’
유대 전승

라쉬와 크투봇 110b는 땅이 하나님의 임재와 묶인 ‘영원한 기업’이며 땅 밖의 삶은 그에 못 미친다고 봅니다.

본문 문맥

17:7–8은 ‘영원한 언약(브리트 올람)’과 ‘영원한 기업(아훗자트 올람)’을 함께 말합니다. 롬 4:13은 아브라함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을 말하고, 히 11:9–16은 아브라함이 더 나은 본향을 바랐다고 합니다.

개혁신학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5–6은 은혜언약이 율법 아래에서는 모형·제사·할례 등으로, 복음 아래에서는 말씀과 성례로 ‘한 언약의 다른 시행’으로 베풀어지며 ‘실체가 다른 두 언약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읽기에서 땅의 약속은 언약 전체의 모형적 면과 함께 읽습니다.

평가

땅의 약속과 언약의 영속성을 어떻게 읽는지는 개혁신학 안에서도, 그리고 이스라엘과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가장 논쟁적인 신학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칸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것(17:7–8, 영원한 언약과 영원한 기업)과 웨스트민스터의 ‘한 언약’ 틀, 그리고 신약의 확장(롬 4:13, 히 11:9–16)이 서로 다른 층위임을 알려 드리는 데 그칩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할례를 받은 때가 15:6의 ‘믿음으로 의로 여겨짐’ 뒤라는 점은 창세기 본문의 순서 그대로입니다. 롬 4:9–11은 이 순서를 근거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말합니다. 반면 유대 전승은 할례를 ‘완전해지는 길’(17:1)로 읽습니다. 두 읽기가 같은 본문 순서를 서로 다르게 활용합니다.

아브라함의 웃음(17:17)을 불신으로만 읽는 것은 본문이 열어 둔 가능성 하나입니다. 온켈로스는 ‘기뻐함’으로, 라쉬는 의심이 아닌 놀람으로 읽지만, 17:18의 ‘이스마엘이나’라는 간구에는 약속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롬 4:19–20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고 해석합니다. 본문의 긴장을 어느 한쪽으로 풀기 전에 이 세 읽기를 함께 두세요.

‘영원한 언약’과 ‘영원한 기업’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땅 소유와 신약 이후의 읽기에 이어지는지는 신학적으로 논쟁적입니다. 본문은 땅의 약속을 ‘언약’(브리트)과 ‘할례’에 연결해 말하며, 이 연결의 깊이는 오경 후반과 예언서(렘 31, 겔 36)와 신약(롬 11)까지 함께 읽어야 드러납니다.

할례를 ‘위생을 위한 것’으로 보는 설명은 본문에 없습니다. 본문은 언약의 표징(오트 브리트)으로만 규정하며, 모세 오경은 후에 ‘마음의 할례’(신 10:16, 30:6)로 의미를 확장합니다.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이삭과’ 세워진다(17:21)는 구분을 본문이 분명히 합니다. 이는 어느 한쪽을 폄하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도 복(17:20)과 약속을 주신다는 두 사실을 함께 읽게 합니다.

오늘의 물음

아브라함은 99세에 ‘바로 그날’ 할례를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뒤 ‘내일’로 미루는 일이 내게 있습니까? 이스마엘을 위해 ‘그가 주 앞에서 살게 하소서’ 하고 구한 아브라함처럼, 내가 중보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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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와 읽는 법

  • 토라 두루마리 사진: CC0 — Wikimedia Commons

성경 본문과 구절 번호는 개역개정 기준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번호가 다른 곳은 개역개정 번호로 옮겼습니다. 이 글에 적은 성경 참조는 모두 개역개정에 있는 구절인지 확인했습니다. 유대 전승의 인용은 세파리아(Sefaria)의 영어 번역본을 읽고 한국어로 옮긴 공부용 소개이며,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과 전승이 덧붙인 것은 「바로잡기」 칸에서 갈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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