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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라포션 2주 노아흐: 쉼과 위로 — 창세기 6:9–11:32를 히브리어·유대 전승·개혁신학으로 읽다

    토라포션 2주 노아흐: 쉼과 위로 — 창세기 6:9–11:32를 히브리어·유대 전승·개혁신학으로 읽다

    토라포션 2주 · 창세기 6:9–11:32

    노아흐(נֹחַ) — ‘쉼·위로’. 라멕이 아들을 낳고 ‘이가 우리를 위로하리라(יְנַחֲמֵנוּ 예나하메누)’ 하여 지은 이름입니다(창 5:29).

    편의 이름은 6:9 ‘노아의 족보는 이러하니라’의 첫 낱말에서 따왔습니다. 앞 편 마지막 절(6:8)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חֵן 헨)를 입었더라’인데, 히브리어 נח(노아흐)를 거꾸로 쓰면 חן(헨, 은혜)이 됩니다. 노아의 이름 속에 은혜가 거꾸로 들어 있다는, 전승이 즐겨 말하는 말놀이입니다.

    이 주간의 큰 줄기: ① 폭력(חָמָס)으로 부패한 땅 → ② 방주와 홍수(창조의 되돌림) → ③ 새 시작과 무지개 언약 → ④ 다시 흩어지는 사람들, 바벨 → ⑤ 아브람이 등장할 자리를 마련하는 데라의 족보.

    하프타라는 이사야 54:1–55:5입니다. 54:9에서 하나님이 ‘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מֵי נֹחַ 메이 노아흐) 같으니’ 하시며 다시는 진노로 덮지 않겠다 약속하십니다.

    토라 두루마리 근접 사진
    토라 두루마리. (CC0 · Wikimedia Commons)

    이번 주 읽는 순서

    유대 회당은 한 주에 한 편(파라샤)을 일곱 번에 나누어 읽습니다. 안식일에는 일곱 번째를 마치고 예언서(하프타라)를 읽습니다. 날짜는 올해(5787년) 이스라엘 밖(디아스포라) 일정입니다.

    요일 날짜 낭독 범위
    일요일 10월 11일 첫째 낭독 · 리숀 창세기 6:9–22
    월요일 10월 12일 둘째 낭독 · 셰니 창세기 7:1–16
    화요일 10월 13일 셋째 낭독 · 슐리쉬 창세기 7:17–8:14
    수요일 10월 14일 넷째 낭독 · 르비이 창세기 8:15–9:7
    목요일 10월 15일 다섯째 낭독 · 하미쉬 창세기 9:8–17
    금요일 10월 16일 여섯째 낭독 · 쉬쉬 창세기 9:18–10:32
    안식일(토요일) 10월 17일 일곱째 낭독 · 슈비이 창세기 11:1–32

    마프티르(안식일 마지막 낭독 반복): 창세기 11:29–11:32 · 하프타라(예언서 낭독): 이사야 54:1–55:5

    인용 읽는 법 · 용어 설명

    라쉬(Rashi) — 11세기 프랑스의 랍비 슐로모 이츠하키(1040–1105). 토라 전체에 주석을 단 사람입니다. 평이한 뜻(페샤트)을 먼저 쓰고, 필요하면 옛 미드라쉬를 인용합니다.

    람반(Ramban) — 13세기 스페인의 랍비 나흐마니데스. 라쉬를 존중하되 자주 반론하고 깊은 신학을 다룹니다. 이븐 에즈라 — 12세기 스페인의 문법학자·주석가로 평이한 뜻과 문법에 밝습니다.

    미드라쉬 — 고대 랍비들이 성경을 풀어 낸 해석 문헌의 종류입니다(‘창세기 라바’, ‘탄후마’, ‘시프라’ 등). 본문에 없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설교가 많아, 라쉬의 ‘(창세기 라바 36:7)’은 “이 풀이는 미드라쉬에서 옴”이라는 표시입니다.

    탈무드 · 미쉬나 — 미쉬나(2세기 초)와 그 토론인 게마라(5세기경)를 합한 책이 탈무드입니다. ‘산헤드린 108b’는 한 논문 책의 쪽수 표기입니다(a=앞면, b=뒷면).

    온켈로스 · 탈굼 — 토라를 아람어로 옮긴 번역(탈굼)입니다. 번역자의 해석이 섞여 있어 ‘가장 오래된 주석’으로도 읽습니다.

    바로잡기 — 본문이 말하는 것과 전승이 덧붙인 것을 가르기 위한 칸입니다. 전승 인용은 영어 번역본(세파리아)을 읽고 한국어로 옮겼으므로, 중요한 곳은 원문과 대조해 확인해 주세요.

    이 글의 차례

    1. 일요일 · 창세기 6:9–22
    2. 월요일 · 창세기 7:1–16
    3. 화요일 · 창세기 7:17–8:14
    4. 수요일 · 창세기 8:15–9:7
    5. 목요일 · 창세기 9:8–17
    6. 금요일 · 창세기 9:18–10:32
    7. 안식일(토요일) · 창세기 11:1–32

    1. 일요일 · 첫째 낭독 · 창세기 6:9–22

    땅은 ‘포악’으로 가득 차고, 하나님은 한 사람 노아와 처음으로 ‘언약’을 말씀하십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하여 방주를 짓습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6:9라쉬

    노아의 이름이 나오니 의인의 이름은 칭찬이 된다(잠 10:7). 또 ‘자손’을 말하지 않고 ‘의인’이라고 먼저 말하니, 의인의 참된 자손은 그의 선행이라는 가르침입니다.

    6:9 ‘당대에’라쉬 · 람반

    두 갈래입니다. ‘그 악한 세대에서도 의로웠으니 의로운 세대였다면 더했을 것’이라는 칭찬과, ‘아브라함 시대였다면 대단치 않았을 것’이라는 깎아내림입니다.

    6:9 ‘하나님과 동행’라쉬

    아브라함은 ‘내가 그 앞에서 행하였다’(24:40)고 합니다. 노아는 의 안에 서려면 하나님의 부축이 필요했고, 아브라함은 스스로의 힘으로 걸었다고 견줍니다(창세기 라바 30:10).

    6:11라쉬

    ‘부패(שחת)’는 음란과 우상숭배이고(산헤드린 57a), ‘포악(חמס)’은 강탈입니다.

    6:13라쉬

    음란과 우상숭배가 있는 곳에는 선악을 가리지 않는 벌이 온다고 풉니다. 그러나 판결이 확정된 것은 강탈 때문이었다고 합니다(산헤드린 108a). 람반도 하나님이 노아에게 밝히신 이유가 ‘포악’, 곧 강탈과 억압이라는 점을 짚습니다.

    6:14 ‘방주를 지으라’라쉬

    노아를 구할 방법은 많았는데 왜 짓게 하셨나? 사람들이 120년 동안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으면 홍수가 온다고 답하게 하여, 혹시 돌이킬까 해서라고 풉니다. 탈무드는 사람들이 노아를 조롱하며 ‘불 홍수면 불에 안 타는 것이 있고 물 홍수면 막을 방법이 있다’고 맞받았다고 전합니다(산헤드린 108b).

    6:14 ‘고페르 나무’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이름일 뿐이라고 하고, 하늘에서 떨어질 유황(גפרית)과 연결해 풀기도 합니다. 이븐 에즈라는 ‘물에 가볍게 뜨는 나무이고 성경에 여기뿐’이라 하고, 이것은 ‘배’가 아니라 노도 없는 상자 모양이라 ‘테바’라 불렀다고 적습니다.

    6:16 ‘창(צהר)’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창이라는 풀이와 빛을 내는 보석이라는 풀이를 함께 소개합니다(창세기 라바 31:11). 이븐 에즈라는 ‘정오(צהרים)’와 같은 어근이라 빛이 들어오는 구멍이라고 봅니다. 세 층은 위가 사람, 가운데가 짐승, 아래가 오물이었다고 합니다(산헤드린 108b).

    6:17 ‘홍수(מבול)’라쉬

    이름의 뜻을 세 갈래로 풉니다. 모든 것을 낡게 했고(בלה), 혼란케 했고(בלל),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끌어내렸다(הוביל)는 것입니다. 온켈로스는 이 낱말을 ‘떠오르게 한 것’이라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6:18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쉬

    언약이 필요했던 까닭은 열매가 썩지 않게 하고 악한 세대가 노아를 죽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1:12). ‘남자와 여자를 따로’ 적은 것은 방주 안에서 부부로 지내지 못했다는 암시로 읽습니다(산헤드린 108b).

    6:20라쉬 · 람반

    짐승들은 스스로 왔고, 방주가 받아들이는 것만 노아가 들였다고 합니다. 람반은 이 때문에 노아가 산과 먼 땅에서 사냥하러 다닐 필요가 없었다고 덧붙입니다.

    6:22라쉬 · 람반

    ‘노아가 그리하였다’는 방주를 지은 일을 가리키고, 람반은 방주를 짓고 양식을 모으기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צַדִּיק תָּמִים
    짜딕 타밈
    의인·온전한 자

    ‘타밈’은 제물로 드릴 짐승의 ‘흠 없음’에도 쓰는 말(출 12:5)입니다. 죄가 없다는 뜻보다 ‘온전히 한결같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הִתְהַלֶּךְ אֶת־הָאֱלֹהִים
    히트할레크 에트 하엘로힘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에녹(5:22)과 같은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내 앞에서(לְפָנַי) 행하라’(17:1)고 하십니다. ‘…와 함께’와 ‘…앞에서’의 차이를 전승이 길게 따집니다.

    חָמָס
    하마스
    포악·폭력·불법

    6:11, 13에서 땅이 ‘가득 찼다’고 합니다. 이 낱말이 홍수의 직접 이유입니다.

    תֵּבָה
    테바
    방주(상자·배)

    성경 전체에서 이 낱말은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대 상자(출 2:3), 단 둘에만 쓰입니다. 둘 다 ‘물 위에서 건져 내는 그릇’입니다.

    כֹּפֶר
    코페르
    역청(방수 칠)

    ‘칠하라’는 동사 וְכָפַרְתָּ(베카파르타)와 한 뿌리 כפר(덮다)입니다. 같은 뿌리가 ‘속죄(כִּפֻּר 키푸르)’에 쓰입니다. ‘덮어서 막아 내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겹칩니다.

    בְּרִית
    브리트
    언약

    6:18, 성경에서 ‘언약’이라는 낱말이 처음 나오는 자리입니다.

    히브리 배경

    메소포타미아에는 홍수 이야기가 여럿 전합니다(수메르의 지우수드라, 아트라하시스, 길가메시 서사시 11번 토판). 큰 줄거리는 닮았습니다. 신이 홍수를 일으키고, 한 사람이 배를 지어 살아남고, 새를 날려 땅을 확인하고, 나와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유가 다릅니다. 아트라하시스에서는 사람이 늘어 시끄러워 신들이 잠을 못 자서이고, 성경에서는 땅에 가득한 폭력과 부패 때문입니다. 길가메시의 배는 한 변이 약 120규빗인 정육면체지만, 방주는 길이 300·너비 50·높이 30규빗(약 135×22×13m)의 긴 상자입니다. 길이와 너비의 비가 6:1이라 안정된 구조로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눈여겨보세요. 이 장면에서는 대부분 ‘엘로힘’이 쓰이고, 7장 처음부터 ‘여호와’가 섞여 나옵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6:9)

    ‘당대에’를 칭찬으로도, 깎아내림으로도 읽습니다. 같은 낱말에서 노아에 대한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오는 대표 사례입니다.

    산헤드린 108a · 라쉬(6:13)

    홍수 세대의 판결이 확정된 이유는 강탈입니다. 음란·우상숭배가 있는 곳에는 선악을 가리지 않는 벌이 오지만, 확정을 가른 것은 포악이라는 구분입니다.

    라쉬(6:14)

    하나님이 노아에게 120년 동안 방주를 짓게 하신 것은 그 세대가 돌이킬 기회를 주려는 것이라고 봅니다.

    후대 하시딕 설교(이 점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지 못한 출처)

    ‘테바’가 후대 히브리어에서 ‘낱말’을 뜻하는 데 착안해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를 ‘말씀(기도의 낱말) 안으로 들어가라’고 설교합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노아는 ‘당대에’만 의인이었나
    유대 전승

    라쉬는 ‘당대에(בְּדֹרֹתָיו)’를 칭찬으로도(악한 세대에서도 의로웠으니 의로운 세대였다면 더했다), 깎아내림으로도(아브라함 시대였다면 대단치 않았다) 읽습니다.

    본문 문맥

    6:9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6:22는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고 합니다. 겔 14:14, 20은 노아를 다니엘·욥과 함께 의인의 본보기로 들고, 히 11:7은 그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했다고, 벧후 2:5는 ‘의를 전파하는 자’라고 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6:9에서 ‘의롭고 완전한’은 흠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속임과 거짓이 없는 마음의 진실함이고, 하나님은 율법의 엄격함으로 자기 백성을 대하지 않고 위선이 없는 이를 자비로 의롭다 하신다고 합니다. ‘당대에’는 당시의 오염이 극심했는데도 그 속에서 물들지 않은 항구함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풉니다.

    평가

    칼빈은 라쉬의 첫째(칭찬) 읽기와 같은 방향입니다. 깎아내리는 읽기는 6:9와 6:22의 서술, 에스겔과 히브리서의 노아 평가와 부딪힙니다. 다만 ‘완전함’은 무죄가 아니라 진실함이라는 칼빈의 설명이 9:21의 포도주 사건까지 함께 읽게 해 줍니다.

    수용언약의 약속이 순종을 낳는다
    유대 전승

    라쉬는 6:18의 언약이 필요한 이유를 열매가 썩지 않게 하려는 것, 악한 세대가 노아를 죽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1:12).

    본문 문맥

    6:18은 성경에서 ‘언약(브리트)’이라는 낱말이 처음 나오는 대목입니다. 앞에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이, 뒤(6:22)에는 ‘그대로 다 준행하였다’가 있습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6:18에서 방주 짓기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이 약속을 덧붙여 노아를 격려하신다고 하며, 약속이 붙은 명령이어야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믿음의 교리가 선한 일의 열심을 약하게 한다’는 로마교의 비난은 어리석고, 약속이야말로 우리를 살려 순종하게 한다고 반박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3은 은혜언약에서 하나님이 ‘믿을 수 있게 하는 성령’을 약속하신다고 하고, 14.2는 믿음이 명령에는 순종하고 약속은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평가

    라쉬의 설명은 언약을 보호의 수단으로 보고, 칼빈은 약속이 순종을 낳는 방식에 초점을 둡니다. 6:18–22의 순서(약속 → 준행)가 칼빈의 강조를 뒷받침합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노아는 그 세대에서만 의인이었다’는 읽기는 낱말 하나(בְּדֹרֹתָיו)를 붙들고 한쪽으로 끌고 간 해석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동행했고’(6:9),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6:22)고 먼저 말합니다. 신약도 노아를 믿음으로 경고를 받고 방주를 예비한 자(히 11:7), ‘의를 전파하는 자’(벧후 2:5)로 평가합니다.

    ‘테바 = 낱말’ 설교는 아름답지만 성경 히브리어의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테바는 오직 ‘상자·방주’이고, ‘낱말’의 뜻은 미쉬나 시대 이후의 쓰임입니다. 말놀이는 말놀이로 읽어야 합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다’는 숫자는 본문에 없습니다. 6:3의 ‘백이십 년’(사람의 날수)과 방주를 짓는 기간을 이은 풀이이며, 라쉬도 이를 미드라쉬로 소개합니다.

    오늘의 물음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6:22). 나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 중 어느 대목을 ‘반만’ 하고 있나요?

    2. 월요일 · 둘째 낭독 · 창세기 7:1–16

    하나님이 노아와 온 가족, 짐승들을 방주로 부르시고, 칠 일 뒤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립니다. 문은 하나님이 직접 닫으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7:1 ‘의인으로 보았음이라’라쉬

    6:9와 달리 ‘온전한’은 빠져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장점의 일부만 말하고, 없는 데서는 전부 말하는 법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람반은 이 대목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자비)로 바뀐 점을 주목합니다.

    7:2 ‘정결한 짐승’라쉬

    장차 이스라엘에게 허락될 짐승을 가리키므로 노아가 토라를 배웠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일곱씩’은 방주에서 나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창세기 라바 34:9).

    7:4 ‘이레 후에’라쉬

    이 이레는 의인 므두셀라를 애도하는 이레로, 하나님이 그를 존중하여 벌을 미루셨다고 풉니다. 120년의 말미에 더해진 기간입니다(산헤드린 108b). ‘사십 일’은 아이가 빚어지는 기간에 대응하는데, 그들이 불법적인 출생으로 창조주를 괴롭혔기 때문이라고 풉니다.

    7:7라쉬

    ‘노아도 믿음이 부족한 자들 중 하나여서,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하여 물이 밀려들 때까지 들어가지 않았다’(창세기 라바 32:6). 노아를 낮추어 보는 쪽 전승의 대표 구절입니다.

    7:8페사힘 3a

    ‘깨끗하지 않은(אשר איננה טהורה)’은 ‘부정한’이라는 거친 말을 피하느라 글자를 여덟 자 더 쓴 것이므로, 사람은 입으로 추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랍비 여호수아 벤 레위가 가르칩니다.

    7:9라쉬

    짐승들이 노아에게 ‘스스로’ 왔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2).

    7:11 ‘둘째 달’라쉬 · 로쉬 하샤나 11b

    랍비 엘리에제르는 마르헤쉬반 달, 랍비 여호수아는 이야르 달이라고 합니다. 일 년을 어느 달에 시작하느냐의 차이입니다. ‘큰 깊음(תהום רבה)’에는 ‘사람의 악이 큼(רבה רעת האדם)’과 같은 ‘큼(רבה)’이 쓰이니, 큰 죄를 큰 깊음으로 갚으신 것이라고 풉니다.

    7:12 ‘비가 땅에’라쉬

    처음에는 ‘비(גשם)’라 하고 17절부터 ‘홍수(מבול)’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처음엔 자비로 부드럽게 부으셔서, 돌이키면 복의 비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풀이입니다.

    7:13 ‘바로 그날’라쉬

    사람들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부수고 죽이자’ 하여,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들어가게 하여 누구의 말이 이기는지 보자고 하셨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2:8).

    7:16 ‘여호와께서 닫으시니라’라쉬

    미드라쉬는 곰과 사자로 방주를 둘러싸 사람들이 부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라쉬는 문자 그대로의 뜻이 ‘물을 막아 문을 닫으셨다’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בֹּא
    보
    들어가라(‘오라’)

    ‘가라(לֵךְ)’가 아니라 ‘오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안에 계신다는 뉘앙스로 읽는 해석이 전해집니다.

    שִׁבְעָה שִׁבְעָה
    시브아 시브아
    일곱씩

    정결한 짐승(7:2)은 ‘일곱씩’입니다. 번제(8:20)를 드릴 것을 미리 준비하는 셈입니다.

    אֲשֶׁר לֹא טְהֹרָה
    아쉐르 로 테호라
    정결하지 않은

    ‘부정하다(טְמֵאָה)’ 대신 ‘정결하지 않은’이라고 돌려 말합니다. 탈무드는 이 한 곳 때문에 토라가 글자를 더 썼다고 가르칩니다.

    מַבּוּל
    마불
    홍수(대홍수)

    노아의 홍수를 가리킬 때만 쓰는 특별한 낱말입니다(시 29:10에서 하나님의 보좌 아래 물에도 쓰임). 아카드어 ‘아부부’(홍수)와의 관계를 말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תְּהוֹם רַבָּה
    테홈 라바
    큰 깊음

    창 1:2의 ‘깊음(תְהוֹם)’과 같은 낱말입니다. 창조 때 갈라 놓은 물이 되돌아오는 그림입니다.

    וַיִּסְגֹּר יְהוָה בַּעֲדוֹ
    바이스고르 아도나이 바아도
    여호와께서 그를 위해 닫으시니라

    문을 닫으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심판의 문을 닫는 손이 동시에 보호하는 손입니다.

    히브리 배경

    고대 사람들은 하늘 위에도 물이 있고(궁창 위의 물, 창 1:7) 땅 아래에도 물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7:11은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고 하여 창조 때 나눈 위와 아래의 물이 합쳐지는 그림을 그립니다. 홍수는 비가 많이 온 사건을 넘어 ‘창조의 되돌림’입니다. 시각도 정확히 적습니다. 노아 600세, 둘째 달 17일. 이 연대 계산은 이후 8장에서 방주 안에서 보낸 날들을 날짜 단위로 헤아리는 뼈대가 됩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페사힘 3a

    ‘깨끗하지 않은’(7:8)은 거친 말을 피하려고 글자를 여덟 자 더 쓴 것이라며, 입에서 나오는 말도 조심하라고 가르칩니다.

    로쉬 하샤나 11b

    홍수의 시작을 두고 랍비 엘리에제르는 마르헤쉬반(둘째 달), 랍비 여호수아는 이야르(니산을 첫 달로 센 둘째 달)라고 합니다.

    라쉬(7:12)

    비가 처음에는 자비로 내렸고 회개하지 않자 홍수가 되었다는 구분은 ‘비(גשם)’와 ‘홍수(מבול)’의 낱말 차이에서 나온 풀이입니다.

    라쉬(7:7)

    노아를 믿음이 부족한 자로 낮춰 보는 풀이입니다.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구분노아의 믿음은 흔들렸나
    유대 전승

    라쉬는 7:7에서 ‘노아도 믿음이 부족한 자 중 하나여서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하여 물이 닥친 뒤에야 방주에 들어갔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2:6).

    본문 문맥

    7:5는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고 하고, 7:7은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다’고 적습니다. 본문은 노아의 망설임을 말하지 않습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8:1에서 방주 안에서 오래 기다리는 동안 노아의 마음이 여러 감정으로 흔들렸을 것이고 큰 시험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는 받아들인 약속을 끝까지 굳게 붙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그의 믿음과 인내를 단련하셨다는 것입니다.

    평가

    라쉬의 ‘믿음 부족’은 본문에 없는 추정입니다. 칼빈의 읽기는 ‘흔들림과 붙듦이 함께 있는 시험받은 믿음’으로, 본문의 서술(7:5, 6:22)과 히 11:7에 더 가깝습니다. 노아를 낮추는 풀이와 이상화하는 풀이의 중간 지점입니다.

    구분‘정결한 짐승’을 구분한 노아는 토라를 배웠나
    유대 전승

    라쉬는 7:2의 ‘정결한’이 장차 이스라엘에게 허락될 짐승을 가리키므로 노아가 토라를 배웠다는 증거라고 풉니다.

    본문 문맥

    7:2는 정결한 짐승을 일곱씩, 8:20은 노아가 번제를 드린 것을 적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한참 뒤에 주어집니다. 4:4에서 아벨은 이미 짐승 제사를 드렸습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4:3–5에서 제사의 관습이 사람이 지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신 것이고, 그 제사는 속죄의 필요를 가르치는 것이었다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2와 19.1–2는 창조 때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말하고, 이 율법이 타락 뒤에도 ‘완전한 의의 규범’으로 남아 시내산에서 십계명으로 주어졌다고 합니다.

    평가

    라쉬의 ‘노아가 토라를 배움’은 시대착오적인 풀이입니다. 개혁신학은 이 문제를 ‘창조 때부터의 도덕적 계시와 하나님이 일찍이 정해 주신 제사 질서’로 설명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정결/비정결의 구분이 이미 있었다는 것까지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짐승은 쌍으로 하나씩’이라는 흔한 그림은 본문 한쪽만 본 것입니다. 6:19는 모든 짐승 ‘암수 한 쌍’을, 7:2는 정결한 짐승 ‘일곱씩’을 말합니다. 일반 규칙과 정결한 짐승의 예외로 읽으면 부딪히지 않습니다. 라쉬는 일곱씩을 방주에서 나와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으로 풉니다.

    비가 사십 주야(7:12), 물이 불어난 기간은 백오십 일(7:24)입니다. 사십 일 만에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홍수 전체는 이듬해 둘째 달 27일(8:14)까지 약 일 년입니다.

    ‘정결한 짐승 = 토라를 배운 노아’(라쉬 7:2)는 토라가 주어지기 전의 정결·부정 구분을 거꾸로 읽은 풀이입니다. 본문 자체는 노아가 이미 정결한 짐승을 구분했다고만 말합니다.

    오늘의 물음

    ‘하나님이 문을 닫으셨다’(7:16).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이 닫으신 문은 심판의 문입니까, 보호의 문입니까?

    3. 화요일 · 셋째 낭독 · 창세기 7:17–8:14

    물이 땅을 백오십 일 덮은 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시고’ 물이 줄기 시작합니다. 방주는 아라랏 산지에 머물고,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7:17라쉬

    방주는 짐 실은 배처럼 물에 열한 규빗 잠겨 있었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2:9). 8:4에서 이 계산이 입증된다고 합니다.

    7:20라쉬

    열다섯 규빗은 산꼭대기 위로 열다섯 규빗이라는 뜻으로 읽습니다(요마 76a).

    7:22라쉬

    ‘마른 땅에 있던 것’이 죽었다는 말은 바다의 물고기는 죽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습니다(산헤드린 108a).

    7:23 ‘오직 노아만’라쉬

    문자적 뜻은 ‘노아 하나만’입니다. 미드라쉬는 ‘아크(אך)’를 한정으로 읽어 노아가 짐승을 돌보느라 피를 토했다고 풀고, 의인도 이 세상에서 갚음을 받는다는 잠 11:31을 인용합니다.

    8:1 ‘기억하사’라쉬

    ‘엘로힘’은 본래 엄한 정의의 이름인데 의인의 기도로 자비로 바뀐다고 합니다. 악인의 행위는 반대로 자비를 정의로 바꾼다고 하며 6:5의 여호와가 6:6에서 달리 쓰인 점을 근거로 듭니다. 짐승을 기억하신 까닭은 홍수 전에도 그들이 짝을 어기지 않았고 방주에서도 따로 지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8:2라쉬

    샘들이 터질 때는 ‘모든’ 샘이었는데 막힐 때는 ‘모든’이 빠졌다고 짚습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샘, 곧 티베리아의 온천 같은 것은 막지 않으셨다는 풀이입니다(산헤드린 108a).

    8:4 ‘아라랏 산들’라쉬 · 온켈로스 · 이븐 에즈라

    라쉬는 7월 17일이라는 날짜로 방주가 열한 규빗 잠겼음을 계산합니다. 온켈로스는 ‘아라랏’을 ‘쿠르두’ 산들이라 옮깁니다. 이븐 에즈라는 11:2의 ‘동쪽에서’를 근거로 아라랏이 동쪽에 있다고 봅니다.

    8:7 ‘까마귀’라쉬 · 산헤드린 108b

    라쉬는 까마귀가 노아가 자기 짝을 해칠까 의심하여 방주 둘레를 맴돌기만 했다고 풉니다. 탈무드에서 레쉬 라키쉬는 까마귀가 ‘당신의 주인도 나를 미워하고 당신도 나를 미워한다’고 설득력 있게 항변했다고 전합니다.

    8:8 ‘비둘기를 내보내어’라쉬

    ‘샬라흐’는 ‘놓아주다’의 뜻입니다. 쉴 곳을 찾으면 돌아오지 않을 터이므로 물이 빠졌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레를 더 기다렸다는 데서 처음에도 이레를 기다린 것을 알 수 있다고 계산합니다.

    8:11 ‘감람 잎사귀’라쉬 · 에루빈 18b

    문자적으로는 ‘뜯었다’입니다. 미드라쉬는 ‘타라프’를 ‘먹이’로 읽어, 비둘기가 ‘꿀처럼 단 것을 사람 손에서 받느니 쓴 것을 하나님 손에서 받겠다’고 말했다고 풉니다.

    8:13–14라쉬

    ‘정월’은 랍비 엘리에제르는 티쉬리, 랍비 여호수아는 니산이라 합니다(로쉬 하샤나 11b). 8:14의 열흘은 태양년이 태음년보다 긴 날수여서, 홍수 세대에 대한 벌이 태양년 한 해 동안 이어졌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3:17).

    히브리어 낱말 공부

    וַיִּזְכֹּר אֱלֹהִים אֶת־נֹחַ
    바이즈코르 엘로힘 에트 노아흐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사

    히브리어 ‘기억하다(זָכַר 자카르)’는 머릿속의 회상이 아니라 ‘행동에 옮기다’입니다(출 2:24, 삼상 1:19). 이 절이 홍수 이야기의 한가운데 돌쩌귀입니다.

    וַתָּנַח הַתֵּבָה
    바타나흐 하테바
    방주가 머물렀으며

    ‘머물다·쉬다(נוח 누아흐)’는 노아(נֹחַ)의 이름과 같은 뿌리입니다. ‘쉼’이라는 이름이 방주에서 이루어집니다.

    הָרֵי אֲרָרָט
    하레이 아라랏
    아라랏 산들(산지)

    복수형입니다. 한 봉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아라랏 지역의 산들’입니다.

    עֹרֵב / יוֹנָה
    오레브 / 요나
    까마귀 / 비둘기

    ‘요나(יוֹנָה)’는 선지자 요나의 이름과 같은 낱말입니다.

    עֲלֵה־זַיִת טָרָף
    알레 자이트 타라프
    새로 딴 감람 잎

    ‘타라프(טָרָף)’는 ‘뜯다·찢다’이고 같은 뿌리 ‘테레프’가 ‘먹이’입니다. 방금 뜯은 싱싱한 잎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배경

    ‘아라랏’은 아시리아 비문에 나오는 ‘우라르투’ 왕국(오늘의 동부 터키·아르메니아·이란 서북부)과 연결됩니다. 오늘 터키의 아르 산(5,137m)을 ‘아라랏 산’이라 부르는 것은 후대의 관습입니다. 새를 날려 육지를 가늠하는 것은 옛 항해자의 방법이어서, 길가메시 서사시 11번 토판에도 비둘기·제비·까마귀가 차례로 날아갑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같은 세계에서 나온 것을 보여 주면서, 감람 잎 한 장으로 ‘땅이 다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는 증거를 주는 점이 다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8:1)

    ‘엘로힘’은 본래 정의의 이름이지만 의인의 기도로 자비로 바뀌고, 악인의 행위는 자비를 정의로 바꾼다고 봅니다.

    탈굼 온켈로스(8:4)

    ‘아라랏’을 ‘쿠르두 산들’로 옮깁니다. 오늘 터키의 아르 산이라는 해석은 전승 전체의 공통 의견이 아닙니다.

    산헤드린 108b · 라쉬(8:7)

    까마귀는 짝을 해칠까 의심했다는 풀이(라쉬)와, ‘당신의 주인도 나를 미워한다’고 노아에게 항변했다는 풀이(레쉬 라키쉬)가 따로 전해집니다.

    에루빈 18b · 라쉬(8:11)

    비둘기가 ‘쓰더라도 하나님의 손에서’ 받겠다고 했다는 풀이입니다. 라쉬는 문자적 뜻이 ‘뜯었다’임을 먼저 적습니다.

    라쉬(8:14)

    홍수가 열두 달에 열흘을 더해 태양년 한 해 동안 이어졌다고 계산합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구분8:1 ‘기억하사’와 하나님의 이름
    유대 전승

    라쉬는 ‘엘로힘’이 본래 엄한 정의의 이름이지만 의인의 기도로 자비로 바뀌고, 악인의 행위는 자비를 정의로 바꾼다고 풉니다. 창세기 라바 33:3은 엘로힘을 심판의 속성, 여호와를 자비의 속성으로 봅니다.

    본문 문맥

    8:1의 ‘엘로힘이 노아를 기억하사’는 자비의 행위인데 정의의 이름이 쓰입니다. 7:16에서는 ‘여호와’가 문을 닫으십니다. 출 2:24, 창 19:29에서도 ‘기억하다’는 구원의 행동을 시작하신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8:1에서 하나님은 노아를 한 순간도 잊으신 적이 없지만, 방주가 다섯 달 넘게 물 위에 떠 있던 지체가 ‘잊으신 듯’ 보이게 하여 노아의 믿음과 인내를 훈련하신 것이라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1은 하나님이 ‘틀림없는 예지와 자유롭고 불변하는 경륜에 따라’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고 합니다.

    평가

    이름을 속성의 교대로 읽는 전승의 도식은 8:1에서 스스로 설명이 필요해집니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경륜 안에서, 사람에게는 ‘잊으신 듯’ 보이는 방식으로 일하신다고 읽고(칼빈의 맞추심), 본문의 이름 대비를 속성론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방주가 터키 아르 산에서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본문의 근거가 없습니다. 본문은 ‘아라랏 산들’이라고 지역만 밝히고, 온켈로스는 ‘쿠르두’라고 옮깁니다.

    ‘올리브 가지를 문 비둘기 = 평화’의 상징은 후대 기독교 도상에서 퍼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땅이 말랐다’는 신호입니다. 유대 전승은 오히려 ‘쓴맛이라도 하나님의 손에서’라는 독립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까마귀의 항변(산헤드린 108b)과 비둘기의 대답(에루빈 18b)은 본문에 없는 상상입니다. 가르침으로는 풍성하지만 본문의 사실로 가르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오늘의 물음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 오래 기다린 끝에 ‘이제 움직이시는구나’ 하고 느꼈던 순간이 있습니까?

    4. 수요일 · 넷째 낭독 · 창세기 8:15–9:7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제단을 쌓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해도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하십니다. 새 복과 첫 번째 계명(피·살인)이 주어집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8:16–17라쉬

    방주에 들어갈 때는 남자와 여자를 따로 적었는데(6:18) 나올 때는 ‘너와 네 아내’를 함께 적어 부부 생활이 다시 허락되었음을 보인다고 합니다. ‘땅에서 번성하라’는 ‘방주 안에서가 아니라’는 뜻이라 짐승도 방주에서는 짝을 나누었다고 봅니다.

    8:20라쉬

    노아가 ‘하나님이 정결한 짐승을 일곱 쌍 들이라 하신 것은 제사를 드리려는 것이었다’고 이해했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4:9).

    8:21 ‘마음속으로’람반

    이 말씀은 그때 예언자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모세에게 토라를 쓰라 명하신 날에야 알리셨다고 합니다.

    8:21 ‘어려서부터’라쉬 · 람반

    ‘민네우라브’에서 ‘ו’가 빠진 철자를 근거로, 태아가 독립하여 움직이기 시작할 때부터 악한 충동이 주어진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4:10). 람반은 사람이 이렇게 창조되었고, 이 성향은 어릴 때 강하다는 두 가지를 하나님의 자비의 이유로 풉니다.

    8:21 ‘다시는…다시는’라쉬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한 것은 맹세라는 표시입니다. 이사야 54:9의 ‘노아의 물’이 가리키는 것이 이것입니다.

    8:22라쉬

    여섯 철을 두 달씩 나누어 씨 뿌림·추위·겨울·거둠·여름·더위를 꼽습니다(바바 메지아 106b). ‘낮과 밤이 쉬지 않으리라’는 홍수 동안에는 멈췄다는 뜻으로 읽습니다(창세기 라바 34:11).

    9:3라쉬

    아담에게는 푸른 채소만 주셨으나 이제는 푸른 채소처럼 모든 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산헤드린 59b).

    9:4라쉬

    ‘생명 있는 채로의 살’은 살아 있는 짐승에서 떼어 낸 지체를 먹지 말라는 금지(에벨 민 하하이)이고, 이어서 ‘피’까지 금하는 것입니다.

    9:5–6라쉬

    ‘너희 피’는 스스로 자기 피를 흘린 자에게도 찾으신다는 뜻으로 풉니다(창세기 라바 34:13). 9:6의 ‘사람에 의해’는 증인이 있으면 죽인다는 뜻이고,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4:14).

    9:7라쉬

    9:1은 복이었고 이 절은 명령입니다(크투봇 5a). 살인 다음에 놓은 것은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을 피 흘림에 견주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예바못 63b).

    히브리어 낱말 공부

    רֵיחַ הַנִּיחֹחַ
    레아흐 하니호아흐
    향기로운 냄새(안식의 향기)

    ‘니호아흐(נִיחֹחַ)’는 ‘누아흐(쉬다)’에서 왔습니다. ‘노아흐 → 쉼 → 니호아흐’. 노아의 이름과 같은 소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쉬게 하는 제사를 낳습니다.

    יֵצֶר לֵב הָאָדָם
    예쩨르 레브 하아담
    사람의 마음에 품는 생각

    ‘예쩨르’는 ‘빚다(יצר)’에서 온 말로 도공이 흙을 빚는 동사입니다(2:7 וַיִּיצֶר). 마음이 ‘빚어낸 모양’이라는 뜻입니다.

    מִנְּעֻרָיו
    민네우라브
    어려서부터

    ‘나아르(נַעַר 아이)’에서 나온 말입니다. 6:5의 ‘항상(כָּל־הַיּוֹם)’과 비교해 보세요.

    דָּם
    담
    피

    9:4에서 ‘피 있는 채로 먹지 말라’고 하며 생명(נֶפֶשׁ 네페쉬)이 피에 있다고 합니다(레 17:11과 이어짐).

    שֹׁפֵךְ דַּם הָאָדָם בָּאָדָם דָּמוֹ יִשָּׁפֵךְ
    쇼페크 담 하아담 바아담 다모 이샤페크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דם(피)과 אדם(사람)이 맞물리는 소리놀이입니다.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피를 흘린다는 균형이 낱말 속에 있습니다.

    히브리 배경

    8:20은 ‘제단(מִזְבֵּחַ)’이라는 낱말이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자리입니다. 정결한 짐승 중에서 번제를 드립니다(앞 장에서 일곱씩 데려온 이유). 같은 순간을 길가메시에서는 신들이 제물 냄새를 ‘파리처럼 몰려와 맡는’ 장면으로 그리지만, 성경은 신인동형의 표현을 쓰되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말씀하셨다’(8:21)고 하며 오히려 은혜의 결심을 담습니다. 8:21의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사람이 선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여전히 악하지만’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8:21)

    ‘어려서부터’의 철자가 달라 ‘태아가 움직일 때부터 악한 충동이 주어진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4:10). 이어지는 하나님의 ‘그럼에도’가 여기서 더 두드러집니다.

    산헤드린 56a–b

    이 대목을 바탕으로 ‘노아 자손의 일곱 계명’(우상숭배·신성모독·재판 제도·살인·성적 부도덕·도둑질·산 짐승의 살)을 정리합니다. 이 일곱을 지키는 이방인을 ‘의로운 이방인’으로 봅니다.

    산헤드린 57b

    9:6의 ‘사람 안에서(בָּאָדָם)’를 ‘사람 안에 있는 존재(태아)’로 읽는 해석을 랍비 이스마엘이 제시합니다.

    라쉬(9:3–4)

    아담에게는 채소만 허락되었고 노아 때 고기가 허락되었다고 하며, 살아 있는 짐승의 살을 금하는 것이 가장 먼저 주어진 육식의 규칙이라고 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8:21 사람의 악함과 하나님의 결심
    유대 전승

    라쉬는 ‘어려서부터’를 ‘태아가 움직일 때부터 악한 충동이 주어진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4:10). 람반은 이 악함이 사람이 그렇게 창조되었고 젊을 때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치지 않으시는 이유가 된다고 풉니다.

    본문 문맥

    6:5(‘항상 악할 뿐’)는 홍수의 이유이고, 8:21(‘어려서부터 악하다’)은 다시는 멸하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 사람이 나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가 같은데도 은혜가 먼저 선언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8:21에서 노아의 제사가 ‘향기’를 낸 것은 짐승의 연기가 하나님을 달래서가 아니라 자기 생명이 자비의 선물임을 인정한 경건 때문이며, 이는 사람의 이해에 맞추신 표현이라고 합니다. 또 사람이 마땅히 받을 대로 대하신다면 날마다 홍수가 필요하므로 하나님이 심판의 방식을 바꾸어 땅을 보존하신다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4와 벨직 신앙고백 15조는 이 부패가 모든 실제 죄의 뿌리라고 합니다.

    평가

    람반과 칼빈은 ‘사람의 악함이 곧 은혜의 이유가 된다’는 방향에서 만납니다. 차이는 깊이입니다. 람반은 이 성향을 약화시켜(젊을 때) 하나님의 자비를 설명하고, 개혁신학은 이를 전적 부패로 깊게 읽으며 은혜의 값없음을 더 강조합니다. 본문의 ‘6:5와 8:21의 거의 같은 말’이 두 읽기를 모두 허용합니다.

    구분9:5–6 살인과 형벌, ‘증인’과 ‘사람에 의해’
    유대 전승

    라쉬는 9:5의 ‘사람의 손’을 고의로 죽인 경우로, ‘형제의 손’을 실수로 죽인 경우로 나누어 풀고, 9:6의 ‘사람에 의해’는 증인이 있으면 죽인다는 뜻이라 합니다. 산헤드린 57b는 ‘사람 안에서’를 태아까지 포함하는 말로 읽습니다.

    본문 문맥

    9:6은 사람을 죽이는 이유를 하나님의 형상에 둡니다. 출 21:12–14와 민 35:11–24는 고의와 과실을 구분하고 도피성을 둡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9:5에서 ‘유대인이 살인을 네 종류로 나누는 것은 하찮다’고 하고, 9:6의 ‘사람에 의해’를 ‘증인 앞에서’로 읽는 것도 억지라며, 이 구절은 살인이 얼마나 잔혹한 범죄인지를 강조하는 말이라고 풉니다. 또 하나님이 살인자를 징벌하시되 관원에게 칼을 들려 피 흘림이 처벌 없이 지나가지 않게 하신다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1은 관원에게 ‘칼의 권세’를 맡기셨다고 합니다.

    평가

    칼빈이 이 자리에서 구분을 물리치는 것은 9:5–6 본문에서 구분을 읽어 내는 것이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고의와 과실의 구분 자체는 모세의 율법(출 21, 민 35)에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구분이 있느냐가 아니라, 이 구절에서 그 구분을 읽어 내도 되느냐입니다. 칼빈의 신중한 구분이 오히려 정확합니다.

    보완‘노아 자손의 일곱 계명’
    유대 전승

    산헤드린 56a는 노아 자손이 재판 제도, 신성모독, 우상숭배, 부도덕한 성관계, 살인, 도둑질, 산 짐승의 살을 먹는 것의 일곱 계명을 받았다고 정리합니다. 근거는 창 2:16 등의 해석입니다.

    본문 문맥

    9:4–6에 직접 있는 것은 피째 먹지 말라와 살인 금지뿐입니다. 롬 2:14–15는 이방인에게도 율법이 마음에 새겨져 있다고 하고, 행 15:20, 29는 이방인 신자에게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개혁신학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1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고 하며(4.2), 19.2는 이 율법이 타락 뒤에도 십계명으로 주어진 ‘완전한 의의 규범’이라고 합니다.

    평가

    랍비 체계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보편 도덕 질서를 이끌어 내려는 시도로, 개혁신학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자연적 도덕법)’과 방향이 닮았습니다. 차이는 근거입니다. 랍비들은 창 2:16 같은 구절의 해석에, 개혁신학은 창조 때 새겨진 율법과 롬 2:14–15에 둡니다. 어느 쪽이든 ‘일곱’이라는 숫자는 본문에 없는 체계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일곱 계명’은 본문에 일곱으로 나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에 직접 있는 것은 9:4–6의 ‘피째 먹지 말라·살인하지 말라’뿐입니다. 나머지는 랍비들이 2:16 같은 구절에서 끌어내 만든 체계입니다. 유익한 체계이지만 ‘성경이 말한 일곱’은 아닙니다.

    8:21의 ‘마음의 생각이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인간관은 6:5의 ‘항상 악할 뿐’과 짝입니다. ‘인간이 악해서 홍수를 보냈다’와 ‘악해도 다시는 보내지 않겠다’ 사이의 간격이 은혜입니다. 전승이 이를 ‘악한 충동’으로 정리하는 것과 기독교의 원죄 이해가 갈리는 지점입니다. 람반은 오히려 이 악한 성향이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시는 이유라고 읽습니다.

    ‘노아의 제사가 처음의 제단’이라는 것은 ‘제단(מִזְבֵּחַ)’이라는 낱말이 처음 나온다는 뜻이지,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제단 없이 드려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의 물음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하나 다시는 저주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이 ‘그럼에도’를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흉내 내고 있나요?

    5. 목요일 · 다섯째 낭독 · 창세기 9:8–17

    하나님이 노아와 모든 생물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구름 속의 활’을 그 표징으로 삼으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9:8람반

    하나님이 아들들에게는 아버지를 통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들들은 예언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9:9 ‘나는 내가’라쉬

    ‘나도 네 뜻에 동의한다’는 뜻이라 합니다. 노아가 다시 자녀를 낳기를 두려워했으나, 하나님이 세상을 다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다는 풀이입니다(탄후마).

    9:10라쉬

    ‘땅의 짐승’은 사람과 함께 다니는 짐승이고, 이어 나오는 말은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맹수까지 포함시킵니다.

    9:12 ‘대대에’라쉬

    ‘레도롯(לדרת)’이 ‘ו’ 없이 쓰여 있어, 믿음이 ‘모자란’ 세대에만 표징이 필요하다고 풉니다. 히스기야 세대와 시므온 벤 요하이 세대는 완전히 의로워 필요 없었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5:2).

    9:12–13 ‘내 활’람반

    완료형 ‘내가 두었다’는 무지개가 이미 창조 때부터 있었음을 보인다고 합니다. 젖은 공기에 햇빛이 비치는 자연 현상이며, 하나님이 여기서 새 뜻을 주신 것이라는 풀이입니다. 활의 양 끝이 땅을 향해 굽은 모양은 ‘하늘에서 땅으로 화살을 쏘지 않겠다’는 뜻이고, 전사들이 평화를 청할 때 무기를 거꾸로 드는 법에 비깁니다.

    9:14라쉬 · 람반

    라쉬는 ‘구름을 일으키리니’를 세상에 어둠과 멸망을 가져오려는 때로 읽습니다. 람반은 하나님의 정의의 속성이 구름에 나타날 때 무지개를 보고 자비로 기억하신다고 풉니다.

    9:16 ‘하나님과 모든 생물 사이’라쉬 · 람반

    라쉬는 ‘하늘의 정의의 속성과 너희 사이’로 읽습니다. 람반은 미드라쉬가 그렇게 풀려는 것이 아니라고 짚습니다.

    9:17라쉬

    하나님이 무지개를 가리키며 ‘이것이 내가 말한 표징’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קֶשֶׁת
    케셰트
    활(무지개)

    전쟁에 쓰는 ‘활’과 같은 낱말입니다. ‘내 활을 구름 속에 두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무기를 걸어 두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אוֹת בְּרִית
    오트 브리트
    언약의 표징

    ‘오트’는 안식일(출 31:13), 할례(창 17:11)에도 쓰입니다. 언약마다 눈에 보이는 표징을 주십니다.

    וְזָכַרְתִּי
    베자카르티
    내가 기억하리니

    8:1의 ‘기억하사’와 이어집니다. 표징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장치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장치입니다(9:15–16).

    כָּל־נֶפֶשׁ חַיָּה
    콜 네페쉬 하야
    모든 생물

    언약이 사람에게만 아니라 새·가축·들짐승 모두에게 세워집니다(9:10).

    שָׁחַת
    샤하트
    부패하다·멸하다

    6:11–12에서 땅이 ‘부패하였다’와 6:13 ‘멸하리라’, 9:11, 15 ‘멸하는 홍수’는 모두 같은 뿌리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망가뜨린 것을 하나님이 거두시는 모양이었는데, 이제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히브리 배경

    고대 근동의 조약은 증인과 표징을 두었습니다. 여기서는 그 표징을 하나님이 하늘에 거십니다. 바벨론 창조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에는 마르둑의 활이 하늘에 별자리로 놓이는 대목이 있어, 일부 학자는 ‘하늘에 걸린 신의 활’이라는 상을 비교합니다. 성경은 이를 신의 승전 기념이 아니라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바꿉니다. 이 언약은 사람이 지켜야 할 조건 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맹세하신 것이라는 점도 특징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람반(9:12)

    무지개는 자연 현상이지만 하나님이 새 뜻을 주신 표징이라고 봅니다. 활이 땅을 향해 굽은 모양은 ‘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라쉬(9:12) · 창세기 라바 35:2

    ‘대대에’의 결여된 철자를 근거로, 완전히 의로운 세대(히스기야, 시므온 벤 요하이)에는 표징이 필요 없다고 풉니다.

    베라코트 59a

    무지개를 보면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에 신실하시며 그 말씀을 이루시는 분을 찬송하나이다’라는 복을 합니다.

    하기가 16a

    무지개를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닮은 빛이기 때문입니다(겔 1:28).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무지개는 새 창조인가, 새 의미인가
    유대 전승

    람반은 9:13의 완료형 ‘내가 두었다’를 근거로 무지개가 이미 창조 때부터 있었고 하나님이 새 뜻을 주신 것이며, 활이 땅을 향한 모양은 ‘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라쉬는 ‘대대에(לדרת)’의 결여된 철자를 믿음이 모자란 세대에만 표징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풉니다.

    본문 문맥

    9:12–17은 무지개를 ‘언약의 표징(오트)’이라 하고, 하나님이 구름 속의 무지개를 보시고 ‘기억하리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출 31:13)과 할례(창 17:11)도 ‘오트’라 불립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9:13에서 ‘홍수 이전에는 무지개가 없었다’고 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하찮다고 하며, 하늘의 활은 본래 자연에 있었으나 여기서 ‘표징과 보증’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어 새 직무를 받았다고 풉니다. 또 표징은 말씀과 떼어서는 안 되고, 우리 마음의 무지함과 연약함을 돕기 위해 믿음을 붙들어 주는 도구라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1은 성례를 ‘은혜언약의 표징과 인’이라고 정의합니다.

    평가

    람반과 칼빈이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무지개는 자연 현상이며 하나님이 새 뜻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읽기는 9:13의 완료형과 ‘오트’의 용례에 서 있습니다. 라쉬의 ‘믿음이 모자란 세대에만’은 철자 한 자에서 끌어낸 미드라쉬이고, 칼빈의 ‘우리 연약함을 돕는 표징’이 본문의 목적(‘기억하리라’)에 가깝습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무지개가 홍수 때 처음 생겼다’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 이상입니다. 람반은 완료형 ‘내가 두었다’를 근거로 무지개가 창조 때부터 있었고, 하나님이 여기서 새 뜻을 주신 것이라고 봅니다.

    ‘다시는 홍수가 없다’는 약속은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מַבּוּל לְשַׁחֵת כָּל־בָּשָׂר)’에 한정됩니다. 지역적인 물난리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대로 믿음이 부족한 세대에만 표징이 필요하다’는 라쉬의 풀이는 철자 하나(לדרת)에서 이끌어낸 미드라쉬입니다. 본문은 ‘영원한 언약의 표징’(9:16)이라고만 말합니다.

    오늘의 물음

    하나님이 먼저 ‘기억하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잊는 날에도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이 오늘 나에게 어떤 위로입니까?

    6. 금요일 · 여섯째 낭독 · 창세기 9:18–10:32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고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는 일이 일어나며, 저주는 ‘가나안’에게 떨어집니다. 이어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70민족이 나뉩니다(열국 족보).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9:18라쉬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를 여기 굳이 적은 것은, 함이 죄를 지어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9:20 ‘시작하여’라쉬 · 람반

    라쉬는 ‘바야헬’을 ‘속되게 했다’로 읽어 노아가 먼저 다른 것을 심었어야 했다고 하며, 방주에 포도 가지를 가져갔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6:3). 람반은 ‘이쉬 하아다마’를 ‘땅의 주인’으로 푼 라쉬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9:22 ‘하체를 보고’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어떤 랍비들은 가나안이 보고 아비에게 알렸다고 하고, 또 거세했다는 설과 성적으로 욕보였다는 설을 전합니다(산헤드린 70a). 이븐 에즈라는 본문이 노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고 하며, 가나안이 범인이라고 봅니다.

    9:23라쉬

    ‘셈이 (옷을) 가져다’는 단수여서 셈이 더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셈의 자손이 특권을 받았다고 풉니다. ‘얼굴을 돌이켜’가 반복된 것은 가까이 가서도 돌아선 채로 덮었다는 뜻입니다(창세기 라바 36:6).

    9:25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함이 ‘우리 아버지에게 넷째 아들이 생기려 한다’며 노아가 넷째 아들을 낳지 못하게 했으니, 노아가 함의 넷째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6:7). 이븐 에즈라는 ‘구스 사람들이 노아의 저주로 종이 되었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하며, 홍수 뒤 첫 왕이 구스 사람 님롯이었음을 증거로 듭니다.

    9:26–27라쉬 · 온켈로스

    ‘셈의 하나님’은 장차 가나안 땅을 셈의 후손에게 주실 분입니다. ‘셈의 장막에 거하시게’는 하나님의 임재(쉐키나)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온켈로스도 이렇게 옮깁니다. 미드라쉬는 고레스(야벳 자손)가 둘째 성전을 지었지만 쉐키나는 솔로몬(셈 자손)의 첫 성전에 거하셨다고 풉니다(요마 10a).

    10:2라쉬

    ‘디라스’는 페르시아라고 풉니다(요마 10a).

    10:8–9 ‘님롯’라쉬

    ‘용사’는 온 세상이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부추긴 힘, 곧 바벨탑 계획을 가리킵니다(창세기 라바 23:7). ‘사냥꾼’은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올무에 걸어 하나님께 반역하게 한 것이고, ‘여호와 앞에서’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일부러 도발했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그래서 뻔뻔하게 악을 행하는 사람을 ‘님롯 같다’고 말한다고 합니다(시프라).

    10:11라쉬

    앗수르는 아들들이 님롯의 말을 듣고 반역하는 것을 보고 그들 가운데서 떠나 나갔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7:4).

    10:21라쉬

    ‘야벳의 형’이라 하고 ‘함의 형’이라 하지 않은 것은, 두 사람은 아버지를 공경했고 함은 욕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에벨의 모든 자손’은 ‘강 건너편(עבר)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10:25 ‘벨렉’라쉬

    그의 때에 언어가 혼란해지고 시날 평지에서 흩어졌다고 풉니다. 아버지 에벨이 아들 이름으로 이를 예고했으니 에벨은 예언자였다고 봅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וַיָּחֶל
    바야헬
    시작하여(더럽혀)

    ‘노아가 농부가 되어 포도나무를 심었다’(9:20)의 ‘시작하여’는 ‘속되게 되다(חלל)’와 철자가 같습니다. 라쉬는 ‘스스로를 속되게 했다’로 읽습니다.

    אָרוּר כְּנָעַן
    아루르 크나안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저주가 함이 아니라 ‘가나안’에게 향합니다. 라쉬는 함이 노아가 넷째 아들을 낳지 못하게 했으므로 넷째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고 풉니다.

    יַפְתְּ אֱלֹהִים לְיֶפֶת
    야프트 엘로힘 레예페트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야프트(יַפְתְּ 넓히다)’와 ‘예페트(야벳)’의 말놀이입니다.

    אָהֳלֵי־שֵׁם
    오홀레 셈
    셈의 장막

    ‘셈(שֵׁם)’은 ‘이름’입니다. 바벨 사람들이 ‘우리 이름을 내자’(11:4) 한 것과 대비됩니다.

    נִמְרֹד גִּבֹּר־צַיִד לִפְנֵי יְהוָה
    님롯 기보르 짜이드 리프네 아도나이
    여호와 앞에서 능력 있는 사냥꾼

    ‘리프네(앞에서)’를 ‘여호와를 마주하여, 대항하여’로 읽는 전승이 있습니다.

    נִפְלְגָה
    니플레가
    나뉘었음이라

    10:25 ‘벨렉(פֶּלֶג)’의 이름 풀이입니다. 그의 때에 땅이 나뉘었다는 것은 다음 장 바벨의 흩어짐과 이어지는 복선입니다.

    히브리 배경

    10장의 ‘열국표’는 지도와 같은 목록입니다. 야벳 계열은 에게해·소아시아·북쪽, 함 계열은 이집트·구스·가나안·메소포타미아의 일부, 셈 계열은 아시리아·엘람·아람·아라비아 쪽입니다. 족보이지만 인종 목록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알던 세계의 ‘민족·지역 지도’입니다. 70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완전수로, 야곱의 가족이 70명(창 46:27)인 것과 맞물립니다. 님롯의 이름은 학자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영웅·왕의 모습과 비교합니다. 포도주 사건은 가나안 땅에 사는 이들을 정복할 때 이스라엘이 얻은 ‘도덕적 이유’를 말해 주려는 이야기로 읽는 학자도 있습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산헤드린 70a · 라쉬(9:22)

    함이 노아에게 한 일을 두고 ‘거세했다’와 ‘성적으로 욕보였다’의 두 풀이가 전해집니다. 본문의 침묵을 더 큰 죄의 암시로 읽는 전통입니다.

    라쉬(9:25) · 창세기 라바 36:7

    함이 노아가 넷째 아들을 낳으려는 것을 막았기에, 노아가 함의 넷째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다고 풉니다.

    이븐 에즈라(9:24–25)

    본문은 노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고 하며, 가나안이 범인이라고 봅니다. 구스 사람이 노아의 저주로 종이 되었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못 박습니다.

    탈굼 온켈로스 · 라쉬(9:27)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를 ‘쉐키나(임재)를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리라’로 옮기고 풉니다.

    창세기 라바 23:7 · 37:2 · 라쉬(10:8–9)

    님롯을 온 세상이 하나님께 반역하게 한 자로 봅니다. 바벨탑과 아브라함을 박해한 왕으로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후대 미드라쉬이고 본문에는 없습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구분‘함의 저주’의 이유와 범위
    유대 전승

    라쉬는 함이 노아가 넷째 아들을 낳지 못하게 해서 가나안이 저주받았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6:7). 이븐 에즈라는 ‘구스 사람이 노아의 저주로 종이 되었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하며 홍수 뒤 첫 왕이 구스 사람 님롯임을 듭니다. 탈무드(산헤드린 108b)에는 함이 피부가 검어지는 벌을 받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 문맥

    9:25의 저주는 ‘가나안’에게 향합니다. 본문에 피부색 이야기는 없고, 후대에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에게 복속되는 일(수 9:23, 왕상 9:20–21)이 이 저주의 한 성취로 읽힙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9:25에서 노아가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 까닭을 두 가지로 다룹니다. 하나님이 하신 큰 존귀 때문에 저주가 아들에게 옮겨졌다는 유대 풀이는 ‘헛된 추측’이며, 하나님은 죄를 지은 자의 후손에게까지 심판을 확장하시되 악한 후손은 스스로 허물이 있는 자라고 풉니다. 이 대목에서 칼빈은 피부색이나 아프리카인을 말하지 않습니다.

    평가

    이븐 에즈라와 본문 문맥이 같은 쪽을 가리킵니다. 저주는 가나안에게 한정되고 피부색은 본문에 없습니다. ‘함의 저주’를 특정 인종을 노예로 삼는 근거로 쓴 일은 본문, 이븐 에즈라, 그리고 이 대목의 칼빈 주석 어디에서도 지지되지 않습니다.

    보완9:27 ‘셈의 장막’에 거하는 이는 누구인가
    유대 전승

    라쉬와 온켈로스는 ‘하나님이 쉐키나를 이스라엘(셈) 가운데 거하게 하시리라’고 풉니다. 미드라쉬(요마 10a)는 고레스(야벳 자손)가 둘째 성전을 지었으나 쉐키나는 솔로몬(셈 자손)의 첫 성전에 거하셨다고 풉니다.

    본문 문맥

    9:27의 ‘거하다(וְיִשְׁכֹּן)’의 주어는 본문에 적혀 있지 않아 ‘하나님’도 ‘야벳’도 가능합니다. 사 56:6–7, 행 15:14–17, 엡 2:13–19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옴을 말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9:27에서 야벳의 후손이 한동안 셈의 장막에서 멀리 흩어졌다가 결국 ‘같은 장막, 같은 집’으로 모일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풉니다. 이천여 년 뒤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믿음으로 모였고, 이 예언은 복음 안에서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입양으로 갈라진 이들을 한 백성으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평가

    같은 구절을 전승은 ‘이스라엘 안의 하나님의 임재’로, 칼빈은 ‘이방인의 부르심’으로 읽습니다. 주어의 모호함이 두 읽기를 모두 가능하게 합니다. 개혁신학의 읽기는 이 구절의 문법적 가능성과 신약의 이방인 구원 증언이 함께 받쳐 주고, 전승의 읽기는 이스라엘의 성소 중심성이 받쳐 줍니다.

    수용님롯과 ‘여호와 앞에서의 사냥꾼’
    유대 전승

    라쉬는 님롯을 온 세상이 하나님께 반역하게 한 자로, 사냥꾼을 말로 사람의 마음을 올무에 걸어 하나님께 반역하게 한 자로 풉니다. ‘여호와 앞에서’는 일부러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도발했다는 뜻입니다(창세기 라바 37:2).

    본문 문맥

    10:8–9의 ‘기보르(용사)’와 ‘짜이드(사냥)’는 본문에서 평가되지 않지만, 11:1–9의 바벨과 이어집니다. 미 5:6은 앗수르를 ‘님롯의 땅’이라 부릅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0:8에서 사람들이 서로 평등하게 존경하던 때에 님롯이 인간임을 잊은 듯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지배한 야심 때문에 그의 이름이 ‘영원한 오명의 낙인’을 받았다고 풉니다. 그는 ‘사냥’이 사납게 약탈하는 폭군의 은유라고 합니다.

    평가

    라쉬와 칼빈 모두 님롯을 부정적으로 읽지만 초점이 다릅니다. 라쉬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 칼빈은 사람을 향한 교만과 폭군의 지배입니다. ‘여호와 앞에서’를 도발로 읽는 것은 전승의 해석이고, 평이한 읽기는 ‘여호와 앞에서도 두드러진’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함의 저주’로 특정 인종을 노예로 삼아도 된다는 주장은 성경이 아닙니다. 본문에 저주를 받은 이는 함이 아니라 ‘가나안’이고, 피부색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탈무드(산헤드린 108b)에는 방주 안에서 규율을 어긴 세 존재 중 함이 ‘피부가 검게 변하는 벌을 받았다’는 말이 있는데, 본문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후대에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데 잘못 쓰였습니다. 이븐 에즈라 자신이 ‘구스 사람이 저주로 종이 되었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반박했습니다.

    함이 ‘무엇을 했는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거세/욕보임 설은 전승의 추정이고, 이븐 에즈라는 가나안이 범인이라고 봅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아버지의 수치를 보고 형제에게 알렸다’와 두 형제가 ‘뒷걸음쳐 덮어 드렸다’는 대비입니다.

    노아가 취한 사건을 변호도 비난도 없이 담담히 서술하는 본문의 태도를 기억하세요. 성경은 영웅의 약점을 지우지 않습니다.

    오늘의 물음

    형제가 수치를 드러낼 때 나는 ‘알리는’ 사람입니까, ‘덮어 주는’ 사람입니까? 덮는 것과 숨기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7. 안식일(토요일) · 일곱째 낭독 · 창세기 11:1–32

    한 언어, 한 말을 쓰던 사람들이 벽돌로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하다가 흩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셈에서 데라까지의 족보가 아브람을 소개합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1:1 ‘한 언어’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거룩한 언어’, 곧 히브리어라고 합니다(탄후마). 이븐 에즈라는 학식 있는 이나 무식한 이나 같은 말을 했고, 흩어진 때는 홍수 뒤 백 년쯤이라고 봅니다.

    11:1 ‘같은 말’라쉬

    세 가지로 풉니다. ① 한 계획: ‘하늘을 하나님만 독점하게 둘 수 없으니 올라가 싸우자.’ ② 한 분(하나님)에 관한 말. ③ 날카로운 말: ‘1,656년마다 하늘이 흔들리니 받침대를 만들자’(창세기 라바 38:6).

    11:2라쉬

    그들은 모두 들어갈 자리를 찾아다녔으나 시날 평지 말고는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8:7).

    11:3라쉬

    바벨은 평지라 돌이 없어서 흙을 구워 벽돌(타일)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11:4 ‘흩어짐을 면하자’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하나님이 재앙으로 흩으시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 읽습니다. 이븐 에즈라는 정반대로, 탑을 쌓은 이들이 정말 하늘에 오르려 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반역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몰랐던 것이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는 신 1:28처럼 과장법이라는 것입니다.

    11:5 ‘내려오사’라쉬

    하나님이 그러실 필요는 없으나, 재판관들에게 직접 보고 이해하기 전에 피고를 유죄라 선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고 합니다(탄후마).

    11:7 ‘우리가 내려가서’라쉬

    하나님이 하늘의 법정과 의논하셨고 이는 지극한 겸손이라고 합니다(산헤드린 38b). 또 ‘자, 짓자’에 ‘자, 내려가자’로 갚으셨다고 풉니다.

    11:9라쉬

    이 흩어짐은 오는 세상에 몫이 없음을 뜻한다고도 합니다(산헤드린 107b). 그러나 두 세대의 죄를 견주어, 홍수 세대는 강탈과 다툼 속에 있었고 바벨 세대는 사랑과 우애 속에 있어서 후자는 멸망하지 않았다고 풉니다. 다툼이 얼마나 하나님께 미운 것이며 화평이 얼마나 큰지 배우라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8:6).

    11:28 ‘아버지 데라 앞에서’라쉬

    문자적으로는 ‘아버지 생전에’입니다. 미드라쉬는 데라가 아브람을 님롯에게 고발했고, 아브람은 불가마에서 구원받았으나 줄을 잘못 선 하란이 불에 타 죽어서 ‘우르(불) 카스딤’이라 한다고 풉니다. 라쉬는 메나헴 벤 사룩의 다른 풀이도 함께 적습니다. ‘우르’는 골짜기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11:29 ‘이스가’라쉬

    이스가는 사래의 다른 이름이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미래를 내다보았고, 모든 사람이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풀이입니다(메길라 14a).

    11:32 ‘데라가 하란에서 죽으니라’라쉬

    데라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뒤로도 60년을 더 살았다고 계산합니다(데라 70세에 아브람 출생, 아브람 75세에 출발, 데라는 205세에 사망). 본문이 데라의 죽음을 먼저 적은 이유는 ‘아브람이 늙은 아버지를 두고 떠났다’는 소문이 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합니다(창세기 라바 39:7). 또 ‘하란(חרן)’의 ‘נ’이 뒤집혀 있어 아브라함 때까지 하나님의 진노(חרון)가 세상에 있었다는 뜻이라 풉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שָׂפָה אֶחָת וּדְבָרִים אֲחָדִים
    사파 에하트 우드바림 아하딤
    한 언어, 같은 말

    ‘사파(입술)’는 말의 ‘가장자리’를 뜻합니다. ‘아하딤’은 ‘하나씩의 것들’, 곧 한 가지 뜻으로 일치한 말입니다.

    לְבֵנִים בַּאֲבָנִים וְהַחֵמָר בַּחֹמֶר
    레베님 바아바님 베하헤마르 바호메르
    돌 대신 벽돌, 진흙 대신 역청

    ‘헤마르’는 역청, ‘호메르’는 회반죽(진흙)입니다. 이 말놀이를 통해 인공물을 강조합니다.

    נַעֲשֶׂה־לָּנוּ שֵׁם
    나아세 라누 쉠
    우리 이름을 내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12:2)고 약속하신 것과 정면으로 대비됩니다.

    נֵרְדָה
    네르다
    내려가서

    ‘내려가자’(11:7)입니다. 사람들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하나님이 ‘내려가서’ 보셔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בָּבֶל / בָּלַל
    바벨 / 발랄
    바벨 / 혼잡케 하다

    ‘바벨’은 아카드어 ‘밥 일리(신의 문)’에서 나온 이름이지만, 본문은 히브리어 ‘발랄(혼잡케 하다)’로 풀어 조롱합니다(11:9).

    אוּר כַּשְׂדִּים
    우르 카스딤
    갈대아 우르

    ‘우르(אוּר)’는 지명이지만 히브리어로는 ‘불’과 같은 낱말이라 전승이 불의 이야기를 만듭니다.

    히브리 배경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마다 계단식 신전탑(지구라트)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에테멘아키(하늘과 땅의 기초의 집)’가 대표적이고, 꼭대기가 신이 내려오는 자리였습니다. 11:3의 ‘구운 벽돌과 역청’은 돌이 없는 충적평야의 건축 방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람이 신에게 올라가려 한 탑을 하나님이 ‘내려가서’ 보시는 모습은 신전탑을 가진 문화를 향한 풍자입니다. 그리고 11장 후반은 이 이야기를 아브람으로 곧바로 이어 줍니다. 흩어진 인류 중에서 한 사람을 부르는 12장의 배경이 이 장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11:1) · 창세기 라바 38:6

    ‘같은 말’을 ‘하나님과 싸우자는 한 계획’으로 풉니다. 한편 ‘우리 이름을 내자’는 말에서 반역보다 자기 영광의 욕심을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븐 에즈라(11:4)

    탑을 쌓은 사람들이 정말 하늘에 오르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것이라고 보며, 라쉬와 다르게 읽습니다.

    라쉬(11:9) · 창세기 라바 38:6

    홍수 세대와 바벨 세대의 죄를 견주어, 서로 사랑하며 화목했기에 바벨 세대는 멸망하지 않았다고 풉니다.

    라쉬(11:28) · 창세기 라바 38:13

    ‘우르 카스딤’을 ‘갈대아 사람의 불’로 풀어 아브람이 불가마에서 구원받은 이야기를 말하지만, 같은 라쉬가 ‘우르’를 골짜기로 푼 메나헴 벤 사룩의 풀이도 함께 적습니다.

    라쉬(11:32) · 창세기 라바 39:7

    데라가 아브람이 떠난 뒤 60년을 더 살았다는 계산은 라쉬의 풀이입니다. 본문이 죽음을 먼저 적은 것은 아브람이 아버지를 버렸다는 소문을 막으려는 것이라고 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바벨의 죄는 무엇이었나
    유대 전승

    라쉬는 ‘같은 말’을 ‘하나님과 싸우자는 한 계획’으로 풉니다(창세기 라바 38:6). 이븐 에즈라는 그들이 정말 하늘에 오르려 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닿는’은 과장법이며, 하나님의 뜻을 몰랐을 뿐이라고 풉니다.

    본문 문맥

    11:4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9:1(‘땅에 충만하라’)에 거스르는 말입니다. 11:9의 ‘혼잡케 하다’와 행 2장의 오순절 방언은 이 흩어짐이 복음으로 모이는 대조입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1:3–4에서 이 일이 폭군 님롯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서로 부추긴 공모이고, 석재도 모르타르도 없는 어려움을 무릅쓴 점이 죄를 더 무겁게 한다고 풉니다.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는 자랑하는 과장법이며, ‘이름을 내자’는 하늘을 버리고 땅에서 불멸을 구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평가

    칼빈과 이븐 에즈라는 ‘꼭대기가 하늘에’를 과장으로 본다는 점에서 같고, 죄의 성격(교만·야심)에서는 칼빈이 라쉬와 더 가깝습니다. 본문의 직접 증거는 ‘이름을 내자’와 ‘흩어짐을 면하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쟁이라는 라쉬의 풀이는 본문에 없습니다.

    수용아브람과 ‘갈대아 우르의 불’
    유대 전승

    라쉬는 ‘우르(불) 카스딤’을 데라가 아브람을 님롯에게 고발했고 아브람이 불가마에서 구원받았으며 하란이 거기서 죽었다는 미드라쉬로 풉니다. 같은 라쉬가 메나헴 벤 사룩이 ‘우르’를 ‘골짜기’로 풀었다는 것도 적습니다.

    본문 문맥

    11:28은 하란이 ‘아버지 데라 앞에서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다고만 적습니다. 수 24:2는 데라가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1:28에서 ‘유대인들이 고유 지명을 보통 명사로 바꾸어 불 속에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꾸며낸 이야기’이고 수 24:1–2가 이 가문이 그 땅만큼이나 미신에 물들어 있었다고 증언한다고 합니다. 우르의 뜻은 불(‘우르’), 해의 광채, 골짜기 등 여러 가능성이 있으나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합니다.

    평가

    칼빈의 비판은 본문 문맥에 맞고, 라쉬도 이야기와 평이한 풀이를 나란히 적습니다. 불가마 이야기는 본문의 사실이 아니라 미드라쉬의 설교입니다. 수 24:2가 이 가문의 우상숭배라는 본문의 증거입니다.

    논쟁데라의 나이와 아브라함의 떠남
    유대 전승

    라쉬는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았고 아브람이 75세에 하란을 떠났으니 그때 데라는 145세였고 이후 60년을 더 살았다고 계산합니다. 본문이 데라의 죽음을 먼저 적은 이유는 아브람이 아버지를 버렸다는 소문을 막으려는 것이라고 풉니다.

    본문 문맥

    11:26, 32, 12:4를 그대로 읽으면 데라 죽음 뒤 아브람이 떠난 것처럼 읽힙니다. 행 7:4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옮기셨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오경은 데라의 나이를 145세로 적어 이 긴장을 푸는 이문입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1:32에서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 그때 아버지가 205세에 죽었으니 아브람은 데라가 130세에 낳았고, 11:26의 ‘아브람, 나홀, 하란’ 순서는 출생 순서가 아니라 중요도 순서라고 풉니다. 아브람이 하란에서 60년을 머물렀다는 풀이는 ‘매우 있을 법하지 않다’고 하고 스데반(행 7:2–4)의 증언을 따릅니다.

    평가

    본문 숫자를 마소라 본문대로 읽으면 라쉬(떠난 뒤 60년 더 삶)와 칼빈(데라의 죽음 뒤 떠남)이 갈리고, 행 7:4는 칼빈의 읽기에 가깝습니다. 사마리아 오경의 이문은 같은 긴장을 풀 또 다른 길입니다. 한쪽을 ‘성경이 정한 답’으로 확정하기보다 근거(마소라 숫자, 행 7:4, 이문)를 함께 두세요.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아브람이 우상을 부수고 불에 던져졌다는 이야기는 라쉬가 소개해도 본문에는 없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하란이 ‘아버지 데라 앞에서’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다(11:28)는 것뿐입니다. 라쉬 자신도 ‘우르’를 골짜기로 풀이한 다른 해석을 함께 적습니다. 수 24:2는 데라가 다른 신을 섬겼음을 말합니다.

    데라의 나이 문제: 11:26의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는 반드시 아브람이 맏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라쉬처럼 ‘데라는 아브람이 떠난 뒤 60년 더 살았다’고 보면 행 7:4와 창 12:4 사이의 긴장이 풀리지만, 이것은 계산에 의한 풀이입니다.

    바벨 이야기를 ‘언어가 갈라진 형벌’로만 읽으면 절반입니다. 본문의 죄는 언어가 아니라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자기 중심의 연합입니다. 라쉬는 하나님께 반역하려는 계획으로 읽고 이븐 에즈라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고 읽는데, 본문의 직접 증거는 ‘이름을 내자’와 ‘흩어짐을 면하자’(11:4)뿐입니다. 오순절(행 2)에서 이 흩어짐이 복음으로 다시 모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물음

    나는 어떤 ‘이름’을 내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아브람은 이름을 받는 쪽이었고, 바벨은 이름을 만드는 쪽이었습니다. 내 자리는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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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와 읽는 법

    • 토라 두루마리 사진: CC0 — Wikimedia Commons

    성경 본문과 구절 번호는 개역개정 기준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번호가 다른 곳은 개역개정 번호로 옮겼습니다. 이 글에 적은 성경 참조는 모두 개역개정에 있는 구절인지 확인했습니다. 유대 전승의 인용은 세파리아(Sefaria)의 영어 번역본을 읽고 한국어로 옮긴 공부용 소개이며,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과 전승이 덧붙인 것은 「바로잡기」 칸에서 갈랐습니다.

  • 토라포션 3주 레크 레카: 너는 가라 — 창세기 12:1–17:27을 히브리어·유대 전승·개혁신학으로 읽다

    토라포션 3주 레크 레카: 너는 가라 — 창세기 12:1–17:27을 히브리어·유대 전승·개혁신학으로 읽다

    토라포션 3주 · 창세기 12:1–17:27

    레크 레카(לֶךְ־לְךָ) — ‘너는 떠나라(가라, 너를 위하여)’.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첫 말씀의 첫 두 낱말입니다. 문자대로는 ‘가라, 너 자신에게로’입니다.

    라쉬는 ‘레크 레카’를 ‘네 유익을 위하여, 네 좋음을 위하여’로 풉니다(12:1). 여기서는 큰 민족을 이룰 수 있으나 고향에서는 자녀의 복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바벨에서 흩어진 인류 이야기(11장) 다음에 한 사람이 불립니다. 바벨 사람들은 ‘우리 이름을 내자’고 했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하십니다. 12:3은 이 한 사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이번 주 일곱 날의 구성: ① 부르심과 이주(12:1–13) → ② 이집트(12:14–13:4) → ③ 롯과의 갈라섬(13:5–18) → ④ 왕들의 전쟁과 멜기세덱(14:1–20) → ⑤ 소돔 왕, 별 같은 후손과 믿음(14:21–15:6) → ⑥ 쪼갠 고기 사이의 언약과 하갈(15:7–17:6) → ⑦ 할례의 언약(17:7–27).

    미쉬나 아보트 5:3은 아브라함이 열 번의 시험을 받고 모두 이겼다고 합니다. 레크 레카가 첫 시험, 이삭을 바치는 일(22장)이 마지막으로 꼽힙니다. 하프타라는 이사야 40:27–41:16이며, 41:8에서 하나님이 ‘내 친구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부르십니다.

    토라 두루마리 근접 사진
    토라 두루마리. (CC0 · Wikimedia Commons)

    이번 주 읽는 순서

    유대 회당은 한 주에 한 편(파라샤)을 일곱 번에 나누어 읽습니다. 안식일에는 일곱 번째를 마치고 예언서(하프타라)를 읽습니다. 날짜는 올해(5787년) 이스라엘 밖(디아스포라) 일정입니다.

    요일 날짜 낭독 범위
    일요일 10월 18일 첫째 낭독 · 리숀 창세기 12:1–13
    월요일 10월 19일 둘째 낭독 · 셰니 창세기 12:14–13:4
    화요일 10월 20일 셋째 낭독 · 슐리쉬 창세기 13:5–18
    수요일 10월 21일 넷째 낭독 · 르비이 창세기 14:1–20
    목요일 10월 22일 다섯째 낭독 · 하미쉬 창세기 14:21–15:6
    금요일 10월 23일 여섯째 낭독 · 쉬쉬 창세기 15:7–17:6
    안식일(토요일) 10월 24일 일곱째 낭독 · 슈비이 창세기 17:7–27

    마프티르(안식일 마지막 낭독 반복): 창세기 17:24–17:27 · 하프타라(예언서 낭독): 이사야 40:27–41:16

    인용 읽는 법 · 용어 설명

    라쉬(Rashi) — 11세기 프랑스의 랍비 슐로모 이츠하키(1040–1105). 토라 전체에 주석을 단 사람입니다. 평이한 뜻(페샤트)을 먼저 쓰고, 필요하면 옛 미드라쉬를 인용합니다.

    람반(Ramban) — 13세기 스페인의 랍비 나흐마니데스. 라쉬를 존중하되 자주 반론하고 깊은 신학을 다룹니다. 이븐 에즈라 — 12세기 스페인의 문법학자·주석가로 평이한 뜻과 문법에 밝습니다.

    미드라쉬 — 고대 랍비들이 성경을 풀어 낸 해석 문헌의 종류입니다(‘창세기 라바’, ‘탄후마’, ‘시프라’ 등). 본문에 없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설교가 많아, 라쉬의 ‘(창세기 라바 36:7)’은 “이 풀이는 미드라쉬에서 옴”이라는 표시입니다.

    탈무드 · 미쉬나 — 미쉬나(2세기 초)와 그 토론인 게마라(5세기경)를 합한 책이 탈무드입니다. ‘산헤드린 108b’는 한 논문 책의 쪽수 표기입니다(a=앞면, b=뒷면).

    온켈로스 · 탈굼 — 토라를 아람어로 옮긴 번역(탈굼)입니다. 번역자의 해석이 섞여 있어 ‘가장 오래된 주석’으로도 읽습니다.

    바로잡기 — 본문이 말하는 것과 전승이 덧붙인 것을 가르기 위한 칸입니다. 전승 인용은 영어 번역본(세파리아)을 읽고 한국어로 옮겼으므로, 중요한 곳은 원문과 대조해 확인해 주세요.

    이 글의 차례

    1. 일요일 · 창세기 12:1–13
    2. 월요일 · 창세기 12:14–13:4
    3. 화요일 · 창세기 13:5–18
    4. 수요일 · 창세기 14:1–20
    5. 목요일 · 창세기 14:21–15:6
    6. 금요일 · 창세기 15:7–17:6
    7. 안식일(토요일) · 창세기 17:7–27

    1. 일요일 · 첫째 낭독 · 창세기 12:1–13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시며 큰 민족과 복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으로 가서 제단을 쌓지만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내려가며 아내를 누이라 말하게 합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2:1 ‘레크 레카’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네 유익을 위해’로 풀며 고향에서는 자녀의 복을 얻지 못하나 그곳에서는 큰 민족이 되고 이름이 알려질 것이라 합니다(로쉬 하샤나 16b). 이븐 에즈라는 이 명령이 아브람이 아직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내려졌다고 봅니다(행 7:2–3과 같은 읽기).

    12:1 ‘네 땅…아버지 집’라쉬

    이미 아버지와 함께 하란까지 왔는데 또 떠나라고 하시는 것은 ‘더 멀리 가라, 이제 아버지의 집도 떠나라’는 뜻이라고 풉니다.

    12:2 ‘큰 민족…복…이름’라쉬

    길을 떠나면 세 가지가 줄어든다고 봅니다. 가족(자녀), 재산, 명성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 복이 약속된다고 풉니다. 자녀(큰 민족), 재산(복), 이름(창대케)입니다(창세기 라바 39:11).

    12:2 ‘복이 될지라’라쉬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직접 복을 주셨으나(아담, 노아) 앞으로는 아브람에게 복이 맡겨져 그가 원하는 사람에게 복을 줄 수 있다고 풉니다. 또 우리가 기도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부르는 이유와 이어 풉니다.

    12:3 ‘네게서 복을 받으리라’라쉬

    미드라쉬가 많지만 평이한 뜻은 이렇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아들에게 ‘아브라함처럼 되어라’고 축복하는 말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븐 에즈라는 ‘너를 축복하는 자들’은 복수이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단수인 점을 짚습니다.

    12:5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라쉬

    아브라함이 남자들을, 사라가 여자들을 돌이키게 하여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데려왔고 성경은 그들을 ‘만든’ 것으로 친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9:14). 그러나 평이한 뜻은 노예로 얻은 사람들이라고 밝힙니다.

    12:6 ‘세겜 땅 모레의 상수리나무’라쉬 · 람반

    라쉬는 아브람이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에서 싸울 때를 내다보고 기도했고, 모레는 세겜이며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을 보여 주셨다고 풉니다. 람반은 여기서 한 원칙을 말합니다. ‘조상들에게 일어난 일은 자손들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조상의 여정을 길게 적는다고 합니다.

    12:7–8 ‘제단을 쌓고’라쉬

    12:7은 자녀와 땅의 좋은 소식에 감사하는 제단, 12:8은 후손이 아이 성에서 아간 때문에 쓰러질 것을 내다보고 기도하는 제단이라고 풉니다. ‘그의 장막(אהלה)’이 ‘그녀의 장막’으로도 읽혀, 먼저 아내의 장막을 치고 그다음에 자기 장막을 쳤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9:15).

    12:10 ‘기근이 들었으므로’라쉬 · 람반

    라쉬는 기근이 아브람의 시험이었다고 봅니다. 가나안으로 가라 하시고 이제는 떠나게 하시는 것에 불평하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피르케 드라비 엘리에제르 26). 람반은 아브라함이 ‘기근 때문에 이 땅을 떠나 이집트로 간 것’과 ‘아내를 죄의 걸림돌에 놓은 것’을 모두 ‘무심코 지은 큰 죄’라고 하며, 이것이 후손의 이집트 종살이가 정해진 이유라고 말합니다.

    12:11 ‘내가 아노니’라쉬

    이제야 사래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렸다는 말입니다. 그때까지는 두 사람 모두 지극히 정숙해서 몰랐다는 풀이와, 여행의 고단함이 사람의 외모를 상하게 하는데 사래는 그렇지 않았다는 풀이가 있습니다(탄후마).

    12:13 ‘나를 위하여’라쉬

    ‘누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아브람에게 선물을 줄 것이라는 뜻으로 풉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לֶךְ־לְךָ
    레크 레카
    너는 떠나라(가라 너를 위하여)

    ‘레카(לְךָ)’는 ‘너에게’라는 덧말입니다. 라쉬는 ‘네 유익을 위하여’, 다른 풀이는 ‘네 자신에게로(네 참된 정체성으로)’로 읽습니다.

    מֵאַרְצְךָ וּמִמּוֹלַדְתְּךָ וּמִבֵּית אָבִיךָ
    메아르체카 우미몰라드테카 우미베이트 아비카
    네 땅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나라 → 친족 → 아버지의 집으로 범위가 좁혀 갑니다. 떠나기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 순서라는 풀이가 있습니다.

    אֶל־הָאָרֶץ אֲשֶׁר אַרְאֶךָּ
    엘 하아레츠 아쉐르 아르에카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땅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십니다. 라쉬는 땅을 귀하게 여기게 하고 순종마다 보상하시려고 일부러 알리지 않으셨다고 풉니다(22:2와 같은 방식).

    וֶהְיֵה בְּרָכָה
    베헤예 브라카
    너는 복이 될지라

    명령형입니다. 복을 ‘받는 자’에서 복을 ‘나누는 자’로 바뀝니다. 라쉬는 이제까지 하나님이 직접 복을 주셨으나 앞으로는 아브람이 원하는 이에게 복을 준다고 풉니다.

    וְנִבְרְכוּ בְךָ
    베니브레쿠 베카
    네게서 복을 받으리라

    니팔형이라 ‘복을 받게 되리라’로도, ‘복을 빌 때 너를 들어 말하리라’(‘아브라함 같기를’)로도 읽힙니다. 22:18에서는 재귀형 ‘히트바레쿠’가 쓰입니다.

    הַנֶּפֶשׁ אֲשֶׁר־עָשׂוּ בְחָרָן
    하네페쉬 아쉐르 아수 베하란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

    문자대로는 ‘만든(עָשׂוּ) 영혼들’입니다. 라쉬의 평이한 풀이는 노예로 얻은 사람들이고, 미드라쉬는 아브라함이 남자를, 사라가 여자를 믿음으로 이끌었다고 풉니다.

    וַיִּקְרָא בְּשֵׁם יְהוָה
    바이크라 베셈 아도나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니라

    12:8. 아브람이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가나안 한복판에 예배 자리를 세우는 행동입니다.

    אֲחֹתִי־אָתְּ
    아호티 아트
    너는 내 누이라

    12:13. 반쯤은 사실입니다(20:12에서 이복누이임이 밝혀짐). 본문은 이 거짓을 판단하는 말을 이 자리에서 하지 않습니다.

    히브리 배경

    11장의 바벨은 ‘이름을 내려는 사람들이 흩어지는’ 이야기였고, 12장은 흩어진 인류 가운데서 한 사람을 불러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고 하십니다. 12:2–3의 약속은 다섯 겹입니다. 큰 민족, 복, 큰 이름, 복이 되는 자, 땅의 모든 족속의 복입니다. 아브람이 간 길(하란 → 세겜 → 벧엘 → 네게브)은 고대 근동 상인과 목자가 다니던 산악 길을 따릅니다.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세겜은 고대부터 성소로 쓰이던 곳입니다. 기근에는 나일 강이 있는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이 보통이었고, 이집트 베니 하산의 고분 벽화에는 아시아 유목민 일행이 이집트에 이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일행이 아브람과 직접 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이주가 실제로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12:1) · 로쉬 하샤나 16b

    ‘레크 레카’는 ‘너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라고 풉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짐이 아니라 복의 길로 읽는 전통입니다.

    람반(12:6) · 탄후마

    ‘조상들의 행적은 자손의 표징’(마아세 아보트 시만 라바님)이라는 원칙으로 창세기를 읽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집트행은 훗날 이스라엘의 이집트행의 예고입니다.

    라쉬(12:10) 대 람반(12:10)

    기근을 시험으로 읽는 라쉬와 아브라함의 잘못으로 읽는 람반이 갈립니다. 같은 본문이 한쪽에서는 믿음의 증명으로, 다른 쪽에서는 후손의 고난의 원인으로 읽힙니다.

    창세기 라바 39:14 · 라쉬(12:5)

    ‘하란에서 얻은 영혼들’을 아브라함과 사라가 모은 개종자로 풉니다. 이것이 유대 전승에서 ‘개종자를 받아들이는 일의 시초’로 자주 인용됩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아브람은 언제 부르심을 받았나
    유대 전승

    라쉬는 12:1을 ‘아버지의 집도 이제 떠나라’는 더 멀리 가라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이븐 에즈라는 하나님이 아브람이 아직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이미 떠나라고 명하셨다고 봅니다.

    본문 문맥

    12:1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행 7:2–4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하란에 거하기 전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 나타나셨다고 하고, 창 15:7은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라고 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2:1을 11:31의 끝과 이어 읽으며, 아브람이 아버지가 죽은 뒤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풀이는 이미 나그네였다면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이 불필요했을 것이므로 맞지 않고 스데반이 ‘적합한 해석자’라고 합니다. 부르심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린 것이지 변덕이나 도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평가

    이븐 에즈라, 칼빈, 스데반이 같은 방향입니다. 12:1을 ‘갈대아에서의 첫 부르심의 확인’으로 읽는 것이 본문(창 15:7)과 행 7장에 가장 맞습니다. 라쉬의 ‘더 멀리 가라’는 읽기는 이 시간 순서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보완12:3 ‘네게서 복을 받으리라’
    유대 전승

    라쉬는 평이한 뜻이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아브라함처럼 되라고 축복하는 것’이라고 풉니다. 이븐 에즈라는 ‘너를 축복하는 자들’이 복수이고 ‘저주하는 자’가 단수인 점을 짚습니다.

    본문 문맥

    12:3의 ‘니브레쿠’는 니팔(수동)이라 ‘복을 받으리라’로도 ‘복을 빌 때 너를 들어 말하리라’로도 읽힙니다. 22:18은 재귀형을 씁니다. 행 3:25와 갈 3:8은 이 약속을 복음의 예고로 읽습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2:3에서 히브리어 표현이 ‘행복의 본보기’의 뜻도 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유대인들이 제시하는 용례가 ‘자주는 맞으나 항상은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22:18과 갈 3:17(430년)의 논증을 따라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은 본보기뿐 아니라 복의 원인이며,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가 숨어 있다’고 봅니다.

    평가

    두 읽기가 모두 문법적으로 가능합니다. 전승의 ‘축복 공식’은 이 약속의 평이한 쓰임을, 칼빈은 신약이 이 약속을 읽는 방식을 반영합니다. 칼빈이 상대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한 뒤 신약의 근거로 확장하는 순서를 따르면, 본문의 문법과 신학적 읽기를 구별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보완12:10–13 아브라함의 두려움과 ‘누이’라는 말
    유대 전승

    람반은 아브라함이 기근 때문에 땅을 떠난 것과 아내를 죄의 걸림돌에 놓은 것을 ‘무심코 지은 큰 죄’로, 후손의 이집트 종살이의 원인이라고 봅니다. 라쉬는 기근을 시험으로, 사래의 아름다움을 이집트 사람들이 주목했기 때문이라고 풉니다.

    본문 문맥

    12:18–19에서 바로가 ‘네가 어찌 내게 이렇게 행하였느냐’고 꾸짖습니다. 20:12는 사라가 이복누이임을 밝힙니다. 히 11:8–10은 아브라함의 이주를 믿음으로 평가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2:10에서 기근이 ‘믿음이 뿌리까지 시험받는 큰 시련’이었으나 모세가 ‘이집트에 나그네로 내려갔다’는 한 마디로 그가 약속의 땅을 마음에서 버리지 않았음을 보인다고 풉니다. 12:11에서는 ‘누이’라 한 일을 두고 ‘거짓이 섞여 있고 아내의 정절을 지킬 방어를 빼앗은 점에서 크게 잘못’이라 하면서도, 그가 높은 목적을 가졌을 것이라고 변호합니다.

    평가

    람반과 칼빈 모두 아브라함의 잘못을 말한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칼빈은 믿음과 약함을 함께 보여 줍니다. 본문은 이를 직접 평가하지 않다가 바로의 꾸짖음(12:18)으로 간접 평가합니다. ‘성경의 영웅도 죄를 지었다’는 사실과 ‘그 믿음은 실제였다’는 사실을 함께 말하는 것이 정직한 읽기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12:1의 ‘명령이 아브람이 하란에 있을 때’ 내려졌는지, 우르에서 내려졌는지는 본문만으로 분명하지 않습니다. 12:1은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라고 하여 완료로 쓸 수 있고, 이븐 에즈라는 우르에서 이미 말씀하셨다고 봅니다. 행 7:2–4도 하란 이전(메소포타미아)에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창 11:31(데라가 가나안으로 가려고 떠났다)과 함께 읽으세요.

    12:3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를 메시아적 약속으로 읽는 것(갈 3:8)은 신약의 읽기이고, 라쉬는 ‘너 같기를’이라는 축복 공식으로 읽습니다. 히브리어 ‘니브레쿠’가 니팔(수동)인지 재귀인지가 갈리기 때문에 문법만으로는 하나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두 읽기가 이 약속의 폭을 보여 줍니다.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이 곧 ‘개종자’라는 것은 미드라쉬이고 평이한 뜻은 얻은 종들입니다. 라쉬도 두 풀이를 나란히 적습니다.

    아브람이 사래를 누이라 한 것을 본문은 평가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바로가 ‘네가 어찌 이렇게 행하였느냐’(12:18)고 꾸짖는 장면이 나오고, 람반은 이를 ‘죄’라고 부릅니다. 한편 20:12는 사라가 이복누이임을 밝힙니다. ‘반은 참’이라는 점으로 변명하기보다 본문이 말하는 긴장을 그대로 읽으세요.

    오늘의 물음

    ‘가라,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아브람은 목적지를 알지 못한 채 떠났습니다. 지금 내게 ‘네 아버지의 집’은 무엇입니까? 다 알려지지 않은 길로 한 걸음 내딛어야 할 일이 있습니까?

    2. 월요일 · 둘째 낭독 · 창세기 12:14–13:4

    바로가 사래를 궁에 데려가자 하나님이 재앙으로 개입하시고, 바로는 아브람을 꾸짖고 재산과 함께 내보냅니다. 아브람은 돌아와 벧엘의 제단 자리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2:14 ‘이집트에 이르매’라쉬

    ‘그들이 이르렀을 때’가 아니라 ‘아브람이’라고 단수로 쓴 것은 아브람이 사래를 상자에 숨겼다가 세관에서 열어 보여졌음을 가르친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0:5).

    12:15 ‘바로 앞에서 칭찬하매’라쉬

    바로의 신하들이 ‘이 여자는 왕께 합당하다’고 서로 말했다고 풉니다.

    12:16 ‘그를 후대하여’라쉬

    바로가 사래 때문에 아브람을 후대했다는 뜻입니다.

    12:17 ‘재앙을 내리시니’라쉬

    부부 관계를 해롭게 하는 ‘라아톤’이라는 병이 바로를 쳤다고 풉니다. ‘사래의 말로 말미암아’는 사래가 천사에게 ‘쳐라’ 하면 천사가 쳤다는 뜻이라고 합니다(탄후마). ‘그 집’은 탈굼처럼 ‘그의 집 사람들’로 읽는 것이 평이합니다.

    12:19 ‘데리고 떠나라’라쉬

    아비멜렉은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 좋은 대로 거하라’(20:15) 했으나 바로는 ‘가고 머물지 말라’고 했다고 대조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음란에 빠지기 쉬워서라는 이유를 겔 23:20에서 찾습니다.

    12:20 ‘바로가 명하여’라쉬

    ‘그를 위해’ 호위하고 지키라고 명했다는 뜻으로 풀고, 탈굼처럼 ‘배웅했다’고 읽습니다.

    13:2 ‘아브람이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라쉬

    ‘카베드(무겁다)’는 짐이 많다는 뜻입니다. 람반은 이 대목 전체를 후손의 이집트 종살이와 출애굽(재산을 가지고 나옴)의 예고로 읽습니다.

    13:3 ‘그가 가던 길을 따라’라쉬

    아브람이 이집트로 갈 때 묵었던 여관들에 그대로 묵으며 돌아왔다고 풉니다. 여관을 바꾸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가르칩니다(아라힌 16b).

    13:4 ‘처음에 제단을 쌓은 곳’라쉬

    ‘거기서 아브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가 새로운 행동이 아니라 이전에 한 일을 다시 가리킨다고 풉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וַיְנַגַּע יְהוָה
    바이낭가 아도나이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시니

    ‘네가(נֶגַע)’는 출애굽기에서 이집트에 내린 재앙에 쓰이는 말입니다. 아브람의 이집트행과 출애굽 이야기가 같은 어휘로 이어집니다.

    וַיְהַלְלוּ אֹתָהּ
    바예할루 오타
    그를 칭찬하더라

    ‘힐렐(찬양하다)’이 바로의 신하들이 사래의 미모를 말하는 데 쓰입니다. 찬양이라는 낱말이 위험이 되는 경우입니다.

    מַה־זֹּאת עָשִׂיתָ לִּי
    마 조트 아시타 리
    네가 내게 이렇게 행함은 어찌 됨이냐

    이방 왕이 믿는 이를 꾸짖는 대목입니다. 13:9의 ‘네가 어찌’와 같은 형식이며 20:9, 26:10에도 이어집니다.

    וַיְשַׁלְּחוּ
    바예샬레후
    그를 보내니라

    ‘샬라흐(내보내다)’는 출 12:33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서둘러 내보냈다’와 같은 동사입니다.

    כָּבֵד מְאֹד
    카베드 메오드
    매우 부유하더라

    ‘카베드(무거운)’는 12:10에서 기근이 ‘심하다’고 한 낱말과 같습니다. ‘무거운 기근’이 ‘무거운 재산’으로 바뀝니다.

    הַנֶּגְבָּה
    한네그바
    네게브 쪽으로

    ‘네게브’는 남쪽을 뜻하는 말이자 광야 이름입니다. 이집트에서 ‘올라가며’(13:1) 가나안의 남쪽에 닿습니다.

    히브리 배경

    12:10–13:4의 이야기는 출애굽기의 줄거리를 미리 보여 주는 모형으로 읽힙니다. 기근 → 이집트로 내려감 → 이집트 왕이 약자를 취함 → 하나님이 재앙으로 개입 → 이집트가 ‘내보냄’ → 짐승·은·금을 많이 가지고 나옴. 람반은 이 구조를 ‘조상들의 행적은 자손의 표징’이라는 원칙으로 읽습니다. 사래의 나이는 65세 안팎이지만, 본문은 나이를 말하지 않고 아름다움만 말합니다. 고대 궁정에서는 외국 사절이 왕에게 여자를 바치는 일이 있었고, 형제나 누이라는 신분이 의미를 가졌습니다. 아브람이 벧엘 천막으로 돌아가 ‘처음에 쌓은 제단’에서 다시 부르는 모습(13:4)은 시작점으로의 복귀를 보여 줍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람반(12:10)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겪은 일은 이스라엘이 훗날 이집트에서 겪을 일의 ‘표징’이라고 읽습니다. 기근, 이집트로 내려감, 왕에게 아내가 끌려감, 재앙, 내보냄, 부유하게 나옴이 모두 대응됩니다.

    라쉬(12:17) · 탄후마

    사래의 기도와 말에 따라 천사가 바로를 쳤다는 풀이는 하나님이 약한 이를 지키시는 방식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아라힌 16b · 라쉬(13:3)

    아브람이 이전에 묵은 여관에 다시 묵는다는 데서 ‘묵은 곳을 바꾸지 말라’는 예절을 가르칩니다. 본문이 지명 순서를 정리하는 곳에서 생활 윤리를 이끌어 내는 사례입니다.

    라쉬(12:19)

    바로의 ‘데리고 떠나라’는 외국 왕의 호의가 아니라 이집트 풍속에 대한 경계로 풉니다. 아비멜렉과 비교하는 방식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보완‘조상들의 행적은 자손의 표징’과 ‘본보기’
    유대 전승

    람반(12:6, 12:10)은 아브라함의 이집트행과 바로의 일이 후손의 이집트 종살이와 출애굽의 표징이라는 원칙으로 읽습니다.

    본문 문맥

    12:10–20과 출애굽기는 같은 낱말(기근, 내려감, 재앙, 내보냄, 부유해짐)을 공유합니다. 고전 10:11은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을 ‘본보기’라 하고, 갈 4:24는 아브라함 가정의 이야기를 비유로 읽습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2:10에서 아브람을 ‘믿는 자들의 몸의 한 지체가 아니라 모든 신자의 공동의 아버지’로 보고, 따라서 모든 이가 그의 본보기를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기근과 전쟁으로 어디로 쫓기든 ‘우리의 몸은 이리저리 옮겨져도 믿음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끌어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5는 율법 시대에 은혜언약이 모형과 제사와 약속으로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평가

    람반은 이 이야기를 이스라엘 민족사의 예표로, 칼빈은 믿는 개인의 본보기로 읽습니다. 둘 다 신약의 모형론(고전 10:11, 갈 4:24)과 닿아 있습니다. 본문이 스스로 선언한 틀이 아니라 읽는 이가 발견하는 구조이므로, 본문의 서술(12:10–20)과 신약의 용례를 함께 확인하며 쓰세요.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사래를 상자에 숨겼다’(12:14 라쉬)와 ‘라아톤 병’은 미드라쉬의 상상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큰 재앙’(נְגָעִים גְּדֹלִים)이 바로와 그의 집에 임했다는 것뿐입니다.

    사래가 정절을 지켰는가(바로가 접근했는가)에 대해 본문은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12:19의 ‘내가 그를 취하여 내 아내로 삼았나니’라는 바로의 말도 접근이 있었는지를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20:3–6의 아비멜렉 이야기는 하나님이 접근을 막으셨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12장의 사래에 대해서는 이 점을 단정하지 않는 것이 본문에 충실합니다.

    ‘조상들의 행적은 자손의 표징’이라는 람반의 원칙은 유익한 읽기이지만 본문이 스스로 선언한 틀은 아닙니다. 읽는 이가 구조적 대응을 발견하는 해석입니다.

    재산이 늘어난 것(13:2)을 ‘이집트에서 얻은 부당한 이득’으로만 읽을 필요도, 순전한 복으로만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본문은 바로가 ‘후대했다’(12:16)와 ‘내보냈다’(12:20)를 함께 적습니다.

    오늘의 물음

    아브람은 두려워서 아내를 ‘누이’라고 했고 하나님은 그 실수 위에서도 아내와 그를 지키셨습니다. 두려움에서 나온 내 선택을 하나님이 어떻게 덮어 주셨던 적이 있습니까? 아브람이 ‘처음 제단’으로 돌아간 것처럼 내가 돌아갈 자리는 어디입니까?

    3. 화요일 · 셋째 낭독 · 창세기 13:5–18

    아브람과 롯의 가축이 늘어 목자들이 다투자 아브람이 먼저 양보하고, 롯은 요단 들을 택해 소돔 가까이 장막을 칩니다. 롯이 떠난 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땅 전체를 영원히 주리라 약속하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3:5 ‘롯에게도’라쉬

    롯이 이 모든 소유를 가진 이유가 ‘아브람과 함께 다녔기 때문’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1:3).

    13:7 ‘다툼이 있었으므로’라쉬

    롯의 목자들이 악해서 남의 밭에서 가축을 먹였고, 아브람의 목자들이 도둑질이라 꾸짖자 ‘이 땅은 아브람에게 주어졌고 아브람에게 아들이 없으니 롯이 상속자라 우리가 먹는 것은 자기 것을 먹는 것’이라고 대꾸했다고 풉니다. 그러나 본문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다’(13:7)고 적혀 있으니 아브람은 아직 땅을 차지할 자격이 없었다고 라쉬는 반박합니다(창세기 라바 41:5).

    13:8 ‘우리는 형제’라쉬

    미드라쉬는 두 사람의 얼굴이 닮았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1:6).

    13:9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라쉬

    아브람이 ‘어디 있든 내가 너를 지켜 주는 방패와 도우미가 되겠다’고 한 뜻으로 풉니다. 실제로 14:14에서 롯이 포로가 되자 아브람이 구하러 갑니다.

    13:10 ‘여호와의 동산 같고’라쉬

    나무로는 동산 같고 곡식으로는 이집트 같다고 풉니다. 미드라쉬(호라요트 10b, 창세기 라바 41:7)는 롯이 이 땅을 택한 것을 불리하게 읽어, 소돔 사람들이 음란에 빠진 곳이라 택했다고 풉니다.

    13:11 ‘동으로 옮기니’라쉬

    롯이 아브람에게서 떨어져 서쪽으로 가며 ‘나는 아브람도 그의 하나님도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미드라쉬가 풉니다(창세기 라바 41:7).

    13:13 ‘소돔 사람은 악하며’라쉬

    몸으로 악하고(라) 재물로 죄를 지었다고 풉니다(산헤드린 109a). ‘여호와 앞에’는 그들이 자기들의 주인을 알면서도 일부러 반역했다는 뜻입니다(시프라). 롯이 그들과 함께 살았기에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잠 10:7)가 롯에게 적용된다고 풉니다(요마 38b).

    13:14 ‘롯이 떠난 후에’라쉬

    악한 롯이 곁에 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하지 않았다고 풉니다(탄후마).

    13:16 ‘티끌같이’라쉬

    티끌을 셀 수 없듯 후손도 셀 수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13:18 ‘마므레’라쉬

    마므레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רִיב
    리브
    다툼

    목자들 사이의 다툼(13:7)이 두 사람의 갈림으로 이어집니다. 아브람은 ‘다투지 말자, 우리는 형제다’(13:8)고 합니다.

    אֲנָשִׁים אַחִים
    아나쉼 아힘
    형제 된 사람들

    ‘아힘’은 혈연뿐 아니라 가깝다는 뜻입니다. 숙질인데도 형제라 부르는 것은 관계를 지키려는 말입니다.

    וַיִּשָּׂא לוֹט אֶת־עֵינָיו
    바이싸 로트 에트 에이나브
    롯이 눈을 들어

    13:10. 같은 표현이 13:14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보라’고 하실 때 쓰입니다. 롯은 자기 눈으로 보고 고르고, 아브람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을 봅니다.

    כְּגַן־יְהוָה כְּאֶרֶץ מִצְרָיִם
    케간 아도나이 케에레츠 미츠라임
    여호와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더라

    요단 들의 풍요를 에덴(여호와의 동산)과 이집트 곡창에 견줍니다. 롯의 눈은 풍요를 봅니다.

    רָעִים וְחַטָּאִים לַיהוָה מְאֹד
    라임 베하타임 라도나이 메오드
    여호와 앞에 악하고 죄인이었더라

    ‘라(악)’는 사람에 대한 악, ‘하타(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로 나누어 읽습니다(산헤드린 109a).

    כַּעֲפַר הָאָרֶץ
    카아파르 하아레츠
    땅의 티끌같이

    13:16. 별(15:5)·모래(22:17)와 함께 후손의 수를 가리키는 세 가지 비유 가운데 첫째입니다.

    הִתְהַלֵּךְ בָּאָרֶץ לְאָרְכָּהּ וּלְרָחְבָּהּ
    히트할레크 바아레츠 레오르카 울르라흐바
    이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니라

    땅을 ‘밟아 보라’는 것은 소유의 행위입니다(신 11:24, 수 1:3). 아브람이 다니는 곳이 곧 약속의 땅이 됩니다.

    히브리 배경

    고대 목축 사회에서는 풀과 우물을 놓고 다투는 일이 흔했고, 이 경우 가까운 친족이라도 갈라서는 것이 오히려 관계를 지키는 길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눈여겨볼 것은 ‘연장자인 아브람이 선택권을 양보한 것’입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가장이 먼저 고릅니다. 롯의 선택은 눈에 보이는 풍요(‘여호와의 동산 같고’)를 기준으로 하지만, 본문은 곧바로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고 큰 죄인이었더라’(13:13)고 덧붙입니다. 요단 들과 사해 남쪽은 당시에 물이 많은 땅이었다고 학자들은 봅니다. 롯이 떠난 뒤에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다시 말씀하시고(13:14), 땅을 ‘눈에 보이는 모든 곳’으로 확장하십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미쉬나 아보트 5:10

    ‘내 것은 내 것, 네 것은 네 것’이라고 하는 사람을 보통 유형이라 하면서도 ‘어떤 이는 이것이 소돔의 성품이라 한다’고 덧붙입니다. 소돔의 죄를 이웃에게 베풀지 않는 인색함으로 읽는 한 갈래의 전승입니다.

    산헤드린 109a · 라쉬(13:13)

    소돔 사람이 ‘몸으로 악하고 재물로 죄를 지었다’는 풀이는 소돔의 죄를 음란과 재물의 인색으로 나눕니다.

    라쉬(13:14) · 탄후마

    롯이 곁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하지 않았다는 풀이는 ‘악인과의 동행은 영적 귀를 막는다’는 가르침입니다.

    라쉬(13:9)

    양보하는 아브람이 ‘어디 있든 내가 곁에서 방패가 되겠다’고 말한다는 풀이는 갈라서면서도 책임을 놓지 않는 모습으로 읽힙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롯의 선택과 ‘눈에 보이는 풍요’
    유대 전승

    라쉬는 롯이 소돔 지역을 택한 것을 불리하게 읽어(호라요트 10b), 그들이 음란에 빠진 곳이라 택했다고 풉니다. 또 롯이 ‘나는 아브람도 그의 하나님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고 미드라쉬는 전합니다.

    본문 문맥

    13:10–11은 ‘롯이 눈을 들어’ 풍요로운 요단 들을 택했다고 하고, 13:13은 곧바로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한 죄인’이라고 덧붙입니다. 13:14는 롯이 떠난 뒤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보라’고 하십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3:10에서 롯이 ‘마치 자신이 모든 면에서 윗사람인 듯 더 좋은 몫을 가로챘고’ 아브람은 조용히 이를 참았다고 합니다. 13:13에서는 롯이 ‘욕심만큼이나 성급했던 선택’으로 사나운 이웃의 악함과 부딪히게 되었다고 풀고, ‘우리의 눈을 믿어서는 안 된다. 낙원에 있다고 여기던 롯이 지옥의 깊이에 거의 빠질 뻔했다’고 합니다. 13:5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람의 부요함에 쓴맛을 섞어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신다고 풉니다.

    평가

    라쉬의 부정적 읽기와 칼빈의 읽기가 같은 방향입니다. 본문 자체가 롯의 선택(‘눈을 들어’)과 소돔의 악(13:13)을 나란히 두고, 하나님이 ‘눈을 들어 보라’고 하시는 이는 아브람(13:14)이라는 대조를 만들어 둡니다. 다만 롯을 ‘의인’이라 부르는 벧후 2:7–8도 같은 성경이므로 롯에 대한 평가를 한쪽으로만 읽지 마세요.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소돔의 죄를 하나로만 말하는 것은 본문보다 좁은 읽기입니다. 13:13은 ‘악하고 큰 죄인’이라고만 말하고, 19장은 손님에 대한 집단적 폭력을 보여 줍니다. 겔 16:49–50은 소돔의 죄를 ‘교만, 음식의 풍족, 평안한 안일,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돕지 않음’과 ‘가증한 일’이라고 말하며, 미쉬나 아보트 5:10은 ‘내 것은 내 것’이라는 태도를 두고 ‘어떤 이는 소돔의 성품이라 한다’고 합니다. 한 가지만 골라 확정하기보다 본문과 이 증언들을 함께 읽으세요.

    롯을 ‘의인’으로 부르는 신약(벧후 2:7–8)과 롯을 낮추어 읽는 라쉬·미드라쉬는 같은 인물에 대한 다른 시선입니다. 본문은 롯이 눈에 보이는 풍요를 따라간 선택(13:10–11)을 담담히 적고, 이후 19장에서 그 결과를 보여 줍니다.

    ‘롯이 아브람의 상속자라서 남의 밭에서 먹어도 된다’는 목자들의 변명(라쉬 13:7)은 미드라쉬의 상상이지 본문이 아닙니다. 본문은 ‘다툼이 있었다’고만 적습니다.

    13:15의 ‘영원히’(עַד־עוֹלָם)는 땅의 약속에 붙은 낱말입니다. 17:8의 ‘영원한 기업’과 함께 땅의 약속이 영구적이라는 근거로 읽히지만, 이 약속이 사람의 순종에 어떻게 이어지는지(신 28–30장)는 오경의 뒤 본문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오늘의 물음

    아브람은 권리가 있었는데도 ‘다투지 말자’며 먼저 양보했습니다.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권리’ 가운데 관계를 위해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까? 롯처럼 ‘눈에 보이는 좋음’을 기준으로 한 선택은 없었는지 돌아봅시다.

    4. 수요일 · 넷째 낭독 · 창세기 14:1–20

    메소포타미아의 네 왕이 소돔 왕 등 다섯 왕을 쳐서 롯이 포로로 잡히자, 아브람이 318명의 사병과 함께 추격하여 구해 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축복합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4:1 ‘아므라벨’라쉬

    아므라벨은 님롯과 같다고 풉니다. 아브람에게 ‘불가마에 뛰어들라(פול) 하여 말(אמר)’한 이이기 때문입니다(에루빈 53a).

    14:2 ‘베라, 비르사, 시납, 세메벨’라쉬

    이 이름들을 뜻으로 풉니다. 베라는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악함, 비르사는 악함으로 올라선 자, 시납은 하늘의 아버지를 미워함, 세메벨은 하나님께 반역하려 날개를 폈음입니다(탄후마).

    14:3 ‘싯딤 골짜기’라쉬

    들(שדות)이 많아 이렇게 불렸고, 훗날 바다가 들어와 소금 바다가 되었다고 풉니다.

    14:7 ‘아말렉 족속의 온 땅’라쉬

    아말렉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훗날의 이름’으로 부른 것입니다(창세기 라바 42:7). ‘엔미스밧’은 훗날 모세와 아론이 심판받을 일(므리바)과 이어지는 이름이라 풉니다.

    14:12 ‘소돔에 거주하였음이라’라쉬

    롯에게 이런 일이 생긴 이유는 그가 소돔에 살았기 때문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2:7).

    14:13 ‘도망한 자’라쉬

    라쉬는 이 사람이 르바임과의 전쟁에서 도망쳐 온 옥이라고 풉니다. ‘히브리 사람’은 강 건너편에서 온 사람입니다(창세기 라바 42:8).

    14:14 ‘훈련된 사병 삼백십팔 명’라쉬

    ‘하니카브’의 철자가 ‘그의 훈련된 자’로도 읽혀, 아브람이 종교 의무를 가르쳐 온 엘리에셀을 가리킨다고 풉니다. 엘리에셀(אליעזר)의 수치가 318이라 ‘엘리에셀 혼자 무장했다’고 풉니다(네다림 32a). ‘단까지’는 아브람의 힘이 여기서 빠진 것으로, 후손이 거기 금송아지를 세울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이라 풉니다(산헤드린 96a).

    14:15 ‘밤에’라쉬

    평이한 뜻은 ‘그와 그의 종들이 나뉘어 밤에 쳤다’입니다. 미드라쉬는 밤을 둘로 나누어 전반은 아브람을 위한 기적에, 후반은 이집트에서의 한밤중 기적을 위해 비축했다고 풉니다.

    14:17 ‘왕의 골짜기’라쉬

    온켈로스는 ‘왕의 경기장’으로 옮깁니다. 미드라쉬는 모든 민족이 아브람을 우두머리로 세우는 데 합의한 골짜기라고 풉니다.

    14:18 ‘멜기세덱’라쉬

    멜기세덱은 노아의 아들 셈과 같다고 풉니다(네다림 32b). ‘떡과 포도주’는 전쟁에 지친 이를 위한 대접이고, 아브람이 그의 후손(왕들)을 죽인 데 원한이 없음을 보인 것이며 훗날의 소제와 전제를 암시한다고도 풉니다.

    14:19–20 ‘천지의 주재’라쉬

    시 134:3의 ‘천지를 지으신’과 같은 뜻으로, 지으심으로 소유가 되셨다고 풉니다. ‘십분의 일’은 멜기세덱이 제사장이었기에 주었다고 합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הָעִבְרִי
    하이브리
    히브리 사람

    성경에서 ‘히브리 사람’이 처음 나오는 대목(14:13)입니다. 라쉬는 ‘강 건너편(עבר) 사람’으로 풀고, 일부 학자는 고대 문헌의 ‘하비루’와 연결 지으려 하지만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חֲנִיכָיו
    하니카브
    그의 훈련된 사병

    14:14. 이 낱말은 성경에서 여기뿐입니다. ‘하나크(훈련하다·봉헌하다)’와 같은 뿌리입니다. 이 뿌리가 ‘하누카’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וַיָּרֶק
    바야렉
    무장시켜

    칼을 ‘빼다’에서 온 낱말(출 15:9 ‘내가 칼을 뽑아’)입니다. 훈련된 사병을 소집해 무장한 모습입니다.

    מַלְכִּי־צֶדֶק
    말키 체덱
    멜기세덱(의의 왕)

    ‘말키(내 왕)’와 ‘체덱(의)’의 합성입니다. 그는 ‘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אֵל עֶלְיוֹן
    엘 엘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가나안과 페니키아에서 쓰이던 신의 칭호입니다. 아브람은 이 칭호를 ‘여호와’와 같은 분으로 동일시합니다(14:22).

    קֹנֵה שָׁמַיִם וָאָרֶץ
    코네 샤마임 바아레츠
    천지의 주재(소유자)

    ‘카나’는 ‘얻다·소유하다·창조하다’입니다. 라쉬는 ‘지으시어 소유하셨다’로 풉니다.

    מִגֵּן
    미겐
    넘겨주신

    14:20. ‘마겐(방패)’과 같은 뿌리이나 여기서는 ‘넘겨 주다’(호 11:8 ‘어찌 너를 넘기겠느냐’)로 읽는다고 라쉬는 풉니다.

    מַעֲשֵׂר
    마아세르
    십분의 일

    성경에서 십일조가 처음 나오는 자리(14:20)입니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줍니다.

    히브리 배경

    창세기 14장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국제 전쟁을 다룹니다. 네 왕(엘람, 시날, 엘라살, 고임)이 동쪽에서 내려와 요단 들의 다섯 성읍을 ‘열두 해’ 동안 지배했고 열세째 해에 반역하자 열네째 해에 진군합니다. 진군 경로는 ‘왕의 대로(King’s Highway)’로 알려진 요단 동편의 길을 따릅니다. 그돌라오멜이라는 이름은 엘람어 ‘쿠두르’로 시작하는 왕의 이름 형식과 맞아 이름 자체는 자연스럽다고 학자들은 말하지만, 성경 밖 자료에서 이 인물이 확인된 적은 없습니다. 살렘은 시 76:2에서 예루살렘과 이어지고, ‘엘 엘욘’은 가나안의 신 칭호입니다. 멜기세덱은 시 110:4와 히 7장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이 장의 인물은 아브람이 ‘히브리 사람’으로 소개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14:18) · 네다림 32b

    멜기세덱을 노아의 아들 셈으로 봅니다. 홍수 뒤에도 살아 있던 셈이 살렘(예루살렘)의 왕이 되었다는 계보적 해석입니다.

    라쉬(14:14) · 네다림 32a

    318명을 엘리에셀 한 사람으로 풀이하는 것은 숫자 풀이(게마트리아)입니다. 히브리 글자의 수 값(א1+ל30+י10+ע70+ז7+ר200)이 318입니다.

    라쉬(14:7) · 창세기 라바 42:7

    본문에 아직 없는 이름(아말렉, 단)이 나오는 것을 ‘훗날의 이름으로 적었다’고 설명하는 방식은 라쉬가 지명 문제를 푸는 흔한 방법입니다.

    산헤드린 96a · 라쉬(14:14)

    아브람이 단에서 힘이 빠진 이유를 후손의 우상숭배를 내다본 데서 찾는 풀이는 조상의 행적에 후손의 역사를 비추는 읽기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멜기세덱은 셈인가
    유대 전승

    라쉬는 멜기세덱을 노아의 아들 셈이라고 풉니다(네다림 32b).

    본문 문맥

    창세기 14장은 그를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만 소개합니다. 시 110:4는 메시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라 하고, 히 7:1–3은 그가 ‘아비도 어미도 계보도 없다’고 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4:18에서 ‘셈이라 상상하는 사람이 많으나 나는 여러 이유로 이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며 세 가지를 듭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기억에 합당한 이를 이처럼 새롭고 모호한 이름으로 부르실 리 없고, 셈이 동쪽에서 유대로 옮겨 왔다는 증거가 없고, 셈이 가나안에 살았다면 아브람이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뒤늦게 찾아갔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타락한 시대에 홀로 정직하게 하나님의 종교를 지킨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보며, 히 7:3의 ‘근원 없이’를 근거로 듭니다.

    평가

    본문은 멜기세덱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므로, 셈이라는 라쉬의 계보적 풀이는 추정입니다. 칼빈은 이 침묵을 하나님이 일부러 두신 모형의 자리로 읽고, 히 7:3이 그 읽기를 따릅니다. 이 침묵을 읽는 방식에서 갈라지는 대목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멜기세덱의 정체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것은 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아브람을 축복하고 십분의 일을 받았다는 것뿐입니다. 라쉬는 셈이라 풀고, 시 110:4와 히 7:1–3은 그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읽습니다. 히 7:3의 ‘아비도 어미도 계보도 없다’는 창세기 본문의 침묵을 모형론적으로 읽은 것이며, 창세기가 그렇게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므라벨=님롯(에루빈 53a)과 318명=엘리에셀은 미드라쉬이고, 아므라벨 등 왕들의 정체와 연대는 성경 밖 자료에서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이름 형식이 자연스럽다는 것과 사건이 입증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이 ‘히브리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인종·민족 명칭인지 사회적 신분(고대 문헌의 하비루)인지는 학계에서 논쟁 중입니다. 본문은 ‘에벨의 후손’(10:21, 11:14)이나 ‘강 건너편’에서 온 사람이라는 읽기에도 열려 있습니다.

    십일조의 시작을 이 대목에서 찾는 것은 가능하지만, 본문은 아브람이 ‘전리품에서’ 주었다고 하며 율법의 십일조 제도(레 27, 민 18)와 같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이 넘겨 주신 승리에 대한 응답’으로 읽는 것이 본문에 가깝습니다.

    오늘의 물음

    아브람은 혼자가 아니라 ‘자기 집에서 훈련된 사람들’과 함께 롯을 구하러 갔습니다. 나는 갈라서 간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승리 뒤에 멜기세덱 앞에서 십분의 일을 드린 것처럼, 내 성공을 어디서 ‘감사’로 돌려드립니까?

    5. 목요일 · 다섯째 낭독 · 창세기 14:21–15:6

    소돔 왕이 전리품을 주겠다 하나 아브람은 ‘실 한 오라기도’ 받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이어 하나님이 ‘나는 네 방패요 상급’이라 하시고 아브람이 자녀 없음을 호소하자 별을 보이시며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은 믿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4:22 ‘내가 손을 들어’라쉬

    ‘나는 지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내 손을 든다’는 맹세의 표현입니다. 이 동사 형태는 22:16의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와 같은 방식이라고 풉니다.

    14:23 ‘한 오라기 실로부터’라쉬

    전리품의 한 오라기도 취하지 않을 뿐 아니라, 왕이 자기 재물로 보상해 주려 해도 받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아브람을 부유하게 하였다 하지 못하게’는 하나님이 이미 ‘내가 너에게 복을 주리라’(12:2)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풉니다.

    14:24 ‘나와 동행한 사람들’라쉬

    아브람은 자기 사병이 전투에 나갔으나 마므레·에스골·아넬은 짐을 지켰으므로 그들의 몫을 정하라고 하며 자기 사병의 몫은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15:1 ‘이 일 후에’라쉬

    ‘아하르(이후에)’는 ‘바로 그 일 직후’를 뜻합니다. 아브람은 왕들을 죽이고 ‘이 승리에 내 선행의 보상을 다 받아 버린 것은 아닌가’ 불안했고, 하나님이 ‘너는 이 사람들을 죽인 일로 벌을 받지 않으리라(방패), 상급은 매우 크리라’고 답하셨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4:5).

    15:2 ‘자식이 없이 가나이다’라쉬 · 람반

    라쉬는 ‘아리리’를 메나헴의 풀이에 따라 ‘상속자가 없는’으로 읽고, ‘다메섹’은 아브람의 종이 다메섹까지 왕들을 추격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 미드라쉬(창세기 라바 44:9)도 소개합니다. 람반은 아브람이 ‘왕들에게서 구하셨으나 후손의 끊김은 막아 주지 않으셨다’고 호소한 것으로 읽습니다.

    15:5 ‘밖으로 이끌고’라쉬

    평이한 뜻은 장막 밖으로 데려가 별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미드라쉬는 ‘점성술(운명)에서 나오라. 아브람은 아들이 없지만 아브라함은 아들을 낳고 사래는 낳지 못하나 사라는 낳으리라’는 뜻으로 풉니다. 또 하나님이 아브람을 별 위로 올리셔서 ‘위에서 내려다보라’(하벳트)고 하셨다는 풀이도 있습니다(창세기 라바 44:12).

    15:6 ‘믿으니’라쉬 · 람반 · 이븐 에즈라

    라쉬는 하나님이 아브람의 믿음을 공로(의)로 여기셨다고 풉니다. 그가 이 약속에는 표징을 구하지 않았으나 땅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리이까’(15:8)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람반은 이 풀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며 ‘아브람이 이 약속(아들)을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여겼다’는 읽기를 제안합니다. 이븐 에즈라는 ‘츠다카’를 ‘정의·옳음’으로 풉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הֲרִמֹתִי יָדִי
    하리모티 야디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였노니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은 맹세의 몸짓입니다. 라쉬는 ‘내가 들었다’가 아니라 ‘내가 손을 든다’(지금 맹세한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מִחוּט וְעַד שְׂרוֹךְ־נַעַל
    미후트 베아드 스로크 나알
    한 오라기 실로부터 신발 끈까지

    가장 작은 것에서 작은 것까지라는 강조입니다. 소돔 왕의 재물로 ‘내가 아브람을 부유하게 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는 뜻입니다(14:23).

    מָגֵן
    마겐
    방패

    15:1. ‘나는 너의 방패’. 라쉬는 이 방패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인 데 대한 벌로부터 지켜 준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שְׂכָרְךָ הַרְבֵּה מְאֹד
    스카르카 하르베 메오드
    네 상급이 매우 크리라

    ‘방패’와 ‘상급’이 한 문장에 있습니다. 보호자가 곧 보상이라는 읽기도 가능합니다(‘네 상급은 매우 크신 분’).

    עֲרִירִי
    아리리
    자식이 없이

    아브람이 15:2에서 ‘나는 자식 없이 가나이다’라고 합니다. 라쉬는 메나헴의 풀이로 ‘아들도 손자도 없는’ 뜻으로 소개합니다.

    בֶּן־מֶשֶׁק בֵּיתִי
    벤 메쉐크 베이티
    내 집에서 길린 자(집을 관리하는 자)

    법적 상속자 역할을 하는 종입니다. 라쉬는 ‘집안 사람이 모두 먹도록 명령하는 자’로 풉니다.

    הַבֶּט־נָא הַשָּׁמַיְמָה
    하벳트 나 핫샤마임마
    하늘을 우러러

    ‘하벳트’는 ‘위에서 아래로 보다’의 뜻이라는 풀이가 있습니다(창세기 라바 44:12). 하나님이 아브람을 별 위로 올려 보게 하셨다는 풀이로 이어집니다.

    וְהֶאֱמִן בַּיהוָה
    베헤에민 바아도나이
    그가 여호와를 믿으니

    ‘헤에민(믿다)’은 ‘아멘’과 같은 뿌리로, ‘단단히 서다·의지하다’입니다.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말씀 위에 서는 행동입니다.

    וַיַּחְשְׁבֶהָ לּוֹ צְדָקָה
    바야흐쉬베하 로 츠다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샤브(셈하다)’는 장부에 기록하는 낱말입니다. 주어가 누구인지가 해석을 가릅니다(바로잡기 참고).

    히브리 배경

    14:21–24와 15장은 한 흐름입니다. 승리한 아브람이 소돔 왕의 보상을 거절하고(14:23) 곧이어 하나님이 ‘나는 네 방패, 네 상급’이라 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받지 않은 보상을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셈입니다. 15:1은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로, 성경에서 처음으로 ‘말씀이 임하다’는 선지자의 어법이 나옵니다. 아브람이 후계자로 ‘다메섹 엘리에셀’을 내세우는 것은 고대 근동의 입양 관습과 맞습니다. 누지(Nuzi)의 문서들에 자녀 없는 사람이 종을 입양해 상속자로 삼고, 친자가 태어나면 친자가 상속하는 규정이 있다고 학자들이 소개합니다. 15:6은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약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롬 4:3, 갈 3:6, 약 2:23).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15:6)

    하나님이 아브람의 믿음을 ‘의(공로)’로 여기셨다는 읽기입니다. 바울(롬 4:3)이 이 구절을 읽는 방식과 가장 가까운 전통적 풀이입니다.

    람반(15:6)

    라쉬의 풀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며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의 의로움(진실하심)’으로 여겼다고 읽습니다. 믿음이 ‘특별한 공로’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응답이라는 읽기입니다.

    창세기 라바 44:12 · 라쉬(15:5)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어 별자리(마잘)가 바뀐다는 풀이는 이름이 운명을 바꾼다는 믿음에 서 있습니다.

    라쉬(15:1)

    전쟁에서 사람을 죽인 아브람의 불안을 하나님이 ‘방패’로 덮으신다는 풀이는 하나님이 정당한 전쟁의 짐까지 돌보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구분15:6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의 주어와 뜻
    유대 전승

    라쉬는 하나님이 아브람의 믿음을 공로(의)로 여기셨다고 풉니다. 람반은 이 풀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고, 아브람이 하나님이 아들을 반드시 주신다는 약속을 ‘하나님의 의로움(진실하심)’으로 여겼다고 읽습니다.

    본문 문맥

    15:6 ‘바야흐쉬베하(그가 여기시고)’의 주어는 본문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롬 4:3, 22–24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기셨다고, 갈 3:6과 약 2:23도 같은 구절을 인용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5:6에서 ‘하샤브(셈하다)’가 하나님의 재판석에서의 판단을 가리키며, 시 106:31(비느하스의 열심이 의로 여겨짐)과 레위기의 용례를 들어 ‘전가’라고 풉니다. 이 말을 ‘정직한 사람이라는 인격’으로 바꾸는 이들, 그리고 ‘아브람이 하나님께 의로움의 영광을 돌린 것’이라고 읽는 이들을 어리석고 본문을 왜곡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는 ‘아브람의 믿음이 의 대신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1은 믿음 자체를 의로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전가하며 믿음은 이를 받는 도구라고 하고, 11.6은 구약 신자의 칭의가 신약의 것과 ‘한 가지’라고 합니다.

    평가

    람반의 읽기를 칼빈은 정면으로 물리칩니다. 두 읽기는 모두 문법적으로 가능하지만 칼빈의 근거는 ‘하샤브’의 법정적 용례와 롬 4장의 바울의 읽기입니다. 칼빈의 표현(‘믿음이 의 대신으로’)과 신앙고백 11.1(‘믿음 자체를 전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의 뉘앙스 차이도 함께 보세요. 개혁신학 안에서 후자가 더 정제된 표현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15:6의 ‘그가 이를 여기시고(וַיַּחְשְׁבֶהָ)’의 주어는 본문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라쉬와 바울의 읽기(하나님이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가 가장 널리 퍼져 있고, 람반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진실하심)로 여겼다’는 읽기를 제안합니다. 문법이 두 읽기를 모두 허용하므로 신학적 결론은 앞뒤 문맥과 신약의 읽기(롬 4:3, 22–24)로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믿음(헤에민)’을 지적 동의로 좁히면 본문과 어긋납니다. 이 낱말은 ‘단단히 서다·의지하다’로, 아브람이 곧바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물을 준비하는 15:9의 행동과 이어집니다. 약 2:23은 이 구절을 아브라함의 행위(22장)와 함께 읽습니다.

    ‘별 같은 후손’을 ‘별 헤아리는 점성술을 벗어나라’고 읽는 풀이(라쉬)는 미드라쉬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하늘을 우러러 별을 셀 수 있거든 세어 보라’는 장면뿐입니다.

    ‘다메섹 엘리에셀’(15:2)의 히브리어 문장은 어렵습니다. 라쉬는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로도, 다메섹까지 추격한 사람으로도 읽습니다. 본문은 이 사람이 후계자로 거론되었다는 점을 보이면 충분합니다.

    오늘의 물음

    아브람은 사람이 주는 부를 거절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기다렸습니다. 내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사람의 손에서 받고 싶어 하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별을 세어 보라’고 하실 때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믿고 그 위에 섭니까?

    6. 금요일 · 여섯째 낭독 · 창세기 15:7–17:6

    하나님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며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고, 후손이 이방에서 종살이하리라 예고하십니다. 사래는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어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십삼 년 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시며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5:9–10 ‘삼 년 된 암소…’라쉬

    삼 년 된 암소·암염소·숫양은 훗날 이스라엘의 제사(속죄일의 황소, 속죄 제물 등)의 종류를 가리킨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4:14). 새는 쪼개지 않은 이유를, 다른 나라들은 황소·숫양·숫염소에 견주고 이스라엘은 비둘기에 견주어서라고 풉니다.

    15:11 ‘솔개가…’라쉬

    솔개를 쫓은 것은 다윗이 이방 민족을 없애려 하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것을 상징한다고 풉니다.

    15:12 ‘캄캄함이…’라쉬

    이것은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의 고난과 어둠을 상징한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4:17).

    15:13 ‘사백 년’라쉬

    이삭이 태어난 때부터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난 때까지가 400년입니다. 이삭이 60세에 야곱을 낳았고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갈 때 130세였으며 이집트에서 210년을 보냈으므로, 60+130+210=400이라고 계산합니다. ‘그들의 것이 아닌 땅’은 이집트라고 하지 않고 이삭 때부터 객이 된 것을 가리킵니다.

    15:14 ‘그 나라를 내가 징벌하리니’라쉬

    ‘또한(ג)’이 다니엘서의 네 제국도 이스라엘을 압제한 일로 망한다는 뜻을 포함한다고 풉니다. ‘징벌’은 열 재앙입니다.

    15:15 ‘너는 평안히 네 조상에게로’라쉬

    조상은 우상 숭배자 데라인데도 ‘그에게로 간다’고 한 것은 데라가 회개했음을 가르친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0:4). ‘좋은 나이에 장사되리라’는 아브라함이 살아 있는 동안 이스마엘이 돌이킬 것이고 에서가 아직 악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15:16 ‘사 대 만에’라쉬

    이집트에 가서 세 세대를 지나고 넷째 세대에 돌아옵니다. ‘아모리의 죄악이 차지 않았다’는 하나님이 한 민족의 분량이 차기 전에는 벌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사 27:8).

    15:17 ‘연기 나는 화덕’라쉬

    이 제국들이 게힌놈으로 떨어질 것을 미리 보이신 것이라 풉니다(피르케 드라비 엘리에제르 28).

    15:18 ‘내가 주노니’라쉬

    하나님의 약속은 ‘완료형’으로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4:22).

    16:1 ‘이집트 사람 여종 하갈’라쉬

    하갈은 바로의 딸이었고 사래를 위해 일어난 기적을 보고 ‘내 딸이 다른 이의 여주인이 되느니 이 사람 집의 여종이 낫다’고 했다는 풀이입니다(창세기 라바 45:1).

    16:2 ‘내가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라쉬

    ‘아브네(내가 세워지리라)’는 자식이 없는 사람은 세워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는 사래 안에 있던 성령의 말을 들은 것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5:2).

    16:3 ‘십 년 후에’라쉬

    이는 열 해 동안 자녀가 없는 아내를 둔 남편이 다른 아내를 맞아야 하는 정해진 기간입니다. 가나안 밖에서 산 기간은 포함하지 않는다는 뜻도 됩니다(예바못 64a).

    16:4 ‘여주인을 멸시하더라’라쉬

    하갈이 ‘사래가 속으로는 의로운 척하나 이 오랜 세월 동안 아이를 얻지 못했으니 정말 의로울 리 없다’고 말했다는 풀이입니다.

    16:5 ‘내게 받은 불법’라쉬 · 람반

    라쉬는 ‘내가 받은 해(חמסי)의 벌이 당신에게 있기를’이라 풀고, 아브람이 15:2에서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고 사래가 말한 것이라 풉니다. 또 자신이 멸시받는 것을 들으면서도 침묵하여 보호의 말을 빼앗았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45:5). 람반은 ‘우리의 어머니가 이 학대로 죄를 지었고 아브라함도 이를 허락해서 죄를 지었다’고 밝히며,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이 하갈에게 ‘들나귀 같은’ 아들을 주셔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후손을 온갖 방식으로 괴롭히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16:12 ‘들나귀 같은 사람’라쉬

    광야를 사랑해 사냥을 하는 사람(21:20 ‘활쏘는 자’)이고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며’는 노상강도라는 뜻입니다.

    16:13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라쉬

    ‘엘 로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모욕을 보시는 하나님입니다(창세기 라바 45:10). 하갈이 ‘여기서도 내가 보았구나’ 한 것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늘 천사를 보았다가 광야에서도 보았다는 놀람이라고 풉니다.

    16:15 ‘이스마엘이라 불렀더라’라쉬

    아브람은 천사가 하갈에게 한 말을 듣지 못했는데도 성령이 임해 ‘이스마엘’이라 이름 지었다고 풉니다.

    17:1 ‘전능한 하나님’라쉬

    ‘샤다이’는 ‘그의 신성이 모든 피조물에게 충분한 분’(셰·다이)이라는 뜻으로 풉니다(창세기 라바 46:3). 람반은 ‘엘’과 ‘샤다이’가 각각 독립된 두 이름이라고 하며 이븐 에즈라가 이를 하나의 형용사구로 읽은 것에 반대합니다.

    17:1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행하라’를 ‘나를 섬기는 데 붙어 있어라’로, ‘완전하라’를 내가 주는 모든 시험에서 온전하라는 새 명령으로 풉니다. 미드라쉬는 할례 계명을 지킴으로 완전해지라는 뜻으로 읽습니다(창세기 라바 46:4). 이븐 에즈라는 ‘완전하라’를 ‘할례의 이유를 따지지 말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17:3 ‘엎드렸더니’라쉬

    할례를 받기 전에는 성령이 위에 서 계실 때 두 발로 설 수 없어 엎드렸다고 풉니다. 이방 발람은 같은 이유로 엎드려 말씀을 들었다고 비교합니다.

    17:5 ‘많은 나라의 아버지’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아브(ר)함’의 철자를 말놀이로 풀고, 이전의 ‘ר’는 아브람이 ‘아람(고향)’의 아버지일 뿐임을 뜻했다고 합니다. 이븐 에즈라는 이름이 글자를 덜지 않고 보태는 이름이라 ‘민족들의 큰 아버지’의 뜻이 된다고 풉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וַיִּכְרֹת יְהוָה אֶת־אַבְרָם בְּרִית
    바이크로트 아도나이 에트 아브람 브리트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문자대로는 ‘언약을 자르다’입니다. 언약 의식에서 짐승을 쪼개는 모양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הַבְּתָרִים
    합브타림
    쪼갠 고기들

    짐승을 둘로 가르는 의식(렘 34:18–19)에서 언약 당사자들이 그 사이를 지나며 ‘어기면 이 짐승처럼 되리라’는 자기 저주의 뜻을 지닙니다.

    תַּנּוּר עָשָׁן וְלַפִּיד אֵשׁ
    타누르 아샨 베랍피드 에쉬
    연기 나는 화덕과 타는 횃불

    15:17.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것은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언약의 책임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지십니다.

    לֹא־שָׁלֵם עֲוֹן הָאֱמֹרִי
    로 샬렘 아본 하에모리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5:16. 가나안 정복이 늦어지는 이유를 ‘죄의 분량이 차야 한다’로 설명합니다. 라쉬는 하나님이 민족의 분량이 차기 전에는 벌하지 않으신다고 풉니다.

    הָגָר
    하가르
    하갈

    이집트 사람 여종(16:1)입니다. 이름의 뜻은 ‘이방인’과 비슷한 소리로 읽기도 합니다. 라쉬는 바로의 딸이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5:1).

    פֶּרֶא אָדָם
    페레 아담
    들나귀 같은 사람

    16:12. 자유롭고 거친 광야 사람을 뜻하는 칭호입니다. 욥 39:5–8의 들나귀의 자유와 같은 이미지입니다.

    בְּאֵר לַחַי רֹאִי
    베에르 라하이 로이
    살아 계셔서 나를 보시는 이의 우물

    16:14. 하갈이 하나님께 지은 이름 ‘엘 로이(나를 보시는 하나님)’에서 나온 우물 이름입니다.

    אֵל שַׁדַּי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17:1. ‘샤다이’의 뜻은 불확실합니다. 라쉬는 ‘충분하신 분(שֶׁדַּי)’으로, 학자들은 ‘산의 하나님’ 또는 ‘강한 이’로 읽기도 합니다.

    הִתְהַלֵּךְ לְפָנַי וֶהְיֵה תָמִים
    히트할레크 리파나이 베헤예 타밈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אֶת)’(6:9)했고 아브라함은 ‘내 앞에서(לְפָנַי)’ 행합니다. ‘타밈’은 ‘흠 없는, 한결같은’입니다.

    אַבְרָהָם
    아브라함
    아브라함

    ‘아브(아버지)’ + ‘함몬(무리)’ 중 첫머리를 조합한 말놀이(17:5)로 ‘많은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히브리 배경

    ‘쪼갠 고기 사이의 언약’(15:9–21)은 고대 근동의 조약 의식을 배경으로 합니다. 짐승을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가는 것은 ‘이 약속을 어기면 내가 이렇게 되리라’는 맹세였고, 마리 문서에서는 ‘나귀 새끼를 죽여 조약을 맺는다’는 표현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의식에서 하나님만이 지나가시는 것(15:17)이 본문의 독특한 점입니다. ‘사백 년’(15:13)은 출 12:40의 430년, 행 7:6의 400년, 갈 3:17의 430년과 함께 읽히는 숫자입니다. 하갈 이야기는 고대 근동의 대리모 관습과 맞닿아 있어 누지 문서와 함무라비 법전(144–146조)에 자녀 없는 아내가 여종을 남편에게 주는 규정이 있습니다. 하갈이 도망쳐 샘 곁에서 천사를 만나는 장면은 성경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처음 나오는 대목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15:13)

    ‘400년’은 이삭의 출생부터 출애굽까지로 계산합니다. 출 12:40의 430년은 쪼갠 고기 사이의 언약부터라는 풀이와 맞물려 두 숫자를 조화시키는 전통적 방법입니다.

    람반(16:6)

    사라와 아브라함이 하갈을 학대한 일을 ‘죄’로 규정하고, 이스마엘이 후손을 괴롭히게 된 원인으로 읽습니다. 조상의 허물을 미화하지 않는 비판적 읽기입니다.

    창세기 라바 46:4

    ‘완전하라’를 할례의 계명과 잇는 풀이는 17장 전체를 이 구절의 설명으로 읽는 전통입니다.

    라쉬(15:16)

    ‘아모리의 죄악이 차지 않았다’를 하나님이 한 민족의 죄가 꽉 차기 전에는 벌하지 않으신다는 원칙으로 일반화합니다. 가나안 정복이 이스라엘의 의 때문이 아니라 가나안 민족의 죄 때문이라는 신 9:4–5와 같은 흐름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하갈 사건: 사래와 아브람의 책임
    유대 전승

    람반은 16:6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이 학대로 죄를 지었고 아브라함도 이를 허락해서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라쉬는 사래의 말을 들은 것을 사래 안의 성령의 말을 들은 것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5:2).

    본문 문맥

    16:2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는 3:1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와 같은 히브리어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16:7–12에서 학대받은 하갈을 보시고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고 하십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6:3에서 하갈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다른 사람의 침상에 들여졌다’는 점에서 이 결합이 ‘음행과 결혼의 중간’에 있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덧붙인 인간의 고안은 겉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안에 타락이 있다고 합니다. 16:4에서는 ‘주된 책임은 사래에게, 아브람은 지나치게 쉽게 믿었으므로 하나님이 둘을 마땅하게 징계하신다’고 하고, 16:5에서는 사래의 분노가 아브람을 억울하게 책망한 것이라고 합니다. 16:6에서는 아브람이 아내와 다투지 않고 참은 겸손은 칭찬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1은 한 남자가 한 아내를 두도록 규정합니다.

    평가

    람반과 칼빈이 같은 방향으로 아브라함 가정의 허물을 직접 말합니다. 3:17과의 어휘 반향은 본문이 스스로 이 사건을 ‘아담과 하와의 순서의 반복’으로 암시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라쉬의 ‘사래 안의 성령’ 풀이는 본문이 아니라 사래를 변호하는 미드라쉬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것이 ‘연기 나는 화덕과 타는 횃불’(하나님의 상징)뿐이고 아브람은 지나가지 않았다는 점은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성자의 십자가를 예표’ 같은 말로 곧바로 이어 읽기보다, 먼저 본문의 뜻(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의 짐을 지신다)을 읽으세요.

    15:13의 ‘사백 년’과 출 12:40의 ‘430년’, 행 7:6의 ‘400년’, 갈 3:17의 ‘430년’은 같은 기간의 다른 계산법으로 읽힙니다. 라쉬는 이삭의 출생부터 400년으로 세지만, 어느 시점에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숫자이므로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아랍 민족의 조상’으로 단정하는 것은 후대 전승입니다. 본문은 이스마엘이 ‘모든 형제 앞에 거하리라’(16:12)고 하고 25:12–18에서 열두 지파(방백)의 이름을 적습니다. 이스마엘이 구체적으로 누구의 조상인지는 본문의 범위 안에서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라가 하갈을 학대했다는 점을 람반이 ‘죄’라 부르는 것은 전통 안에서의 자기 비판입니다. 본문은 사라를 변호하지도 비난하지도 않고 ‘학대하매 하갈이 도망했다’고만 적고, 그 뒤 천사가 하갈에게 ‘돌아가라’(16:9)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하나님이 약한 이를 ‘보시는’ 하나님(엘 로이)임을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샤다이’를 ‘전능’으로만 번역하는 것은 전통의 한 갈래입니다. 라쉬는 ‘충분하신 분’, 람반과 이븐 에즈라는 ‘강한’의 뜻으로 읽고, 어원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낱말의 뜻을 하나로 단정해 가르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오늘의 물음

    하나님은 아브람이 잠든 사이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가셨습니다. 내 믿음이 흔들리는 날에도 ‘약속을 지키시는 쪽’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어떤 위로가 됩니까? 사라와 아브람이 ‘기다리지 못해’ 만든 하갈 사건은 내 삶의 어떤 ‘서두름’을 비춥니까?

    7. 안식일(토요일) · 일곱째 낭독 · 창세기 17:7–27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그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십니다. 사래는 사라로, 이삭의 출생이 약속되며, 아브라함은 웃으면서도 이스마엘을 위해 구합니다. 그날로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집안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습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7:7 ‘내 언약을 세우리니’라쉬

    그 언약이란 ‘내가 네 하나님이 되는 것’이라고 풉니다.

    17:8 ‘영원한 기업’라쉬

    그곳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시지만, 이 땅 밖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다고 풉니다(크투봇 110b).

    17:9 ‘너는 내 언약을 지키라’라쉬

    ‘ואתה(그리고 너는)’의 ‘ו’가 17:4의 ‘ואני(나는)’와 짝을 이루어 ‘나는 내 언약을 네게 주고 너는 그것을 지키라’는 대응이 된다고 풉니다. 람반이 이 풀이를 소개합니다.

    17:10 ‘나와 너희 사이’라쉬

    ‘너희’는 복수로, 그때 살아 있는 아브라함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네 후손’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입니다.

    17:12–13 ‘집에서 난 자와 돈으로 산 자’라쉬

    집에서 난 자는 여종이 집에서 낳은 아이, 돈으로 산 자는 태어난 뒤에 산 사람입니다. 둘 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라쉬

    이는 남녀의 구분이 분명한 부위에서 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창세기 라바 46:13). ‘끊어지리라’는 자식 없이 일찍 죽는다는 뜻이고, 법적으로 책임질 나이가 되도록 스스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 해당합니다.

    17:15 ‘사래라 하지 말고’라쉬

    ‘사래’는 ‘나의 공주’라는 뜻이라 나에게만 공주이고, 새 이름 ‘사라’는 모든 이에게 공주가 된다는 뜻입니다(베라코트 13a).

    17: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라쉬

    그 복은 사라가 다시 젊음을 얻는 것(18:12 ‘내가 쇠하였고’)이며, 두 번째 ‘복’은 젖이 풍성하게 나오는 것이라고 풉니다. 이삭의 젖 뗀 날 사람들이 ‘주워 온 아이’라고 비방하자 사라가 사람들의 아이에게도 젖을 먹였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7:17 ‘웃으며’라쉬 · 이븐 에즈라 · 람반

    라쉬는 온켈로스가 아브라함의 웃음은 ‘기뻐했다’로, 사라의 웃음(18:12)은 ‘웃었다’로 옮겨 구분한다고 하며, 아브라함의 질문은 의심이 아니라 놀람을 담은 확신이라고 풉니다. 람반도 온켈로스가 옳다고 합니다. 이븐 에즈라는 노인의 정액이 차가워 불임이라고 보던 옛 의학으로 놀람을 설명합니다.

    17:18 ‘이스마엘이나’라쉬

    ‘나는 이런 상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 이스마엘이나 살게 해 주소서’라는 뜻이며, ‘주 앞에서 살기를’은 ‘주를 경외하며 살기를’이라고 풉니다.

    17:19 ‘이삭이라 하라’라쉬

    이삭은 웃음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풀이와, 열 번의 시험(י), 사라의 90세(צ), 할례 후 여드레(ח), 아브라함의 100세(ק)를 따서 짓는다는 풀이(창세기 라바)를 함께 소개합니다. 언약은 이삭의 후손에게만 이어진다고 합니다.

    17:22 ‘하나님이 올라가시니라’라쉬

    ‘올라가셨다’는 하나님께 더 합당한 표현이며 이로써 의인은 하나님의 병거(수레)라는 것을 배운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7:6).

    17:23 ‘바로 그날에’라쉬

    아브라함은 이방인도 비웃는 자도 두려워하지 않고 밤이 아닌 대낮에 할례를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았다면 막았을 것이라고 원수들이 말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16:16 · 17:25 ‘이스마엘은 십삼 세’라쉬

    이스마엘이 열세 살에 할례를 받으면서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스마엘의 공으로 돌립니다(16:16). 17:25에서 이스마엘에게만 ‘에트’가 붙는 것은, 이미 할례받을 살이 평평해진 아브라함과 달리 아이였던 이스마엘은 포피를 자르고 젖히는 것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47:8).

    히브리어 낱말 공부

    בְּרִית עוֹלָם
    브리트 올람
    영원한 언약

    17:7, 13, 19. 노아의 언약(9:16)에도 쓰였던 표현이며 언약의 ‘영속성’을 강조합니다.

    אֲחֻזַּת עוֹלָם
    아훗자트 올람
    영원한 기업

    17:8. 땅은 ‘소유(아훗자)’로 주어집니다. 라쉬는 ‘이 땅 밖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는 전승을 소개합니다(크투봇 110b).

    מוֹל יִמּוֹל
    몰 임몰
    반드시 할례를 받을 것이니라

    ‘할례하다(מוּל)’를 반복해 강조하는 형태입니다. 17:12–14의 규정(여드레, 집에서 난 자와 돈으로 산 자 포함)이 이어집니다.

    אוֹת בְּרִית
    오트 브리트
    언약의 표징

    17:11. 무지개(9:12), 안식일(출 31:13)처럼 언약마다 보이는 표징이 있습니다.

    וְנִכְרְתָה הַנֶּפֶשׁ הַהִוא
    베니크레타 하네페쉬 하히
    그 영혼이 끊어지리라

    17:14. ‘카레트(끊어짐)’의 뜻은 해석이 갈립니다. 라쉬는 ‘자식 없이 일찍 죽음’으로 풀고, 아버지가 아니라 본인이 할례를 거부할 때 해당한다고 합니다.

    שָׂרָה
    사라
    사라(여주인)

    ‘사래(나의 공주)’에서 ‘사라(공주)’로 바뀝니다. 라쉬는 ‘나에게만 공주였던 이가 모든 이에게 공주가 되었다’고 풉니다.

    וַיִּצְחָק
    바이츠하크
    웃으며

    17: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습니다. 18:12에서 사라도 웃습니다. 이름 ‘이삭(이츠하크)’이 이 웃음에서 나옵니다(17:19).

    לוּ יִשְׁמָעֵאל יִחְיֶה לְפָנֶיךָ
    루 이쉬마엘 이흐예 레파네카
    이스마엘이나 당신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7:18. 아브라함이 이미 있는 아들을 위해 하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도 복 주시되 언약은 이삭을 통해 세우신다고 답하십니다(17:19–21).

    בְּעֶצֶם הַיּוֹם הַזֶּה
    베에쳄 하욤 하제
    바로 그날에

    17:23, 26. 아브라함은 명령을 듣고 지체 없이 ‘바로 그날’ 순종합니다.

    히브리 배경

    할례는 이집트와 서부 셈 지역 여러 문화에 있던 관습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 의미가 언약의 표징으로 바뀝니다. 본문의 특징은 여드레라는 시기, 집에서 태어난 종과 돈으로 산 종까지 포함, 개종자도 받는다는 확장(출 12:48)입니다. 할례를 받은 때가 15:6의 ‘믿음으로 의로 여겨지심’ 이후라는 시간 순서는 롬 4:9–11이 중요하게 읽는 점입니다. 17장은 18장의 사라 방문 이야기와 짝을 이루는 장입니다. 이름이 바뀌는 것은 새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뜻이며, 아브람의 ‘ר’와 사래의 ‘י’ 자리에 같은 ‘ה’가 들어간다는 풀이가 전승에 있습니다. 17:15–19에서 처음으로 ‘이삭’의 이름이 약속되고, 17:21에는 그가 ‘내년 이맘때’ 태어날 것이라는 시점까지 적힙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크투봇 110b · 라쉬(17:8)

    ‘땅 밖에 사는 자는 하나님이 없는 것과 같다’는 가르침은 땅의 약속과 하나님의 임재를 함께 묶는 전통이며, 이스라엘 땅에 대한 유대 전승의 애착의 뿌리입니다.

    베라코트 13a · 라쉬(17:15)

    아브라함을 ‘아브람’이라 부르는 자는 긍정 계명을 어긴다는 가르침이 있으며, 새 이름이 새 정체성의 선언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온켈로스(17:17) · 라쉬

    아브라함의 웃음을 ‘기뻐함’, 사라의 웃음을 ‘웃음(의심)’으로 옮겨 구별하는 것은 두 사람의 반응을 서로 다르게 읽는 번역상의 선택입니다.

    창세기 라바 47:6 · 라쉬(17:2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 올라가셨다’에서 의인이 하나님의 병거(보좌를 싣는 자)라는 가르침을 이끌어 내며, 의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사상으로 이어집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논쟁할례와 세례, 언약의 표징
    유대 전승

    라쉬는 17:8의 ‘영원한 기업’을 ‘땅 밖에 사는 이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크투봇 110b)고 풀고, 17:14의 ‘끊어짐’을 자식 없이 일찍 죽는 것이라고 풉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에게만 이어지는 이삭의 언약(17:19)이라고 합니다.

    본문 문맥

    17:11은 할례를 ‘언약의 표징’이라 하고, 17:12–13은 ‘집에서 난 자와 돈으로 산 자’도 포함합니다. 롬 4:11은 할례를 ‘믿음으로 얻은 의의 인’이라 하고, 골 2:11–12는 그리스도의 할례와 세례를 연결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7:13에서 할례가 ‘영원한 언약’이라 불린 것은 표징이 바뀌어도 그리스도가 중보자시라는 점에서 영속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골 2:11에서 세례를 할례의 자리에 넣었으므로 세례는 할례를 폐하며 오늘 유대인 사이에서 할례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은 오류라고 합니다. 17:14에서는 할례받지 않고 죽은 아이가 해를 입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약속만으로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5는 구약의 성례가 ‘실체에서 신약의 것과 같다’고 하고, 28.4는 ‘믿는 부모의 유아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며, 7.6은 은혜언약이 ‘실체가 다른 두 언약이 아니라 한 언약의 다른 시행’이라고 합니다.

    평가

    17:12–13의 ‘집안 전체(유아 포함)’와 롬 4:11의 ‘인’, 골 2:11–12의 연결이 개혁신학의 유아세례 논증의 근거이고, 침례교는 이 근거를 달리 읽으며 유대교는 할례를 지금도 영속하는 언약의 표징으로 지킵니다. 이 대목은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할례의 규정과 범위)과 그 이행의 신학적 결론(세례의 대체)을 구별해서 가르치세요.

    수용17:17 아브라함의 웃음
    유대 전승

    온켈로스는 아브라함의 웃음을 ‘기뻐했다’로, 사라의 웃음(18:12)을 ‘웃었다’로 옮겨 구분합니다(라쉬 소개). 라쉬는 이 질문이 의심이 아닌 확신을 담은 놀람이라고, 이븐 에즈라는 옛 의학의 불임 상식으로 놀람을 설명합니다.

    본문 문맥

    17:17은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이고, 17:18은 ‘이스마엘이나 주 앞에 살기를’입니다. 롬 4:19–20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약해지지 않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7:17에서 엎드림은 경배와 믿음의 표시이고 웃음은 ‘불신이 아니라 뜻밖의 일에 기쁨과 놀람이 섞인 것’이라고 하며, ‘기쁨뿐’이라는 견해에는 반대하고 ‘놀라 당황한 것’이라고 봅니다. 롬 4:19를 근거로 ‘이 놀람은 믿음을 막지 않았고 오히려 믿음의 힘이 더 밝게 빛났다’고 풉니다.

    평가

    온켈로스·라쉬·칼빈이 모두 ‘불신이 아님’에 동의합니다. 칼빈은 온켈로스의 ‘기쁨’만으로 읽지 않고 ‘놀람’을 더해 17:18의 이스마엘 간구까지 설명합니다. 본문의 긴장(웃음과 간구)을 있는 그대로 두면서 롬 4장의 평가를 받는 읽기입니다.

    논쟁‘영원한 언약’과 ‘영원한 기업’
    유대 전승

    라쉬와 크투봇 110b는 땅이 하나님의 임재와 묶인 ‘영원한 기업’이며 땅 밖의 삶은 그에 못 미친다고 봅니다.

    본문 문맥

    17:7–8은 ‘영원한 언약(브리트 올람)’과 ‘영원한 기업(아훗자트 올람)’을 함께 말합니다. 롬 4:13은 아브라함이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을 말하고, 히 11:9–16은 아브라함이 더 나은 본향을 바랐다고 합니다.

    개혁신학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5–6은 은혜언약이 율법 아래에서는 모형·제사·할례 등으로, 복음 아래에서는 말씀과 성례로 ‘한 언약의 다른 시행’으로 베풀어지며 ‘실체가 다른 두 언약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읽기에서 땅의 약속은 언약 전체의 모형적 면과 함께 읽습니다.

    평가

    땅의 약속과 언약의 영속성을 어떻게 읽는지는 개혁신학 안에서도, 그리고 이스라엘과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가장 논쟁적인 신학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칸에서는 본문이 말하는 것(17:7–8, 영원한 언약과 영원한 기업)과 웨스트민스터의 ‘한 언약’ 틀, 그리고 신약의 확장(롬 4:13, 히 11:9–16)이 서로 다른 층위임을 알려 드리는 데 그칩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할례를 받은 때가 15:6의 ‘믿음으로 의로 여겨짐’ 뒤라는 점은 창세기 본문의 순서 그대로입니다. 롬 4:9–11은 이 순서를 근거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의롭다 함을 받았음을 말합니다. 반면 유대 전승은 할례를 ‘완전해지는 길’(17:1)로 읽습니다. 두 읽기가 같은 본문 순서를 서로 다르게 활용합니다.

    아브라함의 웃음(17:17)을 불신으로만 읽는 것은 본문이 열어 둔 가능성 하나입니다. 온켈로스는 ‘기뻐함’으로, 라쉬는 의심이 아닌 놀람으로 읽지만, 17:18의 ‘이스마엘이나’라는 간구에는 약속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롬 4:19–20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고 해석합니다. 본문의 긴장을 어느 한쪽으로 풀기 전에 이 세 읽기를 함께 두세요.

    ‘영원한 언약’과 ‘영원한 기업’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땅 소유와 신약 이후의 읽기에 이어지는지는 신학적으로 논쟁적입니다. 본문은 땅의 약속을 ‘언약’(브리트)과 ‘할례’에 연결해 말하며, 이 연결의 깊이는 오경 후반과 예언서(렘 31, 겔 36)와 신약(롬 11)까지 함께 읽어야 드러납니다.

    할례를 ‘위생을 위한 것’으로 보는 설명은 본문에 없습니다. 본문은 언약의 표징(오트 브리트)으로만 규정하며, 모세 오경은 후에 ‘마음의 할례’(신 10:16, 30:6)로 의미를 확장합니다.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지만 언약은 ‘이삭과’ 세워진다(17:21)는 구분을 본문이 분명히 합니다. 이는 어느 한쪽을 폄하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도 복(17:20)과 약속을 주신다는 두 사실을 함께 읽게 합니다.

    오늘의 물음

    아브라함은 99세에 ‘바로 그날’ 할례를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뒤 ‘내일’로 미루는 일이 내게 있습니까? 이스마엘을 위해 ‘그가 주 앞에서 살게 하소서’ 하고 구한 아브라함처럼, 내가 중보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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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와 읽는 법

    • 토라 두루마리 사진: CC0 — Wikimedia Commons

    성경 본문과 구절 번호는 개역개정 기준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번호가 다른 곳은 개역개정 번호로 옮겼습니다. 이 글에 적은 성경 참조는 모두 개역개정에 있는 구절인지 확인했습니다. 유대 전승의 인용은 세파리아(Sefaria)의 영어 번역본을 읽고 한국어로 옮긴 공부용 소개이며,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과 전승이 덧붙인 것은 「바로잡기」 칸에서 갈랐습니다.

  • 토라포션 1주 브레시트: 태초에 — 창세기 1:1–6:8을 히브리어·유대 전승·개혁신학으로 읽다

    토라포션 1주 브레시트: 태초에 — 창세기 1:1–6:8을 히브리어·유대 전승·개혁신학으로 읽다

    토라포션 1주 · 창세기 1:1–6:8

    브레시트(בְּרֵאשִׁית) — ‘태초에, 처음에’. 토라의 첫 낱말이자 첫 편의 이름입니다. 이 한 주에 창조·에덴·타락·가인과 아벨·노아 직전까지가 들어 있습니다.

    창세기 라바 1:10은 왜 세상이 ‘ב(베트)’로 시작했는지 묻습니다. ב는 뒤·위·아래가 막히고 앞만 열려 있어서, ‘창조 이전과 위·아래를 캐묻지 말고 창조된 날부터 이후를 탐구하라’는 뜻이라고 풉니다.

    이번 주 일곱 날의 구성: ① 엿새의 창조와 안식일(1:1–2:3) → ② 둘째 이야기, 에덴과 첫 계명(2:4–19) → ③ 여자와 뱀, 타락(2:20–3:21) → ④ 쫓겨남, 가인과 아벨(3:22–4:18) → ⑤ 라멕과 문명의 시작(4:19–22) → ⑥ 라멕의 노래, 셋과 에녹(4:23–5:24) → ⑦ 노아의 탄생과 홍수 직전(5:25–6:8).

    하프타라는 이사야 42:5–43:10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신 이’(42:5)로 시작하여 창조 이야기와 짝을 이룹니다.

    토라 두루마리 근접 사진
    토라 두루마리. (CC0 · Wikimedia Commons)

    이번 주 읽는 순서

    유대 회당은 한 주에 한 편(파라샤)을 일곱 번에 나누어 읽습니다. 안식일에는 일곱 번째를 마치고 예언서(하프타라)를 읽습니다. 날짜는 올해(5787년) 이스라엘 밖(디아스포라) 일정입니다.

    요일 날짜 낭독 범위
    일요일 10월 4일 첫째 낭독 · 리숀 창세기 1:1–2:3
    월요일 10월 5일 둘째 낭독 · 셰니 창세기 2:4–19
    화요일 10월 6일 셋째 낭독 · 슐리쉬 창세기 2:20–3:21
    수요일 10월 7일 넷째 낭독 · 르비이 창세기 3:22–4:18
    목요일 10월 8일 다섯째 낭독 · 하미쉬 창세기 4:19–22
    금요일 10월 9일 여섯째 낭독 · 쉬쉬 창세기 4:23–5:24
    안식일(토요일) 10월 10일 일곱째 낭독 · 슈비이 창세기 5:25–6:8

    마프티르(안식일 마지막 낭독 반복): 창세기 6:5–6:8 · 하프타라(예언서 낭독): 이사야 42:5–43:10

    인용 읽는 법 · 용어 설명

    라쉬(Rashi) — 11세기 프랑스의 랍비 슐로모 이츠하키(1040–1105). 토라 전체에 주석을 단 사람입니다. 평이한 뜻(페샤트)을 먼저 쓰고, 필요하면 옛 미드라쉬를 인용합니다.

    람반(Ramban) — 13세기 스페인의 랍비 나흐마니데스. 라쉬를 존중하되 자주 반론하고 깊은 신학을 다룹니다. 이븐 에즈라 — 12세기 스페인의 문법학자·주석가로 평이한 뜻과 문법에 밝습니다.

    미드라쉬 — 고대 랍비들이 성경을 풀어 낸 해석 문헌의 종류입니다(‘창세기 라바’, ‘탄후마’, ‘시프라’ 등). 본문에 없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설교가 많아, 라쉬의 ‘(창세기 라바 36:7)’은 “이 풀이는 미드라쉬에서 옴”이라는 표시입니다.

    탈무드 · 미쉬나 — 미쉬나(2세기 초)와 그 토론인 게마라(5세기경)를 합한 책이 탈무드입니다. ‘산헤드린 108b’는 한 논문 책의 쪽수 표기입니다(a=앞면, b=뒷면).

    온켈로스 · 탈굼 — 토라를 아람어로 옮긴 번역(탈굼)입니다. 번역자의 해석이 섞여 있어 ‘가장 오래된 주석’으로도 읽습니다.

    바로잡기 — 본문이 말하는 것과 전승이 덧붙인 것을 가르기 위한 칸입니다. 전승 인용은 영어 번역본(세파리아)을 읽고 한국어로 옮겼으므로, 중요한 곳은 원문과 대조해 확인해 주세요.

    이 글의 차례

    1. 일요일 · 창세기 1:1–2:3
    2. 월요일 · 창세기 2:4–19
    3. 화요일 · 창세기 2:20–3:21
    4. 수요일 · 창세기 3:22–4:18
    5. 목요일 · 창세기 4:19–22
    6. 금요일 · 창세기 4:23–5:24
    7. 안식일(토요일) · 창세기 5:25–6:8

    1. 일요일 · 첫째 낭독 · 창세기 1:1–2:3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엿새 동안 지으시고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뒤, 일곱째 날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1:1 ‘태초에’라쉬

    랍비 이삭은 토라가 율법책이면 첫 계명(출 12:2, 이 달이 너희에게 달의 시작이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대답은 시 111:6, 곧 하나님이 땅을 지으시고 마음대로 누구에게나 주실 수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을 빼앗았다고 비난받을 때를 위한 대답입니다(야콜 쉼오니).

    1:1 ‘태초에 창조하시니라’라쉬

    ‘이 구절은 설명을 크게 외친다’고 하며 두 풀이를 줍니다. 랍비들의 풀이는 세상이 토라(잠 8:22 ‘그의 길의 처음’)와 이스라엘(렘 2:3 ‘그의 소산의 처음’)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자대로 읽으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 땅이 혼돈하고…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1:1 ‘엘로힘’라쉬

    창조 때 쓰인 이름이 ‘여호와’(자비)가 아니라 ‘엘로힘’(심판자)인 것은, 처음에 하나님이 세상을 엄한 정의로 세우시려 했으나 그렇게는 존속할 수 없음을 아시고 자비를 앞세워 정의와 함께 두셨기 때문이라고 풉니다.

    1:1 ‘무에서 창조’람반 · 이븐 에즈라

    람반은 이 구절을 ‘무에서의 창조’로 받아들입니다. 이븐 에즈라는 ‘바라’가 곧 ‘무에서 만들다’를 뜻한다고 단정하지 않는다고 하며, 대부분의 주석가가 그렇게 풀지만 근거가 문법만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1:2 ‘운행하시니라’라쉬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가 공중에 떠서, 비둘기가 둥지 위를 맴돌듯 물 위를 운행했다고 풉니다. 이븐 에즈라는 ‘루아흐’를 바람으로 보아 땅을 말리는 도구라고 읽습니다.

    1:4 ‘빛을 나누사’라쉬 · 하기가 12a

    ‘하나님이 빛이 좋았다’ 다음에 ‘나누셨다’가 나오는 것을 두고, 악인이 쓰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보시어 첫날의 빛을 의인을 위해 ‘감추셨다’고 풉니다. 이븐 에즈라는 ‘나누셨다’가 물리적 분리가 아니라 ‘낮·밤이라 이름 붙이셨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1:6–8 ‘궁창’라쉬

    하늘은 첫날에 창조되었으나 유동적이던 것이 둘째 날 하나님의 꾸짖음으로 굳었다고 풉니다. 둘째 날에는 ‘좋았더라’가 없는데, 물을 가르는 일이 다툼의 시작이어서라고 풉니다. ‘하늘(샤마임)’은 ‘물을 지고 오라’, ‘거기 물이 있다’, ‘불과 물’로 읽는 말놀이로도 소개됩니다(하기가 12a).

    1:14 ‘광명체’라쉬

    해·달·별은 첫날에 이미 지어졌으나 넷째 날 궁창에 걸리도록 명하셨다고 풉니다(하기가 12a). ‘메오로트’의 철자(ו 없이 쓴 מארת)는 ‘저주(מארה)’로도 읽혀, 이 날을 위험한 날로 보았다고 합니다. ‘징조와 절기와 날과 해’는 장차 이스라엘이 받을 절기 계산을 내다본 것이라고도 풉니다.

    1:16 ‘큰 광명체’라쉬 · 훌린 60b

    해와 달이 같은 크기로 지어졌으나 달이 ‘두 왕이 한 왕관을 쓸 수 없다’고 항의하여 작아졌다고 합니다. 본문은 단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라고 적습니다.

    1:26 ‘우리가 만들자’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하나님이 천사들과 의논하신 것이라 풉니다. 사람이 천사를 닮았으니 시기할 수 있어 미리 의논하신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겸손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단이 ‘복수’를 빌미 삼을 수 있어도 본문은 겸손의 가르침을 감추지 않는다고 덧붙입니다. 이븐 에즈라는 ‘나아세’를 수동분사로 읽는 견해도 소개합니다.

    1:26 ‘다스리게’라쉬

    ‘ירדו’는 ‘다스리다’와 ‘내려가다’의 두 뜻이 있어, 합당하면 짐승을 다스리고 합당하지 않으면 짐승보다 낮아져 다스림을 당한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1:27 ‘남자와 여자’라쉬

    이 구절과 2:21(갈빗대)의 긴장을, 처음에 두 얼굴로 지으셨다가 나누셨다는 미드라쉬로 풉니다. 같은 라쉬가 2:21에서 ‘갈빗대’를 ‘옆구리’(두 면)로 풉니다.

    1:31 ‘여섯째 날’라쉬 · 샤밧 88a

    ‘여섯째 날’에만 정관사 ‘ה(5)’가 붙은 것을, 창조가 이스라엘이 다섯 권의 토라를 받는다는 조건 위에 서 있다는 암시로 풉니다.

    2:2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라쉬

    랍비 시므온은 살과 피의 인간은 정확한 시각을 몰라 자기 날에 시간을 보태야 하지만, 하나님은 때를 정확히 아시므로 일곱째 날 ‘바로 그 순간’ 일을 마치신 것으로 쓰였다고 풉니다. 이븐 에즈라는 ‘마치셨다’가 금요일 일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2:3 ‘복 주사 거룩하게’라쉬

    ‘복’은 만나로 주어졌다고 풉니다. 평일에는 한 오멜, 여섯째 날에는 두 배가 내리는 복입니다. ‘거룩하게’도 만나로 했다고 합니다. 이븐 에즈라는 복이 안식일에 몸에는 생식력의 새로워짐을, 영혼에는 지성의 더함을 준다고 풉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בְּרֵאשִׁית
    브레쉬트
    태초에·처음에

    ‘로쉬(머리)’에서 나온 낱말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 대개 ‘…의 처음’이라는 연결형으로 쓰이기에 라쉬는 문법으로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시작하신 때에’로도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בָּרָא
    바라
    창조하다

    이 동사의 주어는 성경에서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재료로 만들다’는 עָשָׂה(아사)와 구분해서 쓰입니다. 다만 ‘무에서’라는 뜻이 이 낱말에서 곧바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이븐 에즈라는 짚습니다.

    תֹהוּ וָבֹהוּ
    토후 바보후
    형체 없고 비어 있는

    라쉬는 ‘놀랄 만큼 텅 빈’으로 풉니다. 두 낱말의 소리 놀이가 ‘혼돈’을 들려줍니다.

    רוּחַ אֱלֹהִים מְרַחֶפֶת
    루아흐 엘로힘 메라헤페트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니라

    ‘메라헤페트’는 어미 독수리가 새끼 위를 ‘맴돌다’(신 32:11)와 같은 낱말입니다. ‘루아흐’는 영·바람·숨의 세 뜻이 겹칩니다.

    רָקִיעַ
    라키아
    궁창

    ‘두드려 펴다(רקע)’에서 온 말입니다. 대장장이가 쇠를 얇게 두드려 펴듯 하늘을 펼쳐 놓았다는 그림입니다.

    נַעֲשֶׂה אָדָם בְּצַלְמֵנוּ כִּדְמוּתֵנוּ
    나아세 아담 베찰메누 키드무테누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첼렘(형상)’은 조각된 상, ‘드무트(모양)’는 닮음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바로잡기 참고).

    וַיִּשְׁבֹּת
    바이쉬보트
    쉬셨다(그치셨다)

    ‘샤바트’의 뿌리 ש־ב־ת는 ‘일을 그치다’입니다. ‘피곤해서 쉬다’가 아니라 ‘일을 마치고 멈추다’에 가깝습니다.

    יוֹם אֶחָד
    용 에하드
    첫째 날(문자대로는 ‘하루’)

    둘째 날부터는 서수 ‘둘째’ ‘셋째’인데 여기만 기수 ‘하나’입니다. 라쉬는 ‘그날 하나님이 홀로 세상에 계셨기 때문’이라고 풉니다.

    히브리 배경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에서 세상은 신들의 싸움에서 나옵니다. 마르둑이 바다 여신 티아마트를 쪼개 하늘과 땅을 만듭니다. 창세기의 ‘깊음(תְּהוֹם 테홈)’은 이 이름과 소리가 닮았지만 여기서는 신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물일 뿐입니다. 해와 달에도 ‘샤마쉬·야레아흐’(해·달 신의 이름)를 쓰지 않고 ‘큰 빛·작은 빛’이라 부릅니다.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등불’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한 것도 당시에는 왕에게만 쓰던 표현을 모든 사람에게 돌린 것입니다. 구조도 눈에 띕니다. 첫 사흘은 ‘형태를 만드는 날’(빛과 어둠, 하늘과 물, 땅과 식물)이고 나머지 사흘은 그 안을 ‘채우는 날’(해·달·별, 새·물고기, 짐승과 사람)입니다. 일곱 날로 이루어진 주(週)는 고대 근동의 어떤 문화에서도 자연의 주기에서 나오지 않는, 창조 이야기에서 나온 독특한 시간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1:1) · 창세기 라바

    처음부터 시작하는 이유를 두 갈래로 대답합니다. 하나는 땅이 하나님의 것이어서 누구에게 주시든 자유라는 것(가나안 정복 변호)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이 토라와 이스라엘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람반 · 이븐 에즈라(1:1)

    ‘무에서 창조’를 두고 람반은 분명히 받아들이지만 이븐 에즈라는 ‘바라’라는 낱말만으로는 증명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같은 전승 안에서도 이 교리의 근거에 대한 의견이 다릅니다.

    창세기 라바 1:10

    세상이 ‘ב’로 시작한 이유를, 창조 이전과 위·아래를 캐묻지 말라는 경고로 읽습니다.

    하기가 12a · 라쉬(1:4)

    첫날의 빛이 의인을 위해 감추어졌다는 전승은 이후 ‘장차 올 세상의 빛’ 사상의 뿌리가 됩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보완‘무에서의 창조’를 낱말 하나로 증명할 수 있나
    유대 전승

    라쉬는 ‘브레쉬트’를 연결형으로 읽어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로도 풉니다. 람반은 ‘무에서’를 분명히 받아들이지만, 이븐 에즈라는 ‘바라’라는 낱말만으로는 그 뜻이 증명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본문 문맥

    1:1은 천지의 시작을 말합니다. ‘무에서’라는 교리는 시 33:9(말씀하시니 이루어졌다), 롬 4:17(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히 11:3(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았다)을 합쳐서 읽을 때 분명해집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창 1:1에서 ‘만들다(야짜르)’가 아니라 ‘창조하다(바라)’가 쓰였으므로 ‘세상은 무에서 만들어졌다’고 결론짓고, 영원한 질료를 말하는 이들을 배격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1은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되 엿새 동안’이라 하고, 벨직 신앙고백 12조도 ‘무에서’라고 합니다.

    평가

    교리의 방향은 람반과 개혁신학이 같습니다. 다만 칼빈의 ‘바라 대 야짜르’ 논증은 낱말 하나에 무게를 너무 싣는다는 점에서 이븐 에즈라의 지적이 정확합니다. 교리는 이 한 낱말이 아니라 여러 본문이 함께 받쳐 줍니다.

    구분‘엘로힘(복수형)’과 ‘우리가 만들자’를 삼위일체의 증거로 쓸 수 있나
    유대 전승

    라쉬는 ‘우리가 만들자’를 하나님이 천사들과 의논하신 겸손으로 풉니다. 이븐 에즈라는 ‘엘로힘’을 존칭의 복수로 봅니다.

    본문 문맥

    1:2(하나님의 영), 1:3(하나님이 이르시되)은 창조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영과 말씀이 함께 일하심을 보입니다. 신약은 이를 요 1:1–3, 골 1:16으로 풉니다. ‘엘로힘’의 복수는 문법만으로는 하나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1:26에서 하나님이 땅이나 천사와 의논하셨다는 유대 풀이를 물리치고, ‘존엄의 복수’ 설도 그런 어법이 당시에 없었다며 물리칩니다. 그는 ‘하나님은 밖의 조언자를 부르지 않으시니 신격 안에 구별이 있음을 안다’고 하여 위격의 복수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1:1의 ‘엘로힘’에서는 반대로, 복수 명사로 삼위일체를 증명하려는 억지 풀이를 삼가라고 경고합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사벨리우스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평가

    1:26은 신격 안의 의논으로 읽는 것이 본문과 신약 전체 맥락에 맞는다는 것이 칼빈의 판단이고, 1:1의 복수형 하나로 교리를 증명하려는 설교는 칼빈 자신이 말렸습니다. 두 곳을 구별하세요.

    수용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유대 전승

    라쉬는 ‘형상’을 우리의 유형, ‘모양’을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으로 풉니다(1:26). 이 형상을 따로 지으신 손길의 결과로 보기도 합니다(1:27).

    본문 문맥

    1:26–28, 5:1–3, 9:6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하나님의 형상에 둡니다. 신약은 새 사람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는 것(엡 4:24, 골 3:10)을 형상의 회복으로 말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형상과 모양을 구별하지 않고, 형상을 몸에서 찾는 견해를 물리치며, 그 중심을 ‘의와 참된 거룩’(골 3:10, 엡 4:23)과 마음·지성에 두고, 이 형상이 타락으로 지워졌다가 중생으로 회복된다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0문은 ‘지식과 의와 거룩, 피조물을 다스림’이라 하고, 신앙고백 4.2는 ‘지식, 의, 참된 거룩’이라 합니다.

    평가

    라쉬가 말하는 ‘분별하는 지력’은 개혁신학의 ‘지식’ 면과 겹칩니다. 개혁신학은 여기에 ‘의와 거룩’이라는 도덕적 면과 ‘타락으로 훼손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다’는 구속사적 면을 더합니다. 본문의 인간론(5:1–3과 9:6의 이어짐)을 더 길게 따라가는 읽기입니다.

    구분안식일은 이스라엘의 계명인가, 창조의 질서인가
    유대 전승

    라쉬는 2:3의 ‘복 주사 거룩하게’를 만나(출 16장)로 풉니다. 평일에는 한 오멜, 여섯째 날에는 두 배가 내리는 복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읽기입니다. 이븐 에즈라는 안식일에 몸과 영혼이 새로워진다고 봅니다.

    본문 문맥

    2:2–3은 ‘이스라엘’이라는 말 없이 창조의 완성에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적습니다. 출 20:8–11은 이 창조의 틀 위에서 계명을 줍니다. 막 2:27(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히 4:9–10(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이 신약의 빛입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2:3에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따로 구별하신 것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이며, 엿새 동안 지으신 것도 하나님이 시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일을 묵상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7은 안식일을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묶는 영속적 도덕 계명’으로 보고, 부활 이후에는 한 주의 첫날(주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평가

    본문 2:3만 보면 이스라엘에 한정하지 않는 창조 질서로 읽는 쪽이 문맥에 가깝습니다. 다만 ‘토요일에서 주일로 옮겨졌다’는 부분은 창세기가 아니라 신약 증거에 의존한 신학적 결론이며, 유대교와 안식교와의 쟁점이 되는 자리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과 그 이행의 근거를 구분해서 가르치세요.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엘로힘’이 복수형이고 ‘우리가 만들자’가 복수라서 삼위일체의 증거라는 주장은 문법만으로는 서지 않습니다. 이븐 에즈라는 엘로힘이 존칭의 복수라고 봅니다. 라쉬도 이 복수 때문에 이단이 오해할 소지가 있음을 알면서 천사와의 의논으로 풉니다. 기독교는 신약의 빛에서 이 구절을 읽지만, 본문 자체의 문법만으로 논증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엿새’의 ‘날(욤)’이 24시간인지는 본문이 결정하지 않습니다. 1:5에서 ‘욤’은 낮(빛이 있는 시간)을, 2:4는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신 날에’라고 하여 창조 전체를 ‘한 날’이라 부릅니다. 같은 낱말이 문맥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므로, 하나의 길이로 단정하는 것은 본문 이상의 주장입니다.

    달이 항의하여 작아졌다(훌린 60b)는 이야기, 첫날 빛이 감추어졌다는 이야기, 두 얼굴의 아담은 모두 본문에 없는 미드라쉬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큰 빛과 작은 빛’이라는 이름의 담담함입니다.

    오늘의 물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1:31). 오늘 내가 손으로 한 일에 이 말씀을 붙일 수 있습니까? 안식일은 무엇을 ‘마친’ 뒤에 오는 쉼입니까?

    2. 월요일 · 둘째 낭독 · 창세기 2:4–19

    두 번째 창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고 에덴에 두시며 첫 계명을 주시고,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2:4 ‘천지의 내력’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이것들’이 앞에서 말한 것들이고, 천지의 모든 산물이 첫날에 창조되었다는 증거라고 풉니다. 이븐 에즈라는 ‘톨도트’를 ‘하늘과 땅이 낳은 것(나무·생물)의 이야기’로 읽고, ‘만드신 날’의 ‘아사’를 ‘최종 모양으로 정하다’로 풉니다.

    2:5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라쉬

    비가 없었던 이유는 땅을 갈 사람이 없어 비의 쓸모를 아는 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와서 비가 필요함을 깨닫고 기도하자 비가 내리고 풀이 났다고 풉니다.

    2:6 ‘안개’라쉬

    깊음을 올리고 구름에 물을 채워 흙을 적셨고 그러고 나서 사람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빵 굽는 이가 물을 먼저 붓고 반죽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2:7 ‘흙으로 빚으시고’라쉬

    흙을 땅의 사방에서 모았으니 어디서 죽어도 땅이 그를 받아 장사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몸은 땅의 것으로, 영혼은 하늘의 것으로 지어졌다고 봅니다. ‘생령’은 짐승에게도 쓰이지만 사람의 영은 이해와 말을 받은 가장 높은 영이라고 합니다.

    2:7 ‘코에 불어넣으시니’람반

    여기서 하나님의 완전한 이름(여호와 엘로힘)이 쓰인 것은 영혼의 우월함과 근원을 가리키는 암시라고 풉니다.

    2:8 ‘동방의 에덴’라쉬 · 람반

    라쉬는 ‘에덴의 동쪽에 동산을 만드셨다’고 풉니다. 람반은 온켈로스가 ‘미케뎀’을 ‘이전에’로 옮겼음을 소개하며,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동산이 있었다는 읽기도 있음을 알립니다.

    2:9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람반 · 이븐 에즈라

    람반은 생명나무가 ‘동산 가운데’라고 적히고 선악과는 그렇게 적히지 않은 점을 주목합니다. 이븐 에즈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지식, 곧 선악의 지식’을 뜻하는 이름이라고 풉니다.

    2:11 ‘비손’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비손을 나일 강이라 풀고 이름을 ‘넘쳐 흐르다(פשו)’에서 찾습니다. 이븐 에즈라는 사아디야 가온의 같은 풀이에 반대합니다. 또 라쉬는 구스와 앗수르가 당시에는 나라 이름이 아니었으나 훗날의 이름으로 적은 것이라고 합니다(크투봇 10b).

    2:15 ‘두어’라쉬

    하나님이 사람을 ‘부드러운 말로 데려다’ 동산에 들게 하셨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16:5). 이븐 에즈라는 ‘경작하다’는 물을 주는 일, ‘지키다’는 보살피는 일이라고 봅니다.

    2:17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람반

    ‘먹는 그때에 죽을 자로 정해진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사람은 곧바로 죽지 않았으나 죽음의 선고가 그때부터 적용되었다는 읽기입니다.

    2:18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쉬 · 람반

    라쉬는 하늘에서 홀로 계신 분이 하나님 한 분이고 땅에서 홀로 있는 이가 사람 하나라면 ‘두 신이 있다’는 말이 나올 수 있어 짝을 주셨다고 풉니다. 람반은 사람이 홀로 지내라고 창조되지 않았고 모든 생물이 암수로 창조되었음을 짚습니다.

    2:18 ‘돕는 배필’라쉬 · 예바못 63a

    ‘크네그도(마주하여)’는 합당하면 도움이 되고 합당하지 않으면 대적하여 싸운다는 뜻으로 풉니다.

    2:19 ‘들짐승과 공중의 새’라쉬

    새도 땅(습지)에서 지어졌다고 풉니다. ‘아담이 부르는 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는 문장은 순서를 뒤집어 읽으면 이름이 영원히 그것의 이름이 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תּוֹלְדוֹת
    톨도트
    내력·계보

    ‘얄라드(낳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창세기를 열 번 가르는 구조 표지로, 여기가 첫 번째(2:4)입니다. 이어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7:2에 나옵니다.

    אָדָם / אֲדָמָה
    아담 / 아다마
    사람 / 땅(흙)

    2:7은 ‘흙(아다마)으로 사람(아담)을 지었다’는 소리 놀이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곧 ‘흙의 사람’입니다.

    וַיִּיצֶר
    바이쩨르
    빚으시고

    도공이 흙을 빚는 동사입니다. 철자에 ‘י’가 둘 있어, 라쉬는 이 세상을 위한 한 번과 부활을 위한 한 번, 두 번의 빚으심으로 풉니다.

    נִשְׁמַת חַיִּים · נֶפֶשׁ חַיָּה
    니쉬마트 하임 · 네페쉬 하야
    생기 · 생령

    ‘네페쉬’는 ‘영혼’이기보다 ‘숨 쉬는 존재, 생명 있는 존재’입니다. 같은 낱말이 짐승에게도 쓰입니다(1:20).

    גַּן־עֵדֶן
    간 에덴
    에덴 동산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으로 읽히기도 하고, 아카드어 ‘에디누(평원)’와 관련짓는 견해도 있습니다.

    לְעָבְדָהּ וּלְשָׁמְרָהּ
    레오브다 울르샤므라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아바드(섬기다)’와 ‘샤마르(지키다)’는 성막에서 레위인이 하는 일을 가리키는 짝(민 3:7–8)이기도 합니다. 동산을 성소처럼 읽게 하는 단서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מוֹת תָּמוּת
    모트 타무트
    반드시 죽으리라

    동사를 겹쳐 강조하는 형태입니다. ‘죽음이 시작된다’는 뜻으로 읽는 풀이(람반)가 있습니다.

    עֵזֶר כְּנֶגְדּוֹ
    에제르 크네그도
    그에게 맞는 돕는 짝

    ‘에제르’는 시편에서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쓰여(시 33:20) 낮은 지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크네그도’는 ‘그와 마주 보는’입니다.

    히브리 배경

    2:4 이하는 앞 이야기와 시선이 달라집니다. 1장은 우주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하나님을 ‘엘로힘’이라 부르며, 2장은 땅 위 한 사람과 동산에 가까이 서서 ‘여호와 엘로힘’이라 부릅니다. 학자들은 이를 서로 다른 출처로 설명하기도 하고, 같은 이야기를 넓게 본 뒤 좁혀서 다시 보는 구성으로 읽기도 합니다. 에덴은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의 동산’ 이미지와 닿아 있습니다. 두 강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는 알려진 강이고 비손과 기혼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동산 안에서 하나님이 ‘거니시는’(3:8) 모습, 사람의 ‘경작하고 지키는’ 일, 동쪽 문을 지키는 그룹은 훗날 성막·성전의 모습과 겹칩니다. 에덴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는 원형의 성소라는 읽기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2:7)

    ‘바이쩨르’의 ‘י’가 둘인 것을 이 세상의 몸과 부활을 위한 몸이라는 두 번의 빚으심으로 풉니다. 동물의 ‘바이쩨르’는 ‘י’가 하나인 것과 대비시킵니다.

    라쉬(2:5)

    비가 오지 않은 것은 사람이 비의 쓸모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풀이는,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여 은혜를 주신다는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예바못 63a · 라쉬(2:18)

    ‘돕는 짝’이 되는지 ‘대적’이 되는지는 하기에 달렸다는 풀이는 결혼 관계의 책임을 말하는 전승입니다.

    람반(2:17)

    죽음의 선고가 ‘먹는 날’에 내려졌다는 풀이는 삶 속에서 죽음이 시작된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구분첫 계명과 ‘행위언약’이라는 이름
    유대 전승

    람반은 2:17의 ‘먹는 날에 죽으리라’를 ‘먹는 그때 죽을 자로 정해진다’고 풉니다. 유대 전승에는 ‘행위언약’이라는 틀이 없고, 이 계명은 선악과를 금한 하나의 명령으로 읽습니다.

    본문 문맥

    2:16–17은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 것, 그리고 죽음의 경고를 줍니다. 창세기 본문에는 ‘언약’이라는 낱말이 이 자리에 없습니다. 호 6:7(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은 번역이 갈리는 구절이고, 롬 5:12–21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말합니다.

    개혁신학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2는 ‘첫 언약은 행위언약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후손에게 완전하고 인격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이 약속되었다’고 하고, 4.2는 마음에 새겨진 율법 외에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평가

    ‘행위언약’은 2:16–17의 명령·약속·경고와 롬 5장의 대표성을 합쳐 후대 신학이 붙인 이름입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조건, 경고, 이후 생명나무에서 차단되는 3:22–24)과 신학적 종합을 구별해서 가르치세요.

    수용결혼의 질서
    유대 전승

    라쉬는 ‘돕는 배필(에제르 크네그도)’을 ‘합당하면 도움, 합당하지 않으면 대적’으로 풉니다(예바못 63a). 또 하나님이 홀로 계신 분이 둘이 되지 않게 하려고 짝을 주셨다고도 봅니다.

    본문 문맥

    2:18은 ‘돕는 배필’, 2:24는 ‘한 몸’을 말하고, 예수님은 1:27과 2:24를 합쳐 결혼의 근거로 인용하십니다(마 19:4–6). 시 33:20에서 하나님도 ‘에제르’라 불리므로 이 낱말은 낮은 지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개혁신학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1은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하는 것’, 24.2는 ‘남편과 아내의 상호 돕기, 합법적 자손의 증가, 거룩한 씨로 교회가 늘어남, 부정을 막음’을 결혼의 목적이라 합니다.

    평가

    개혁신학은 이 대목을 결혼의 일반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예바못의 ‘대적’ 풀이는 본문의 낱말이 아니라 설교 방식의 확장이라고 봅니다. 라쉬의 ‘두 신이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는 본문 근거가 약합니다.

    보완2:7의 ‘두 번 빚으심’과 영혼
    유대 전승

    라쉬는 ‘바이쩨르’의 철자 ‘י’가 둘이라는 데서 이 세상의 몸과 부활을 위한 몸, 두 번의 빚으심을 읽어 냅니다. 또 몸은 땅의 것이고 영혼은 하늘의 것이라고 풉니다.

    본문 문맥

    2:7의 ‘생령’은 짐승에게도 쓰이는 낱말(1:20)입니다. 사람의 차별성은 ‘하나님이 직접 불어넣으셨다’는 방식에 있습니다. 부활의 약속은 이 구절이 아니라 다른 본문(단 12:2, 고전 15장)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개혁신학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2는 사람이 ‘이성적이고 불멸하는 영혼’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평가

    ‘두 번 빚음 = 부활’은 철자에서 이끌어 낸 미드라쉬이고 본문의 논증이 아닙니다. 개혁신학이 말하는 ‘영혼의 불멸’도 2:7 한 구절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의존합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1장과 2장의 순서가 다르다(1장은 사람이 마지막, 2장은 사람이 먼저)는 점을 모순으로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라쉬는 2:4에서 ‘모든 것이 첫날에 창조되었다’고 하고, 2장은 ‘비와 식물’이라는 한 측면의 이야기라고 읽습니다. 본문의 구조는 ‘전체 → 사람 중심’의 확대입니다.

    비손·기혼·에덴의 위치를 오늘 지도에서 찾는 시도는 추측입니다. 라쉬는 비손을 나일, 이븐 에즈라는 사아디야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본문이 확실히 짚는 것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뿐입니다.

    2:7의 ‘생령’은 짐승에게도 쓰이는 낱말(1:20)이므로 ‘영혼 불멸’을 곧바로 읽어 내는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라쉬도 사람의 영이 가장 발달했다는 차이를 말할 뿐입니다.

    ‘에제르(돕는 자)’를 열등한 위치로 읽는 것은 낱말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시 33:20, 121:1–2에서 ‘에제르’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물음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직접 숨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내 몸과 삶의 숨결이 모두 받은 것이라는 사실이 오늘 내 일상에서 어떻게 보입니까?

    3. 화요일 · 셋째 낭독 · 창세기 2:20–3:21

    여자가 지어지고 두 사람은 벌거벗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뱀이 여자를 유혹하고 둘이 열매를 먹은 뒤 하나님이 심판하시지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2:20–21 ‘깊이 잠들게 하시고’라쉬

    하나님이 짐승을 암수로 데려오시자 아담이 ‘모두 짝이 있는데 나만 짝이 없다’고 하여 짝을 구했다고 풉니다. ‘갈빗대’는 ‘옆구리’라는 뜻이며 ‘잠들게 하신 뒤 취하신’ 것은 아담이 살점을 보고 여자를 멸시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라고 합니다(산헤드린 39a).

    2:22 ‘만드사’라쉬

    ‘세우셨다(바이벤)’는 건물을 짓듯 아래는 넓고 위는 좁게 지으셨다는 뜻이라 풉니다. 곡식 창고가 아래가 넓어야 무게를 견디는 것과 같다는 비유입니다(베라코트 61a).

    2:23 ‘이번에야’라쉬

    아담이 짐승 가운데서 짝을 찾았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하와에게서만 만족했다고 풉니다(예바못 63a).

    2:24 ‘그러므로’라쉬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이 하는 말로, 노아 자손에게도 부도덕한 관계를 금하는 근거라고 풉니다(산헤드린 57b). ‘한 몸’은 아이 안에서 두 부모가 하나로 연합한다는 뜻이라고 보지만 람반은 이 풀이에 반대합니다. 짐승에게도 같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2:25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라쉬

    아직 선악을 구별하는 지식이 없어 부끄러움을 몰랐다고 풉니다. 아담이 이름 짓는 지혜가 있었어도 악한 충동은 먹기 전에는 작동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3:1 ‘뱀’라쉬

    이 이야기가 왜 여기에 있는가: 두 사람이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 지식이 없던 이유를 설명하고 타락으로 잇기 위한 것입니다. ‘간교함’과 ‘큰 저주’가 짝을 이룬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19:1).

    3:3 ‘만지지도 말라’라쉬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만 하셨는데 여자가 ‘만지지도 말라’고 덧붙여서 약해졌다고 풉니다(잠 30:6, 창세기 라바 19:3). 뱀은 그 틈을 타 나무를 만지게 한 뒤 ‘만져도 죽지 않으니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3:5 ‘하나님과 같이’라쉬

    뱀은 ‘하나님이 이 나무를 먹고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너도 먹으면 창조자가 될 것이다’고 했다고 풉니다. 같은 일을 하는 자는 서로를 시기한다는 논리를 씁니다(창세기 라바 19:4).

    3:6 ‘먹음직도 하고’라쉬 · 람반

    라쉬는 ‘남편에게도 주었다’를 자기만 죽고 남편이 다른 아내를 얻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19:5). 람반은 하와가 그 열매를 쓰고 독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가 보니 먹음직하다고 느꼈다고 풉니다.

    3:7 ‘눈이 밝아’라쉬

    ‘눈이 밝아졌다’는 지성(마음의 눈)이지 시각이 아닙니다. 앞 못 보는 사람도 벗은 줄은 아니까 ‘벗은 줄 알았다’는 하나님이 맡기신 한 계명을 벗어 버렸음을 깨달았다는 뜻으로 풉니다. 무화과 잎은 먹은 그 나무의 잎이었다고 합니다(산헤드린 70b).

    3:9 ‘네가 어디 있느냐’라쉬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아셨으나, 갑작스러운 선고로 당황하지 않게 대화를 여시려고 물으셨다고 풉니다. 가인에게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과 같습니다.

    3:12 ‘주께서 주사’라쉬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라고 하여 아담이 배은망덕을 보였다고 풉니다(아보다 자라 5b).

    3:14 ‘이렇게 하였으니’라쉬

    뱀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으신 것은 백성을 우상으로 꾀는 자의 편에서 변호해 주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라고 풉니다(‘선생의 말과 제자의 말이 어긋나면 누구의 말을 듣겠느냐’는 논리를 이용했을 것이므로).

    3:15 ‘원수가 되게 하고’라쉬 · 탈굼 요나단

    라쉬는 뱀의 속셈이 아담을 먼저 죽게 하고 하와를 차지하는 것이었다고 풉니다. 탈굼 요나단은 여자의 자손이 율법을 지키면 뱀의 머리를 칠 수 있고 버리면 발꿈치를 물리지만, 그들에게는 약이 있어 ‘메시아 왕의 날에 발꿈치의 치료를 얻으리라’고 옮깁니다.

    3:16 ‘임신하는 고통’라쉬

    ‘고통(이차본)’은 자식을 기르는 수고(에루빈 100b), ‘임신’은 임신의 고통, ‘수고하고 자식을 낳으리니’는 해산의 고통이라고 나누어 풉니다. ‘사모하고’는 부부 관계에 대한 갈망이지만 말로 요구하는 담대함은 없고 ‘남편이 다스리리라’는 모든 것이 그에게서 온다는 뜻으로 풉니다.

    3:17–19 ‘땅이 저주를 받고’라쉬

    땅은 파리·벼룩·개미 같은 저주받은 것을 내게 될 것이고, 가시와 엉겅퀴는 곡식 사이에서 자란다고 풉니다. ‘밭의 채소를 먹으리니’는 1:29의 복과 대비해 수고가 더해진 것이라고 풉니다.

    3:20 ‘하와’라쉬

    ‘하와’는 ‘하야(생명)’와 소리가 같고 자녀를 낳아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3:21 ‘가죽옷’라쉬

    매끄러워서 손톱처럼 피부에 붙는 옷이었다는 풀이와, 토끼의 털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재료로 만든 옷이라는 풀이를 함께 적습니다(창세기 라바).

    히브리어 낱말 공부

    אִישׁ / אִשָּׁה
    이쉬 / 잇샤
    남자 / 여자

    2:23의 소리 놀이입니다. 라쉬는 이 말놀이가 히브리어에서만 성립하므로 창조 때 쓰인 언어가 히브리어라는 근거라고 봅니다.

    עֲרוּמִּים / עָרוּם
    아룸밈 / 아룸
    벌거벗은 / 간교한

    2:25와 3:1은 같은 소리의 낱말입니다. 벌거벗은 이들의 ‘순진함’이 간교한 뱀을 만나는 장면의 연결입니다.

    נָחָשׁ
    나하쉬
    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것’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것’(3:1)이라고 덧붙여 신적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תְּשׁוּקָה
    테슈카
    사모함·갈망

    3:16에서 여자의 ‘테슈카’가 남편에게로, 4:7에서 죄의 ‘테슈카’가 가인에게로 향합니다. 같은 낱말이 두 곳에서만 쓰입니다.

    חַוָּה
    하와
    하와(생명)

    3:20은 ‘모든 산 자의 어미’라는 뜻이라 ‘하이(생명)’와 연결합니다. 죽음을 선고받은 직후에 아담이 ‘생명’이라 이름 붙입니다.

    כָּתְנוֹת עוֹר
    캇노트 오르
    가죽옷

    3:21. 벗은 부끄러움을 스스로 가리려 한 무화과 잎(3:7) 위에 하나님이 직접 입혀 주십니다.

    זֶרַע
    제라
    씨·후손

    3:15의 ‘여자의 후손’은 집합적(후손 전체)으로도 단수(한 사람)로도 읽혀, 해석의 차이가 갈립니다.

    히브리 배경

    뱀은 고대 근동에서 생명·치유·혼돈을 두루 상징했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영웅이 얻은 ‘젊음을 되찾는 풀’을 뱀이 훔쳐 가고 사람은 영생을 잃습니다. 창세기는 비슷한 모티브(뱀·영생의 나무)를 가지고 있지만 뱀을 신이 아니라 피조물로 두며 책임을 사람에게 묻습니다. ‘선악을 아는’은 ‘모든 것을 안다’(양 끝을 말해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거나 ‘스스로 선악을 정하는’ 자율을 뜻한다고 읽습니다. 가죽옷은 하나님이 죄 앞에서도 사람을 돌보시는 첫 장면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3:3) · 창세기 라바 19:3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만지지도 말라’고 덧붙인 것이 뱀의 공격 지점이 되었다는 풀이는 ‘율법에 울타리를 쳐도 본문과 섞어 가르치지 말라’는 경고로 이어집니다.

    산헤드린 70b · 라쉬(3:7)

    그들이 가린 무화과 잎은 먹은 그 나무의 잎이라는 풀이는 ‘죄를 일으킨 바로 그것으로 개선도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입니다.

    탈굼 요나단(3:15)

    뱀과 여자의 후손 사이의 싸움을 율법 순종 여부로 읽고, 끝에 ‘메시아 왕의 날’의 치료를 말합니다. 메시아적으로 읽는 유대 전통의 가장 이른 증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보다 자라 5b · 라쉬(3:12)

    아담이 ‘주께서 주신 여자’라고 하여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모습을 배은망덕으로 읽습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구분뱀은 사탄인가
    유대 전승

    라쉬는 문자 그대로의 간교한 뱀으로 읽고 형벌도 뱀에게 내려진다고 풉니다. 3:14의 ‘너를 변호해 주지 않았다’는 풀이는 ‘백성을 우상으로 꾀는 자의 편에서 변호하지 말라’는 법적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본문 문맥

    3:1은 뱀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임을 분명히 적습니다. 사탄과의 동일시는 신약에서 분명해집니다(요 8:44, 롬 16:20, 계 12:9).

    개혁신학

    칼빈은 3:1에서 이 본문만으로는 ‘사람이 뱀에게 속았다’는 것까지만 말할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고 분명히 말하므로 뱀은 사탄의 입일 뿐이었다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1도 ‘사탄의 간교함과 유혹에 속아’ 타락했다고 합니다.

    평가

    본문이 말하는 것은 ‘피조물인 뱀이 속였다’이고, 사탄과의 연결은 성경 전체의 증거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의 이 정직한 구분을 따르면 3장 본문과 신약의 증언을 섞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완타락과 ‘악한 충동’, 전적 부패
    유대 전승

    전승은 ‘예쩨르 하라(악한 충동)’를 말하지만 타락의 죄책이 후손에게 전가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라쉬는 4:7을 ‘네가 원하면 이길 수 있다’로 읽고(키두쉰 30b), 토라가 그 충동의 약이라고 가르칩니다.

    본문 문맥

    3:6–19는 죄와 죽음의 시작을, 5:3은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대로 낳음을, 6:5와 8:21은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신약은 롬 5:12–19, 엡 2:1–3, 시 51:5로 이를 풉니다.

    개혁신학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2–4는 이 죄로 사람이 ‘모든 부분과 기능에서 더럽혀졌고’, 죄책이 전가되고 부패한 본성이 모든 후손에게 전해지며, 이로부터 모든 실제 범죄가 나온다고 합니다. 9.3은 ‘구원에 동반되는 영적 선’을 향한 의지의 능력은 완전히 잃었다고 한정해서 말합니다. 벨직 신앙고백 15조는 원죄를 ‘온 인성의 부패, 태 안의 아기까지 감염시키는 유전된 타락’이라 합니다.

    평가

    전승이 ‘싸워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곳에서 개혁신학은 ‘명령은 능력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본문은 책임을 묻는 명령(4:7)과 타락의 깊이(6:5)를 함께 둡니다. 개혁신학의 한정(‘구원에 동반되는 영적 선’)은 일상의 선행과 시민적 선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 한정을 놓치면 지나친 단순화가 됩니다.

    수용3:15와 ‘여자의 후손’
    유대 전승

    탈굼 요나단은 여자의 자손이 율법을 지키면 뱀의 머리를 치고, 버리면 발꿈치를 물리지만 ‘메시아 왕의 날에 발꿈치의 치료를 얻으리라’고 옮깁니다. 라쉬는 뱀의 속셈과 형벌을 중심으로 풉니다.

    본문 문맥

    3:15의 ‘제라(후손)’는 집합 단수입니다. 갈 3:16은 아브라함의 ‘씨’를 그리스도 한 분으로 풀고, 롬 16:20은 ‘평강의 하나님이 사탄을 너희 발 아래 상하게 하시리라’고 교회 전체에 적용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3:15에서 ‘씨’를 집합명사로 보아 사람의 후손 전체로 풀고, 한 사람만으로 읽는 것은 무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아담의 자손이 승리자가 아니므로 반드시 머리에 이르러야 하며, 바울이 아브라함의 씨에서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처럼 ‘머리 아래의 교회 전체’가 사탄을 이긴다고 풉니다(롬 16:20). 또 ‘그녀가 밟으리라’는 불가타 번역에 근거해 마리아에게 돌리는 것을 비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6은 구속의 효력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으로 계시된 약속과 모형과 제사를 통해 모든 시대의 택자에게 전달되었다고 하여 3:15를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으로 읽습니다.

    평가

    탈굼과 칼빈이 모두 집합적 읽기에서 출발해 ‘끝에 오시는 이’를 말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3:15를 ‘예수님 한 분을 가리킨다’고 곧바로 단정하는 설교보다 칼빈의 구조(집합적 후손 → 머리이신 그리스도 → 그분 안의 교회)가 본문의 문법과 신약의 용례에 더 충실합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선악과 = 사과’는 본문에 없습니다. 본문은 ‘열매(페리)’라고만 합니다. 라틴어에서 ‘악(malum)’과 ‘사과(malum)’의 소리가 같아 서양 그림에서 사과가 되었다는 설명이 흔합니다. 랍비들 사이에서도 밀, 포도, 무화과로 갈립니다(베라코트 40a, 산헤드린 70a–b). 라쉬는 3:7에서 무화과 쪽에 서는 풀이를 소개합니다.

    뱀을 사탄과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이 아니라 후대의 읽기입니다(지혜서 2:24, 요한계시록 12:9). 라쉬는 문자 그대로 간교한 짐승으로 읽고 징벌도 짐승에게 내려지는 것으로 풉니다. 본문이 분명히 하는 것은 ‘뱀도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3:15를 ‘원시복음’으로 읽어 한 후손(그리스도)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기독교의 전통적 읽기이고, 탈굼은 이스라엘 전체의 투쟁과 마지막 날의 치료로 읽습니다. ‘제라(후손)’가 집합 단수이기 때문에 두 읽기가 모두 가능하며, 본문의 문법만으로는 어느 한쪽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신약의 빛에서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3:16의 ‘다스리리라’를 남편의 정당한 지배로 읽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를 기술하는 문장(저주)이지 이상적인 질서를 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2:24의 ‘한 몸’과 대비해 읽으세요.

    하와가 ‘만지지도 말라’고 한 것은 라쉬가 지적하는 덧붙임입니다. 이 지적은 본문 2:17에 ‘만지지 말라’가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므로 본문 근거가 있습니다.

    오늘의 물음

    아담은 ‘주께서 주신 여자’라 하고 여자는 ‘뱀이 꾀므로’라 합니다. 나는 잘못 앞에서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려 합니까?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히신 마음을 나는 상처 입은 사람에게 흉내 낼 수 있습니까?

    4. 수요일 · 넷째 낭독 · 창세기 3:22–4:18

    사람은 에덴 동쪽으로 쫓겨나고 그룹이 길을 지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가인의 살인과 하나님의 물음, 가인의 유랑과 그의 후손의 성(城)이 이어집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3:22 ‘우리 중 하나와 같이’라쉬

    ‘아담이 땅의 존재 중에 홀로 유일하여, 하늘에서 내가 유일한 것과 같다’고 풉니다. 유일함은 선악을 아는 데 있습니다. 또 영생하면 사람들을 미혹해 ‘그도 신이다’ 하게 할 염려가 있다고 합니다.

    3:24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라쉬 · 이븐 에즈라

    라쉬는 그룹을 ‘파괴의 천사’(출애굽기 라바 9:11)로 풉니다. ‘화염’은 두려움을 주어 다시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 합니다. 위치는 동산의 동쪽, 곧 동산 바깥입니다.

    4:1 ‘아담이 동침하매’라쉬

    이 일은 타락 전에 있었다고 풉니다. ‘가인’은 그 말에서 나왔고, ‘여호와로 말미암아’는 하나님과 함께 동역했다는 뜻입니다(니다 31a). 또 ‘에트(את)’가 셋 반복되어 가인과 쌍둥이 누이가, 아벨과 두 누이가 함께 태어났음을 보인다고 합니다.

    4:3 ‘땅의 소산’라쉬

    가인의 제물은 가장 나쁜 소산이었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22:5). 아마씨라는 풀이도 소개합니다.

    4:4 ‘열납하셨으나’라쉬

    ‘바이샤’는 ‘돌아보셨다’이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 아벨의 제물을 태웠다고 풉니다.

    4:7 ‘선을 행하면’라쉬 · 키두쉰 30b

    탈굼은 ‘네 행위를 고치면 용서받으리라’고 옮깁니다. 죄는 무덤 문 앞까지 따라다니며 악한 충동이 끊임없이 사모한다고 하고, 그러나 ‘네가 원하면 이길 수 있다’고 풉니다.

    4:8 ‘가인이 아우에게 말하고’라쉬

    가인이 논쟁을 일으켜 죽일 구실을 찾았다고 풉니다. 이를 다룬 미드라쉬가 여럿 있으나 이것이 ‘평이한 뜻’이라고 덧붙입니다.

    4:9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쉬

    하나님이 다정한 물음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제가 죽였고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는 지극히 높으신 분을 속일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민수기 라바 20:6).

    4:10 ‘네 아우의 핏소리’라쉬

    ‘피’가 복수형(데메이)이어서 아벨과 그에게서 날 후손들의 피라는 풀이(창세기 라바 22:9)와, 가인이 어디가 치명상인지 몰라 여러 군데를 쳤다는 풀이가 있습니다.

    4:11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라쉬

    땅은 이미 한 번 죄를 지었으나(1:11 풀이), 이번에 입을 벌려 피를 받았으므로 가인에게 추가로 저주를 더한다고 풉니다.

    4:13 ‘내 죄가 지기에 너무 큽니다’라쉬

    이것은 질문이라고 풉니다. ‘위와 아래 세상을 지탱하시는 분이 내 죄 하나는 지실 수 없습니까?’ 하는 항변입니다(창세기 라바 22:11).

    4:15 ‘가인을 위하여 표를 주사’라쉬

    하나님이 가인의 이마에 당신 이름의 한 글자를 새기셨다고 풉니다(피르케 드라비 엘리에제르 21). ‘칠 배’는 칠 대째에 이르러 복수하신다는 뜻이며, 라멕이 가인을 죽인다고 풉니다.

    4:16 ‘놋 땅’라쉬

    ‘놋’은 모든 유랑자가 방황하는 땅입니다. 가인은 ‘겸손한 척’ 나갔으나 지극히 높으신 분을 속이려 한 것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2:13).

    4:17 ‘성을 쌓고’라쉬

    성을 쌓은 이는 가인이고, 성에 이름을 붙인 것은 아들 에녹을 기념하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כְּרֻבִים
    크루빔
    그룹

    날개 달린 수호자입니다. 법궤 덮개 위에도 새겨지는 성소의 수호 형상(출 25:18–20)이어서, 에덴이 성소 이미지임을 보여 줍니다.

    הֶבֶל
    헤벨
    아벨(숨·덧없음)

    ‘헤벨’은 전도서에서 ‘헛됨’으로 번역되는 낱말입니다. 숨결처럼 사라지는 이의 이름이 비극을 미리 암시합니다.

    קַיִן / קָנִיתִי
    카인 / 카니티
    가인 / 내가 얻었다

    4:1의 말놀이입니다. 하와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사람을 얻었다’고 외칩니다.

    וַיִּשַׁע
    바이샤
    받으셨으나(돌아보셨으나)

    ‘샤아’는 ‘눈을 주다·돌아보다’입니다. 이유는 적지 않고 반응만 적습니다.

    תְּשׁוּקָה
    테슈카
    그것의 소원(갈망)

    4:7에서 죄의 갈망이 가인을 향하고 가인은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고 합니다. 3:16과 같은 어휘, 같은 구조입니다.

    רֹבֵץ
    로베츠
    엎드려 있는

    ‘문에 죄가 엎드려 있다’(4:7). 맹수가 웅크려 기다리는 이미지입니다.

    דְּמֵי אָחִיךָ
    데메이 아히카
    네 아우의 피(복수형)

    ‘피’가 복수형입니다. 아벨의 피뿐 아니라 그에게서 나올 후손의 피까지 외친다고 풉니다.

    נָע וָנָד
    나 바나드
    떠도는 자

    ‘나드’와 땅 ‘놋(נוֹד)’(4:16)이 소리를 맞춥니다. 이름 그대로 ‘유랑의 땅’으로 갑니다.

    히브리 배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에도 목자와 농부의 다툼 이야기가 있습니다(두무지와 엔킴두). 가인과 아벨은 이 이야기의 틀을 가졌으나 이유와 결말이 다릅니다. 제사의 단어 ‘민하’는 곡물제사와 일반 예물을 모두 가리켜, 본문은 곡식이어서 거절당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4:7이 알려 주는 이유는 ‘선을 행하면’ 하는 가인의 태도이고, 히 11:4는 아벨의 믿음, 요일 3:12는 가인의 악한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가인은 최초의 성을 쌓고(4:17), 아벨의 피가 땅에서 외치는 장면은 살인이 땅과 하나님에 대한 범죄임을 보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4:7) · 키두쉰 30b

    ‘죄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씀은 악한 충동과 싸우는 자에게 힘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키두쉰은 하나님이 ‘토라라는 약’을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라쉬(4:9) · 창세기 라바 19:11

    하나님은 정죄하기 전에 먼저 묻는 분이십니다. 가인이 기회를 놓친 것은 사실을 숨겼기 때문입니다.

    미쉬나 산헤드린 4:5

    ‘네 아우의 피(데메이, 복수형)’에서 가인이 아우의 피뿐 아니라 그에게서 날 후손의 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는 가르침을 이끌어 냅니다. 같은 미쉬나가 아담이 한 사람으로 창조된 이유를 들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한 세상을 죽이는 것이고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한 세상을 살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라쉬(4:15)

    가인의 표를 하나님 이름의 한 글자로 풉니다. 유랑자에게 주어진 보호의 표라는 읽기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가인의 제사는 왜 열납되지 않았나
    유대 전승

    라쉬는 가인이 ‘가장 나쁜 소산’을 바쳤다고 하고(창세기 라바 22:5), 아벨의 제물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 태웠다고 합니다. 이븐 에즈라나 람반은 이 대목을 길게 풀지 않습니다.

    본문 문맥

    4:3–5는 이유를 적지 않고 반응만 적습니다. 4:7은 ‘선을 행하면’이라고 하고, 히 11:4는 아벨이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요일 3:12는 가인의 행위가 악했다고 말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4:5에서 ‘유대인들이 가인이 이삭을 아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 악은 더 깊은 마음의 불순이다’라고 하고, 아벨의 제사가 불에 탔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증거 없는 ‘유대인의 우화’라며 물리칩니다. 4:4에서는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받으신 뒤에 그의 일을 받으신다고 하고, 가인은 외적 제사로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위선자였다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7은 중생하지 않은 자의 선한 일이 ‘믿음으로 정결해진 마음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죄가 된다’고 합니다.

    평가

    칼빈의 비판은 본문 문맥에 맞습니다. 본문은 소산의 질이 아니라 가인의 마음과 반응(4:5–7)을 초점에 둡니다. 다만 ‘가인의 모든 행위가 죄’라는 표현은 웨스트민스터 16.7의 신학적 결론이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그에게 ‘선을 행하면 받으리라’(4:7)고 문을 열어 두십니다. 이 긴장을 말하는 것이 정직합니다.

    보완4:7과 ‘죄를 다스리라’
    유대 전승

    라쉬는 ‘악한 충동이 항상 너를 사모하나 네가 원하면 이길 수 있다’고 풉니다(키두쉰 30b). 탈굼은 ‘행위를 고치면 용서받으리라’고 옮깁니다.

    본문 문맥

    4:7의 ‘테슈카(사모함)’는 3:16 이후 두 번째로 쓰이는 낱말이고,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로베츠’는 맹수가 웅크린 모습입니다. ‘다스리라’는 명령이지 능력을 증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4:7을 설명하며 ‘행위를 고치면 용서받으리라’는 히브리 박사들의 풀이가 ‘값없는 사면을 해치는 만족을 상정한다’고 비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9.3은 타락한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영적 선을 행할 의지의 능력을 잃었다고 하며, 7.3은 은혜언약에서 하나님이 ‘믿을 수 있게 하는 성령을 약속하신다’고 합니다.

    평가

    전승과 개혁신학의 가장 큰 갈림이 이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전승은 사람의 선택과 노력의 길을 말하고, 개혁신학은 명령 앞에서 사람의 무능력을 드러내어 은혜로 이끕니다. 본문은 책임과 가능성(4:7)과 타락한 마음(6:5)을 한 이야기 안에 담아 두어, 어느 한쪽만 읽으면 반쪽이 됩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가인의 제사가 거절된 이유를 ‘피 제사가 아니라 곡식이어서’라고 가르치는 것은 본문에 없습니다. 본문은 ‘민하’(예물)를 쓰고 이유를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라쉬는 가인이 ‘가장 나쁜 것’을 가져왔다고 풀고, 히 11:4는 아벨의 믿음, 요일 3:12는 가인의 행위가 악했음을 말합니다. 4:7(‘선을 행하면’)이 가장 직접적인 단서입니다.

    ‘가인의 표’를 피부색이나 인종과 연결한 해석은 본문에 없습니다. 이 표는 가인이 죽임 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는 하나님의 보호의 표입니다(4:15).

    ‘가인의 아내는 누구인가’: 라쉬는 가인과 함께 태어난 쌍둥이 누이로 풉니다. 본문 근거는 5:4(아담이 ‘자녀를 낳았다’)이며 본문이 이름을 밝히지 않으므로 이름과 구체적 계보는 추측입니다.

    그룹을 ‘날개 달린 천사 아기(큐피드)’로 그리는 것은 중세 이후 그림이며, 성경의 그룹은 성소를 지키는 강력한 존재입니다(출 25, 겔 10).

    오늘의 물음

    하나님은 가인에게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시며 아직 길을 열어 두셨습니다. 지금 내 문 앞에 엎드려 있는 ‘죄’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다스리라’는 말씀을 오늘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5. 목요일 · 다섯째 낭독 · 창세기 4:19–22

    가인의 후손 라멕이 두 아내를 맞고, 그의 자녀들이 목축·음악·금속 기술의 시조가 됩니다. 짧은 네 절이 문명의 시작을 알립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4: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니’라쉬

    왜 이 이야기를 길게 적었는가: 하나님이 가인에게 ‘칠 대째에 복수하리라’고 하신 약속을 지키셨음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라쉬는 이 이야기를 가인에게 하신 ‘칠 대째에 복수하리라’는 약속의 성취로 읽습니다.

    4:19 ‘두 아내’라쉬

    홍수 전 세대의 풍습이라, 한 아내는 아이를 낳게 하고 다른 아내는 쾌락을 위해 약을 먹여 임신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쾌락을 위한 아내를 꾸며 놓고, 아이를 낳는 아내는 홀대하여 ‘아다(치워진 자)’라 불렀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23:2).

    4:20 ‘장막에 거하며 가축 치는 자’라쉬

    야발은 처음으로 가축을 기른 이이고, 풀이 떨어지면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에 한 달 여기 한 달 저기 장막을 치고 살았다고 풉니다.

    4:22 ‘두발가인’라쉬

    ‘두발(תובל)’을 ‘향신료(תבלין)’와 연결해, 가인의 기술을 ‘개선하여’ 살인자를 위한 무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3:3). 그에게는 ‘놋과 쇠로 여러 가지를 날카롭게 한 자’라고 합니다.

    4:22 ‘나아마’라쉬

    나아마는 노아의 아내였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3:3). 다른 전승은 이 이름이 우상 숭배와 관련된다는 풀이를 줍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שְׁתֵּי נָשִׁים
    쉬테이 나쉼
    두 아내

    일부다처가 성경에 처음 나오는 대목입니다. 2:24의 ‘한 몸’과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עָדָה וְצִלָּה
    아다 베찰라
    아다와 씰라

    아다는 ‘장식’, 씰라는 ‘그늘’로 읽는 풀이가 있고, 라쉬는 ‘아다 = 치워 둔 여자’, ‘씰라 = 그늘 아래 사는 여자’로 풉니다.

    אֲבִי
    아비
    …의 조상(아버지)

    여기서 ‘아비’는 직업의 시조·원조를 뜻하는 셈어의 표현입니다. 야발은 장막과 목축의 시조입니다.

    כִּנּוֹר וְעוּגָב
    킨노르 베우가브
    수금과 퉁소

    현악기와 관악기를 대표로 들어 ‘음악’ 전체를 가리킵니다.

    לֹטֵשׁ כָּל־חֹרֵשׁ נְחֹשֶׁת וּבַרְזֶל
    로테쉬 콜 호레쉬 네호셰트 우바르젤
    놋과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

    ‘라타쉬’는 날을 세워 갈다입니다. 청동기와 철기 기술이 한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נַעֲמָה
    나아마
    나아마(기쁨·아름다움)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이 이 계보에 있습니다.

    히브리 배경

    4:17–22는 가인의 후손에게서 도시, 목축, 음악, 금속 기술이 나온다고 밝힙니다. 인류 문명의 기원을 가인의 자손에게 돌리는 것은 문명을 맹목적으로 칭찬하지 않는 성경의 시선입니다. 이 기술 가운데 쇠를 다루는 일이 곧바로 4:23–24의 ‘칼의 노래’와 이어집니다. ‘아비’는 동일 업종 공동체의 후견인·시조를 부르는 말(‘장인의 조상’)로 쓰입니다. 고대 근동의 길드를 떠올리면 됩니다. 일부다처는 이 계보에서 처음 보이며, 바로 이어서 폭력의 노래가 나옵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4:19) · 창세기 라바 23:2

    두 아내의 풍습(자녀를 위한 아내와 쾌락을 위한 아내)을 홍수 세대의 타락한 풍습의 한 모습으로 읽습니다.

    라쉬(4:22) · 창세기 라바 23:3

    두발가인이 무기를 ‘개선’했다고 풀어, 문명의 발전이 살인의 도구를 낳은 이야기로 읽습니다. 기술이 도덕에 앞서 가는 모습입니다.

    창세기 라바 23:3

    나아마를 노아의 아내로 보는 풀이가 있습니다. 노아의 아내 이름이 성경에 없다는 점을 채우려는 시도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일부다처의 시작
    유대 전승

    라쉬는 두 아내를 홍수 세대의 풍습으로 풉니다. 한 아내는 자녀를 위해, 다른 아내는 쾌락을 위해 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창세기 라바 23:2).

    본문 문맥

    4:19는 일부다처가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대목입니다. 2:24의 ‘한 몸’, 마 19:4–6, 말 2:14와 대조해 읽습니다. 본문은 라멕을 칭찬하지 않고 곧이어 칼의 노래(4:23–24)를 적습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4:19를 ‘일부다처가 타락하고 잔혹한 가문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그것이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는 하나님이 정하신 영구한 자연 질서를 어긴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타락을 가인의 집에서 나오게 하신 것은 일부다처를 하는 이들이 그 본보기를 부끄러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1은 한 남자가 한 아내만 두는 것을 규정합니다.

    평가

    칼빈의 읽기가 본문 문맥(2:24와의 대조)에 충실합니다. 다만 아브라함과 야곱 같은 신앙의 조상도 일부다처였다는 점을 본문은 직접 평가하지 않으므로, 이 대목의 대조를 모든 구절에 한꺼번에 적용하는 일은 조심해야 합니다.

    보완문명과 기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유대 전승

    라쉬는 두발가인이 가인의 기술을 ‘개선하여’ 살인자를 위한 무기를 만들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3:3). 문명의 발전을 폭력의 도구와 연결해 경계하는 읽기입니다.

    본문 문맥

    4:20–22는 목축, 음악, 금속 기술을 가인의 후손에게 돌립니다. 본문은 이를 칭찬하지도 비난하지도 않고 4:23의 칼의 노래와 이어 놓습니다. 출 31:1–5, 사 28:24–29는 기술과 지혜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4:20에서 기술과 생활의 편의를 발명하는 일은 ‘결코 멸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가장 타락한 가문이 오히려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은 가인이 완전히 저주받아 좋은 선물조차 받지 못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평가

    두 시선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라쉬는 기술이 도덕을 앞질러 갈 위험을, 칼빈은 하나님이 악한 가문에도 선물을 주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후대에 ‘일반은총’이라 부르게 되는 생각과 닿는 대목입니다. 본문 자체는 평가를 하지 않고 독자에게 맡깁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아다·씰라 이름 풀이(치워진 여자·그늘 아래 여자)와 약을 먹여 불임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라쉬가 소개하는 미드라쉬이고, 본문은 이름만 적습니다. 본문의 의미를 이런 사회 풍습으로 일반화하지 마세요.

    ‘나아마 = 노아의 아내’는 창세기 라바의 한 의견일 뿐 본문에 없습니다. 노아의 아내는 이름이 없습니다.

    문명(성·음악·금속)이 가인의 계보에서 나온다는 점을 곧바로 ‘문명은 악’이라고 읽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기술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4:23의 노래가 보여 주는 폭력과 함께 놓아 긴장을 만듭니다.

    오늘의 물음

    문명은 어느 방향으로든 갑니다. 쟁기와 칼이 같은 쇠에서 나옵니다. 오늘 내가 가진 능력(기술·재능·영향력)을 ‘살리는 쪽’으로 쓰고 있습니까?

    6. 금요일 · 여섯째 낭독 · 창세기 4:23–5:24

    라멕이 복수의 노래를 부르고, 아담에게 셋이 태어나 ‘그때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어 아담에서 에녹까지의 계보가 이어지고 에녹은 하나님이 데려가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4:23 ‘내 말을 들으라’라쉬

    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라멕이 앞을 못 보고 두발가인이 이끌다 멀리서 가인을 짐승으로 알아 활을 쏘게 해 가인을 죽였고, 후에 알고 두발가인을 쳐서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탄후마). 라쉬 자신이 4:24에서 창세기 라바는 라멕이 누구를 죽였다고 하지 않고 아내들이 그에게서 떠났다고만 한다고 덧붙입니다.

    4:24 ‘칠십칠 배’라쉬

    가인을 칠 대째까지 유예하신 것이 살의 계획이 있었던 가인의 경우였다면, 사고로 죽인 라멕의 경우는 더 오래 유예될 것이라는 추론입니다. 숫자는 ‘여러 칠 대’를 뜻한다고 풉니다.

    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여’라쉬

    라멕의 아내들이 남편을 떠나자 아담을 찾아갔고, 아담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라고 권하자 되받아 ‘당신부터 고치라, 백삼십 년 동안 아내와 떨어져 있지 않았느냐’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아담이 아내를 다시 맞았다고 풉니다.

    4:26 ‘이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라쉬 · 창세기 라바

    ‘후할’을 ‘속되게 하다’로 읽어 이때부터 사람과 우상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 우상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풉니다. 이에 맞서 평이한 읽기는 ‘비로소 예배(기도)가 시작되었다’입니다.

    5:1 ‘아담의 계보’라쉬

    이 구절에 미드라쉬 풀이가 많다고 하고, 5:1의 ‘창조된 날에’를 아담이 창조된 날에 자녀를 낳았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4:7).

    5:3 ‘백삼십 세에’라쉬

    아담은 그때까지 아내와 떨어져 있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4:6).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쉬 · 온켈로스

    라쉬는 에녹이 의인이었으나 마음이 쉽게 악으로 기울 수 있어 하나님이 때 이르게 데려가셨다고 풉니다. 온켈로스는 이 구절을 ‘하나님이 그를 죽게 하셨으므로 그는 없었다’(אמית)로 옮깁니다.

    5:24 ‘데려가시므로’라쉬

    ‘라카흐(데려가다)’를 ‘때 이르게 데려가다’로 풉니다. 겔 24:16(‘네 눈의 기뻐하는 것을 데려가리라’)과 같은 쓰임입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שִׁבְעָתַיִם / שִׁבְעִים וְשִׁבְעָה
    시브아타임 / 쉬브임 베시브아
    칠 배 / 칠십칠 배

    가인은 ‘칠 배’의 보호를, 라멕은 ‘칠십칠 배’의 보복을 말합니다(4:24). 폭력의 확대를 숫자로 보여 줍니다.

    שֵׁת
    셰트
    셋(정해 주다)

    하와가 ‘하나님이 다른 씨를 내게 주셨다’(שָׁת־לִי)고 하는 말놀이(4:25)입니다.

    אֱנוֹשׁ
    에노쉬
    에노스(연약한 사람)

    ‘아담’과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시적 낱말로, 연약함과 죽을 운명을 강조합니다(시 8:4).

    הוּחַל לִקְרֹא בְּשֵׁם יְהוָה
    후할 리크로 베셈 아도나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

    ‘후할’은 ‘시작하다’로도 ‘속되게 하다(חלל)’로도 읽힙니다. 라쉬는 후자(이름을 우상에게 붙임)로 풀고 문맥상 ‘시작했다’가 더 평이합니다.

    בִּדְמוּתוֹ כְּצַלְמוֹ
    비드무토 케찰모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

    5:3에서 아담이 셋을 낳을 때 쓰인 표현으로, 1:26의 하나님의 형상·모양 어휘가 ‘아버지 → 아들’의 닮음으로 이어집니다.

    וַיָּמֹת
    바야모트
    그리고 죽었더라

    5장 계보를 관통하는 후렴입니다. 에녹만 이 후렴을 빠뜨립니다.

    וְאֵינֶנּוּ כִּי־לָקַח אֹתוֹ אֱלֹהִים
    베에이네누 키 라카흐 오토 엘로힘
    하나님이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라카흐(데려가다)’는 엘리야(왕하 2:3, 5)에게도 쓰입니다. ‘에이네누(그가 없다)’는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히브리 배경

    5장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1:27)을 되풀이하며 시작해, 사람을 낳는 일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어 가는 일임을 밝힙니다. 아담에서 노아까지 열 세대로 이어지는 이 계보는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왕명록’과 닮았습니다. 거기서는 홍수 이전 여덟 왕이 수만 년씩 다스립니다. 성경은 훨씬 완만한 수명(대개 900세 안팎)을 적습니다. 마소라 본문으로 계산하면 창조에서 홍수까지는 1,656년입니다(라쉬가 1:14에서 쓰는 수). 다만 사마리아 오경과 칠십인역은 숫자가 달라, 같은 계보도 본문 전승마다 다릅니다. 에녹 이야기(5:24)는 수명 후렴 속에서 ‘죽음이 없는’ 예외로 서 있습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4:26)

    ‘후할’을 ‘속되게 하다’(חלל)로 읽어 에노스 세대를 우상숭배의 시작으로 봅니다. 랍비 전승에서 흔한 읽기이고, 후대에 마이모니데스(미쉬네 토라, 우상숭배 법 1:1)도 같은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온켈로스(5:24)

    에녹의 ‘데려가심’을 하나님이 그를 죽게 하신 것으로 옮깁니다. 영생으로 승천했다는 읽기와 구분되는 유대 번역의 입장입니다.

    라쉬(5:24) · 창세기 라바

    에녹은 ‘의인이었으나 흔들릴 수 있어’ 일찍 데려가신 것으로 풀어 약하게 평가합니다. 엘리야와는 다르게 보는 전통입니다.

    라쉬(4:25) · 창세기 라바

    라멕의 아내들과 아담의 대화는 ‘가르치려면 먼저 자기가 하라’는 주제를 설교하는 미드라쉬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수용4:26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유대 전승

    라쉬와 탈굼 온켈로스는 ‘후할’을 ‘속되게 하다’로 읽어, 이때부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우상에게 붙이기 시작했다고 풉니다(온켈로스는 ‘기도를 그쳤다’는 뜻으로 옮김). 마이모니데스도 에노스 세대를 우상숭배의 시작으로 봅니다.

    본문 문맥

    4:26의 앞뒤는 셋의 가문(4:25–26)과 가인의 가문(4:17–24)의 대조입니다. 12:8, 13:4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이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롬 10:13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이 구절을 ‘예배 전체를 가리키는 환유’로 보고, 셋 계통의 경건한 가문이 공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다고 풉니다. 하나님이 그때 다른 이름들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설을 ‘어리석은 우화’라 하며, 모세는 여기서 미신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한 가문의 경건을 칭찬한다고 합니다.

    평가

    평이한 읽기는 칼빈 쪽입니다. ‘후할’이 ‘속되게 하다’로도 읽힐 수 있다는 문법 가능성과 온켈로스의 번역 전통은 존중하되, 앞뒤 문맥(가인 가문과 셋 가문의 대조)과 12:8의 용례가 ‘예배의 시작’ 쪽으로 기웁니다.

    수용에녹은 죽었는가, 데려가졌는가
    유대 전승

    온켈로스는 5:24를 ‘하나님이 그를 죽게 하셨으므로 그는 없었다’고 옮깁니다. 라쉬는 에녹이 쉽게 악으로 기울 수 있어 일찍 데려가셨다고 풉니다.

    본문 문맥

    5장의 후렴은 ‘그리고 죽었더라’이지만 에녹에게만 이 후렴이 없고 ‘데려가셨다’가 나옵니다. 엘리야(왕하 2:11)와 비슷한 표현입니다. 히 11:5는 ‘죽음을 보지 않도록 옮겨졌다’고 풉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5:24에서 ‘이 본문에서 특별한 일이 말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뻔뻔한 논쟁가’라고 하며, 모세가 에녹이 ‘이례적인 방식으로, 기적적으로 주께 받아들여졌다’고 분명히 선언한다고 풉니다. 그는 이것이 ‘복된 부활의 가시적 표본’이며 신자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 주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평가

    본문의 후렴 구조(5장)와 히 11:5, 엘리야의 용례는 칼빈의 읽기를 받쳐 줍니다. 온켈로스의 ‘죽게 하셨다’는 전승의 번역 선택이지 본문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녹의 이야기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에게 죽음 너머의 소망이 있다’는 증언으로 읽힌다는 점이 신약적 읽기와 이어집니다.

    보완5:3 — 아담의 형상으로 낳은 셋
    유대 전승

    라쉬는 아담이 백삼십 세까지 하와와 떨어져 있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4:6). 본문의 형상 어휘 자체는 길게 풀지 않습니다.

    본문 문맥

    1:26–27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5:1은 ‘하나님의 모양’으로, 5:3은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대로 셋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어휘가 같으나 대상이 하나님에서 아담으로 바뀝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5:3에서 셋이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났다는 말이 ‘본성의 첫 기원’을 가리키는 동시에 타락으로 아담이 얻은 오염이 후손 모두에게 흘러내렸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타락한 아담은 자기를 닮은 자녀밖에 낳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3과 벨직 15조가 같은 방향입니다.

    평가

    전승이 이 대목에서 원죄를 말하지 않는 것과 달리, 개혁신학은 1:27과 5:3의 어휘 대비에서 ‘하나님의 형상 → 아담의 형상’이라는 읽기를 이끌어 냅니다. 본문의 대조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죄책의 전가’까지 말하는지는 롬 5장의 도움으로 확인하는 신학적 읽기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에녹이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읽기는 히 11:5를 따른 읽기입니다. 창세기 5:24의 히브리어는 ‘그가 없다,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까지만 말하고, 온켈로스는 ‘죽게 하셨다’로 옮깁니다. 본문 자체는 승천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신약이 ‘죽음을 보지 않았다’(히 11:5)고 풉니다. 두 읽기를 구별해서 가르치세요.

    ‘에녹서’(1 에녹)는 후대의 유대 문헌이며 유다서 14–15절이 인용하지만, 정경 오경 본문은 에녹에 대해 두 절(5:22–24)만 말합니다. 에녹서의 천사 이야기를 창세기 본문으로 읽지 마세요.

    5장의 나이는 마소라·사마리아·칠십인역이 서로 다릅니다. ‘창조 6,000년’ 같은 연대 계산은 어느 본문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계보의 ‘열 세대’도 일부는 건너뛴 압축 계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마 1장의 ‘낳았다’도 후손을 뜻할 수 있음).

    4:23의 ‘라멕이 가인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라쉬가 탄후마에서 인용하면서도 창세기 라바는 이를 말하지 않는다고 밝힌 풀이입니다. 본문은 라멕의 칼의 노래만 적습니다.

    오늘의 물음

    라멕은 ‘칠십칠 배’의 복수를 노래하고,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마 18:22)고 하십니다. 내 마음의 ‘칠십칠 배’는 무엇입니까?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오늘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7. 안식일(토요일) · 일곱째 낭독 · 창세기 5:25–6:8

    므두셀라에서 노아까지의 계보를 마치고, 사람의 악이 커져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며 땅의 사람을 쓸어버리기로 하시지만, 노아는 은혜를 입습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5:29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하리라’라쉬

    노아가 땅의 수고를 덜어 줄 것이라는 뜻으로, 그때까지 쟁기 같은 농기구가 없던 사람들에게 노아가 농기구를 만들어 주었다고 풉니다. 땅은 저주 때문에 밀을 심어도 가시를 냈으나 노아 때에는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5:32 ‘오백 세 된 후에’라쉬

    이전 세대는 백 세에 자녀를 낳았는데 노아는 오백 세에 낳은 이유를 랍비 유단이 묻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악해지면 홍수에 쓸려 가니 늦게 낳게 하여 방주를 짓는 기간을 맞춘다’고 하셨다고 풉니다. ‘셈, 함, 야벳’ 순서는 의로운 셈을 먼저 쓴 것이고 야벳이 맏이라고 합니다.

    6:2 ‘하나님의 아들들’라쉬 · 람반 · 온켈로스

    라쉬는 ‘왕과 귀족의 아들’이라는 풀이를 먼저 주고,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라는 풀이도 소개합니다. 람반은 귀족·재판관이라는 풀이를 택하고, 온켈로스도 ‘귀족의 아들들’로 옮깁니다. 신부 몸치장하는 처녀를 먼저 데려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창세기 라바 26:5).

    6:3 ‘나의 영이 영원히’라쉬

    내 영이 심판할지 자비를 베풀지 다투는 일은 ‘오래’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풉니다.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은 백이십 년 동안 기다리겠다는 인내의 기간이라고 하고, 야벳이 태어난 때부터 홍수까지는 백 년이므로 순서가 앞뒤일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6:4 ‘네피림’라쉬

    ‘떨어지다’에서 나온 이름으로, ‘그들이 떨어졌고 세상이 떨어지게 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6:7). ‘그 후에도’는 에노스 세대와 가인의 자손들의 때를 가리킵니다. 에노스 세대가 바닷물이 넘쳐 세상의 삼분의 일을 덮는 심판을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고 풉니다.

    6:5 ‘항상 악할 뿐’람반

    하나님이 홍수의 이유로 노아에게 말씀하신 것이 ‘포악(6:13)’이고 이 구절은 그 배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예쩨르’가 빚어낸 마음이 여기서 ‘오직’ 악으로 기울었다고 읽습니다.

    6:6 ‘한탄하사’라쉬 · 람반

    라쉬는 ‘나함’을 ‘위로’와 연결해, 사람을 땅에 두신 것이 위로가 되었다고 풉니다. 하늘의 존재였다면 그들도 반역을 부추겼을 테니까요. 또 다른 풀이는 ‘자비에서 심판으로 생각을 바꾸셨다’입니다. 람반은 ‘토라는 사람의 말로 말한다’고 하여 이 표현이 하나님의 본성의 변화가 아님을 밝힙니다.

    6:7 ‘쓸어버리리라’라쉬

    ‘마하(지우다)’는 물로 닦아 내듯 지운다는 뜻이며, 사람이 흙이니 물을 부어 씻어 낸다고 풉니다. ‘짐승까지’는 그들도 길을 어지럽혔기 때문이고, 또 다른 풀이는 만물이 사람을 위해 지어졌으니 사람이 없으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산헤드린 108a).

    6:8 ‘노아는…은혜를 입었더라’람반

    ‘은혜’는 그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고 달콤했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모세에게 ‘내 앞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너를 이름으로 안다’(출 33:17)고 하신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같은 이름을 뒤집어 읽는 말놀이도 있습니다. 노아(נח)를 거꾸로 하면 헨(חן)입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מְתוּשֶׁלַח
    므투셸라흐
    므두셀라

    가장 오래 산 사람(969세). 이름의 뜻은 ‘창(槍)의 사람’ 또는 ‘그가 죽으면 (홍수가) 보내진다’로 풀기도 합니다.

    נֹחַ · יְנַחֲמֵנוּ
    노아흐 · 예나하메누
    노아 · 우리를 위로하리라

    5:29. 라멕이 아들 이름을 ‘노아흐’로 지으며 ‘이 아들이 땅의 수고에서 우리를 위로하리라(예나하메누)’고 합니다. 두 낱말의 어근이 다르지만(נוח·נחם) 말놀이로 이어집니다.

    בְּנֵי הָאֱלֹהִים
    브네이 하엘로힘
    하나님의 아들들

    욥 1:6, 2:1에서는 하늘의 존재들입니다. 6:2의 뜻은 해석이 갈립니다(배경 참고).

    נְפִילִים
    네필림
    네피림(거인·넘어뜨리는 자들)

    ‘나팔(떨어지다)’에서 온 것으로 ‘넘어뜨리는 자들’이라고 라쉬는 풉니다. 민 13:33에서 정탐꾼이 가나안의 거인들을 가리킬 때도 쓰입니다.

    לֹא־יָדוֹן רוּחִי
    로 야돈 루히
    내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야돈’의 뜻이 불분명합니다. ‘다투다·심판하다·머물다’로 읽히며, 라쉬는 ‘내 영이 괴로워하며 다투지 않게 하리라’로 풉니다.

    וַיִּנָּחֶם יְהוָה
    바인나헴 아도나이
    여호와께서 한탄하사

    ‘나함’은 뉘우치다·마음을 바꾸다·위로를 받다의 뜻을 다 가집니다. 노아의 ‘노아흐’와 소리가 얽혀 있습니다.

    יֵצֶר מַחְשְׁבֹת לִבּוֹ רַק רַע כָּל־הַיּוֹם
    예쩨르 마흐쉬보트 립보 라크 라 콜 하용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

    6:5. ‘예쩨르(빚어낸 것)’는 2:7의 ‘빚으시고’와 같은 뿌리입니다. ‘항상’과 ‘오직’으로 총체적 악을 말합니다.

    חֵן
    헨
    은혜(호의)

    6:8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성경에서 이 낱말이 처음 나오는 자리이고, 성경 첫 홍수 이야기의 주제를 한 낱말로 정리합니다.

    히브리 배경

    6:1–4는 성경에서 가장 논쟁적인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세 가지로 읽어 왔습니다. ① 천사 같은 하늘의 존재(1 에녹, 유다서 6, 벧후 2:4, 욥 1:6의 용례와 칠십인역의 일부 사본) ② 셋의 후손(기독교 초기 교부와 어거스틴) ③ 왕과 귀족(라쉬, 람반, 온켈로스는 ‘귀족의 아들들’로 옮김, 시 82:6의 ‘엘로힘’도 재판관). 본문 자체는 이를 정하지 않습니다. 영웅과 신이 사람의 딸들과 낳은 자녀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와 고대 근동에 널리 있어, 성경이 이 이미지를 홍수 직전 ‘인간의 악이 극에 달한 모습’의 하나로 사용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5장 계보의 열 번째 이름 노아에서 이야기는 방향을 바꿔, 사람의 악(6:5)과 하나님의 마음(6:6) 사이에서 노아라는 이름의 ‘쉼·위로’가 의미를 얻습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라쉬(6:2) · 람반 · 온켈로스

    ‘하나님의 아들들’을 귀족·재판관으로 읽는 것이 랍비 전통의 주류이고, 라쉬는 천사로 읽는 풀이도 함께 소개합니다. 람반은 이 대목에서 재판관들이 불의를 일삼은 것을 문제로 삼습니다.

    라쉬(6:3)

    ‘백이십 년’을 사람의 수명 제한이 아니라 홍수까지 기다리시는 인내의 기간으로 풉니다. 이후 아브라함이 175세를 산 점(25:7)이 이 풀이를 뒷받침합니다.

    람반(6:6)

    ‘한탄하셨다’를 ‘하나님이 사람의 말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풉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변한다는 뜻으로 읽지 않습니다.

    전승의 말놀이(6:8)

    노아(נח)를 거꾸로 쓰면 은혜(חן)가 된다는 말놀이가 전해집니다. 출처가 있는 해석이라기보다 이름을 기억하는 설교의 도구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논쟁6:2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유대 전승

    라쉬는 ‘귀족과 통치자의 아들들’을 먼저 말하고 천사설도 소개합니다. 람반은 귀족·재판관설을 택하고, 온켈로스는 ‘귀족의 아들들’로 옮깁니다.

    본문 문맥

    ‘브네이 하엘로힘’은 욥 1:6, 2:1, 38:7에서 하늘의 존재들을, 신 14:1과 호 1:10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시 82:6에서 재판관을 가리킵니다. 유다서 6절과 벧후 2:4는 범죄한 천사를 말하지만 6:1–4와의 직접 연결은 논쟁이 있습니다. 마 22:30은 천사는 장가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입양으로 구별된 셋 가문의 신자들로 보고, 천사가 여자들과 어울렸다는 옛 이야기를 ‘그 어리석음으로 스스로 반박되는 허튼소리’라 부릅니다. 또 귀족과 평민의 혼인으로 보는 ‘갈대아 역본(온켈로스)’의 풀이도 ‘냉랭하다’고 물리칩니다. 문제는 신앙의 구별선을 넘은 결혼이며, 그것이 교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고 풉니다.

    평가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 정하지 않습니다. 칼빈의 셋 계통설은 가인 가문과 셋 가문의 대조(4–5장)에 서 있고, 라쉬·람반의 귀족설은 시 82:6의 용례에 서 있으며, 천사설은 욥기의 용례에 서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성경의 확정된 답’으로 가르치지 말고, 각 읽기의 근거를 함께 두세요.

    수용6:6 ‘한탄하사’와 하나님의 불변성
    유대 전승

    람반은 ‘토라는 사람의 말로 말한다’고 하여 이 표현이 하나님의 본성의 변화가 아님을 밝힙니다. 라쉬는 ‘나함’을 ‘위로’로도, ‘자비에서 심판으로의 생각의 변화’로도 풉니다.

    본문 문맥

    민 23:19와 삼상 15:29는 하나님이 ‘후회하시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출 32:14, 욘 3:10, 삼상 15:11은 같은 낱말로 ‘뜻을 돌이키셨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반응하시는 모습을 사람의 말로 그립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6:6에서 하나님의 후회는 ‘엄밀히는 그분께 속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이해를 위한 것’이며, 하나님은 예기치 않은 일이 없으시고 슬퍼하지도 않으시지만, 죄에 대한 미움의 크기를 알리시려고 성령이 우리 수준에 맞추신다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은 하나님을 ‘몸도 부분도 감정(passions)도 없으신 불변의 분’이라고 말합니다.

    평가

    람반의 ‘토라는 사람의 말로 말한다’와 칼빈의 ‘성령의 맞추심’은 같은 열쇠를 가리킵니다. 같은 주제를 두고 서로 다른 전통이 거의 같은 해석 원리에 도달한 드문 일치점입니다. 다만 개혁신학의 ‘불변성·무감정’ 표현은 후대의 철학적 어휘이고,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마음 아픔(6:6)을 가볍게 보게 하지 않도록 칼빈이 그 끝에서 ‘죄를 미워하라’는 권면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함께 읽으세요.

    보완6:8 ‘은혜를 입었더라’
    유대 전승

    람반은 ‘은혜’를 노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고 달콤했다는 뜻으로 풉니다. 노아(נח)를 거꾸로 쓰면 은혜(חן)가 된다는 말놀이도 전합니다.

    본문 문맥

    6:8은 6:5–7의 심판 선언 직후에 ‘그러나’로 이어집니다. 6:9는 노아의 의로움을 말하고, 히 11:7은 그가 ‘믿음으로’ 경고를 받아 방주를 지었다고 풉니다. 엡 2:8–9는 구원이 믿음을 통한 은혜라고 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6:8에서 ‘사람이 은혜를 입는 것은 자기의 노력과 공로로 구한 때문’이라고 헛되이 추론하는 이들을 지적하며, 노아가 깨끗했다는 것은 인정하되 ‘그 온전함을 어디서 얻었는가? 선행하는(앞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다. 이 은총의 시작은 값없는 자비다’라고 합니다.

    평가

    람반의 읽기는 ‘기뻐하신 행위’를 말하고, 칼빈은 그 행위조차 은혜가 앞서 이루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은혜’가 첫 낱말로 나오고(성경에서 ‘헨’의 첫 용례) 이어서 노아의 의가 서술되는 순서가 칼빈의 강조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수용6:3 ‘육체’의 뜻
    유대 전승

    라쉬는 ‘그도 육체’를 ‘이런 성품이 그에게도 있어 흙이면서 겸손하지 않다’고 풉니다. ‘백이십 년’은 하나님의 인내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본문 문맥

    6:3은 ‘영’과 ‘육’을 대립시킵니다. 고전 2:14는 육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고 하고, 요 3:6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합니다.

    개혁신학

    칼빈은 6:3의 ‘육체’가 영혼의 낮은 부분만이 아니라 온 사람, 곧 지성의 눈멂과 감정의 비뚤어짐을 모두 포함한다고 풉니다. 또 하나님이 오래 다투시다가 이제 그 다툼을 끝내고 심판을 현재형으로 선포하시는 것이라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2는 ‘영혼과 몸의 모든 부분과 기능이 더럽혀졌다’고 합니다.

    평가

    라쉬의 ‘겸손하지 않은 흙’이라는 도덕적 읽기와 칼빈의 ‘온 사람이 육’이라는 읽기는 같은 방향이지만 칼빈은 지성까지 포함해 더 넓게 봅니다. ‘백이십 년’의 뜻은 이 칸에서 다루지 않았으니 앞의 ‘유대 전승’ 칸(라쉬의 인내의 기간)과 함께 보세요.

    바로잡기 · 주의할 점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는 읽기와 셋의 후손으로 보는 읽기, 귀족으로 보는 읽기는 모두 오래된 해석입니다. 본문은 선택하지 않습니다. 마 22:30(천사는 장가가지 않는다)을 천사설 반대 근거로 쓰는 이도 있고, 유다서 6절은 천사설의 근거로 쓰입니다. 어느 한쪽을 ‘성경의 확정된 답’으로 가르치지 마세요.

    ‘백이십 년’을 ‘사람의 최대 수명 제한’으로 읽는 것은 널리 퍼진 읽기이지만, 노아 이후에도 사람이 120세를 넘게 산 것(창 11, 25:7 아브라함 175세)과 부딪힙니다. 라쉬처럼 ‘홍수까지의 유예 기간’으로 읽으면 이 긴장이 풀립니다.

    ‘네피림=거인’은 칠십인역이 ‘기가스’로 옮긴 전통에서 나온 풀이입니다. 히브리어 낱말 자체는 ‘넘어뜨리는 자들’ 또는 ‘떨어진 자들’이며, 본문은 크기를 말하지 않고 ‘용사’ ‘명성 있는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한탄하셨다(וינחם)’를 하나님이 실수하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민 23:19와 삼상 15:29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같은 낱말을 쓰는 점에서, 사람이 이해하도록 하나님이 ‘사람의 말로’ 말씀하신 표현입니다(람반).

    ‘노아와 헨’의 말놀이는 히브리어에서 자음이 뒤바뀐다는 데 의존한 설교이고 본문의 어근 설명은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과 이어 나오는 노아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물음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항상 악할 뿐’이었던 때에도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서 은혜를 찾으셨습니다. 내 주변이 어두울 때 나는 어떤 ‘노아’가 될 수 있습니까? 이번 주 읽은 첫 이야기(창조의 ‘좋았더라’)와 마지막 이야기(‘한탄하사’)가 한 사건의 두 면이라면, 나는 무엇을 보게 됩니까?

    다음 주: 2주 노아흐

    출처와 읽는 법

    • 토라 두루마리 사진: CC0 — Wikimedia Commons

    성경 본문과 구절 번호는 개역개정 기준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번호가 다른 곳은 개역개정 번호로 옮겼습니다. 이 글에 적은 성경 참조는 모두 개역개정에 있는 구절인지 확인했습니다. 유대 전승의 인용은 세파리아(Sefaria)의 영어 번역본을 읽고 한국어로 옮긴 공부용 소개이며,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과 전승이 덧붙인 것은 「바로잡기」 칸에서 갈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