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2주 · 창세기 6:9–11:32
노아흐(נֹחַ) — ‘쉼·위로’. 라멕이 아들을 낳고 ‘이가 우리를 위로하리라(יְנַחֲמֵנוּ 예나하메누)’ 하여 지은 이름입니다(창 5:29).
편의 이름은 6:9 ‘노아의 족보는 이러하니라’의 첫 낱말에서 따왔습니다. 앞 편 마지막 절(6:8)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חֵן 헨)를 입었더라’인데, 히브리어 נח(노아흐)를 거꾸로 쓰면 חן(헨, 은혜)이 됩니다. 노아의 이름 속에 은혜가 거꾸로 들어 있다는, 전승이 즐겨 말하는 말놀이입니다.
이 주간의 큰 줄기: ① 폭력(חָמָס)으로 부패한 땅 → ② 방주와 홍수(창조의 되돌림) → ③ 새 시작과 무지개 언약 → ④ 다시 흩어지는 사람들, 바벨 → ⑤ 아브람이 등장할 자리를 마련하는 데라의 족보.
하프타라는 이사야 54:1–55:5입니다. 54:9에서 하나님이 ‘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מֵי נֹחַ 메이 노아흐) 같으니’ 하시며 다시는 진노로 덮지 않겠다 약속하십니다.

이번 주 읽는 순서
유대 회당은 한 주에 한 편(파라샤)을 일곱 번에 나누어 읽습니다. 안식일에는 일곱 번째를 마치고 예언서(하프타라)를 읽습니다. 날짜는 올해(5787년) 이스라엘 밖(디아스포라) 일정입니다.
| 요일 | 날짜 | 낭독 | 범위 |
|---|---|---|---|
| 일요일 | 10월 11일 | 첫째 낭독 · 리숀 | 창세기 6:9–22 |
| 월요일 | 10월 12일 | 둘째 낭독 · 셰니 | 창세기 7:1–16 |
| 화요일 | 10월 13일 | 셋째 낭독 · 슐리쉬 | 창세기 7:17–8:14 |
| 수요일 | 10월 14일 | 넷째 낭독 · 르비이 | 창세기 8:15–9:7 |
| 목요일 | 10월 15일 | 다섯째 낭독 · 하미쉬 | 창세기 9:8–17 |
| 금요일 | 10월 16일 | 여섯째 낭독 · 쉬쉬 | 창세기 9:18–10:32 |
| 안식일(토요일) | 10월 17일 | 일곱째 낭독 · 슈비이 | 창세기 11:1–32 |
마프티르(안식일 마지막 낭독 반복): 창세기 11:29–11:32 · 하프타라(예언서 낭독): 이사야 54:1–55:5
인용 읽는 법 · 용어 설명
라쉬(Rashi) — 11세기 프랑스의 랍비 슐로모 이츠하키(1040–1105). 토라 전체에 주석을 단 사람입니다. 평이한 뜻(페샤트)을 먼저 쓰고, 필요하면 옛 미드라쉬를 인용합니다.
람반(Ramban) — 13세기 스페인의 랍비 나흐마니데스. 라쉬를 존중하되 자주 반론하고 깊은 신학을 다룹니다. 이븐 에즈라 — 12세기 스페인의 문법학자·주석가로 평이한 뜻과 문법에 밝습니다.
미드라쉬 — 고대 랍비들이 성경을 풀어 낸 해석 문헌의 종류입니다(‘창세기 라바’, ‘탄후마’, ‘시프라’ 등). 본문에 없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설교가 많아, 라쉬의 ‘(창세기 라바 36:7)’은 “이 풀이는 미드라쉬에서 옴”이라는 표시입니다.
탈무드 · 미쉬나 — 미쉬나(2세기 초)와 그 토론인 게마라(5세기경)를 합한 책이 탈무드입니다. ‘산헤드린 108b’는 한 논문 책의 쪽수 표기입니다(a=앞면, b=뒷면).
온켈로스 · 탈굼 — 토라를 아람어로 옮긴 번역(탈굼)입니다. 번역자의 해석이 섞여 있어 ‘가장 오래된 주석’으로도 읽습니다.
바로잡기 — 본문이 말하는 것과 전승이 덧붙인 것을 가르기 위한 칸입니다. 전승 인용은 영어 번역본(세파리아)을 읽고 한국어로 옮겼으므로, 중요한 곳은 원문과 대조해 확인해 주세요.
이 글의 차례
- 일요일 · 창세기 6:9–22
- 월요일 · 창세기 7:1–16
- 화요일 · 창세기 7:17–8:14
- 수요일 · 창세기 8:15–9:7
- 목요일 · 창세기 9:8–17
- 금요일 · 창세기 9:18–10:32
- 안식일(토요일) · 창세기 11:1–32
1. 일요일 · 첫째 낭독 · 창세기 6:9–22
땅은 ‘포악’으로 가득 차고, 하나님은 한 사람 노아와 처음으로 ‘언약’을 말씀하십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하여 방주를 짓습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노아의 이름이 나오니 의인의 이름은 칭찬이 된다(잠 10:7). 또 ‘자손’을 말하지 않고 ‘의인’이라고 먼저 말하니, 의인의 참된 자손은 그의 선행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두 갈래입니다. ‘그 악한 세대에서도 의로웠으니 의로운 세대였다면 더했을 것’이라는 칭찬과, ‘아브라함 시대였다면 대단치 않았을 것’이라는 깎아내림입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그 앞에서 행하였다’(24:40)고 합니다. 노아는 의 안에 서려면 하나님의 부축이 필요했고, 아브라함은 스스로의 힘으로 걸었다고 견줍니다(창세기 라바 30:10).
‘부패(שחת)’는 음란과 우상숭배이고(산헤드린 57a), ‘포악(חמס)’은 강탈입니다.
음란과 우상숭배가 있는 곳에는 선악을 가리지 않는 벌이 온다고 풉니다. 그러나 판결이 확정된 것은 강탈 때문이었다고 합니다(산헤드린 108a). 람반도 하나님이 노아에게 밝히신 이유가 ‘포악’, 곧 강탈과 억압이라는 점을 짚습니다.
노아를 구할 방법은 많았는데 왜 짓게 하셨나? 사람들이 120년 동안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을 보고 이유를 물으면 홍수가 온다고 답하게 하여, 혹시 돌이킬까 해서라고 풉니다. 탈무드는 사람들이 노아를 조롱하며 ‘불 홍수면 불에 안 타는 것이 있고 물 홍수면 막을 방법이 있다’고 맞받았다고 전합니다(산헤드린 108b).
라쉬는 이름일 뿐이라고 하고, 하늘에서 떨어질 유황(גפרית)과 연결해 풀기도 합니다. 이븐 에즈라는 ‘물에 가볍게 뜨는 나무이고 성경에 여기뿐’이라 하고, 이것은 ‘배’가 아니라 노도 없는 상자 모양이라 ‘테바’라 불렀다고 적습니다.
라쉬는 창이라는 풀이와 빛을 내는 보석이라는 풀이를 함께 소개합니다(창세기 라바 31:11). 이븐 에즈라는 ‘정오(צהרים)’와 같은 어근이라 빛이 들어오는 구멍이라고 봅니다. 세 층은 위가 사람, 가운데가 짐승, 아래가 오물이었다고 합니다(산헤드린 108b).
이름의 뜻을 세 갈래로 풉니다. 모든 것을 낡게 했고(בלה), 혼란케 했고(בלל),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끌어내렸다(הוביל)는 것입니다. 온켈로스는 이 낱말을 ‘떠오르게 한 것’이라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언약이 필요했던 까닭은 열매가 썩지 않게 하고 악한 세대가 노아를 죽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1:12). ‘남자와 여자를 따로’ 적은 것은 방주 안에서 부부로 지내지 못했다는 암시로 읽습니다(산헤드린 108b).
짐승들은 스스로 왔고, 방주가 받아들이는 것만 노아가 들였다고 합니다. 람반은 이 때문에 노아가 산과 먼 땅에서 사냥하러 다닐 필요가 없었다고 덧붙입니다.
‘노아가 그리하였다’는 방주를 지은 일을 가리키고, 람반은 방주를 짓고 양식을 모으기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타밈’은 제물로 드릴 짐승의 ‘흠 없음’에도 쓰는 말(출 12:5)입니다. 죄가 없다는 뜻보다 ‘온전히 한결같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에녹(5:22)과 같은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내 앞에서(לְפָנַי) 행하라’(17:1)고 하십니다. ‘…와 함께’와 ‘…앞에서’의 차이를 전승이 길게 따집니다.
6:11, 13에서 땅이 ‘가득 찼다’고 합니다. 이 낱말이 홍수의 직접 이유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낱말은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갈대 상자(출 2:3), 단 둘에만 쓰입니다. 둘 다 ‘물 위에서 건져 내는 그릇’입니다.
‘칠하라’는 동사 וְכָפַרְתָּ(베카파르타)와 한 뿌리 כפר(덮다)입니다. 같은 뿌리가 ‘속죄(כִּפֻּר 키푸르)’에 쓰입니다. ‘덮어서 막아 내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겹칩니다.
6:18, 성경에서 ‘언약’이라는 낱말이 처음 나오는 자리입니다.
히브리 배경
메소포타미아에는 홍수 이야기가 여럿 전합니다(수메르의 지우수드라, 아트라하시스, 길가메시 서사시 11번 토판). 큰 줄거리는 닮았습니다. 신이 홍수를 일으키고, 한 사람이 배를 지어 살아남고, 새를 날려 땅을 확인하고, 나와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유가 다릅니다. 아트라하시스에서는 사람이 늘어 시끄러워 신들이 잠을 못 자서이고, 성경에서는 땅에 가득한 폭력과 부패 때문입니다. 길가메시의 배는 한 변이 약 120규빗인 정육면체지만, 방주는 길이 300·너비 50·높이 30규빗(약 135×22×13m)의 긴 상자입니다. 길이와 너비의 비가 6:1이라 안정된 구조로 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도 눈여겨보세요. 이 장면에서는 대부분 ‘엘로힘’이 쓰이고, 7장 처음부터 ‘여호와’가 섞여 나옵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당대에’를 칭찬으로도, 깎아내림으로도 읽습니다. 같은 낱말에서 노아에 대한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오는 대표 사례입니다.
홍수 세대의 판결이 확정된 이유는 강탈입니다. 음란·우상숭배가 있는 곳에는 선악을 가리지 않는 벌이 오지만, 확정을 가른 것은 포악이라는 구분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120년 동안 방주를 짓게 하신 것은 그 세대가 돌이킬 기회를 주려는 것이라고 봅니다.
‘테바’가 후대 히브리어에서 ‘낱말’을 뜻하는 데 착안해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를 ‘말씀(기도의 낱말) 안으로 들어가라’고 설교합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라쉬는 ‘당대에(בְּדֹרֹתָיו)’를 칭찬으로도(악한 세대에서도 의로웠으니 의로운 세대였다면 더했다), 깎아내림으로도(아브라함 시대였다면 대단치 않았다) 읽습니다.
6:9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6:22는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고 합니다. 겔 14:14, 20은 노아를 다니엘·욥과 함께 의인의 본보기로 들고, 히 11:7은 그가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했다고, 벧후 2:5는 ‘의를 전파하는 자’라고 합니다.
칼빈은 6:9에서 ‘의롭고 완전한’은 흠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속임과 거짓이 없는 마음의 진실함이고, 하나님은 율법의 엄격함으로 자기 백성을 대하지 않고 위선이 없는 이를 자비로 의롭다 하신다고 합니다. ‘당대에’는 당시의 오염이 극심했는데도 그 속에서 물들지 않은 항구함을 강조하는 말이라고 풉니다.
칼빈은 라쉬의 첫째(칭찬) 읽기와 같은 방향입니다. 깎아내리는 읽기는 6:9와 6:22의 서술, 에스겔과 히브리서의 노아 평가와 부딪힙니다. 다만 ‘완전함’은 무죄가 아니라 진실함이라는 칼빈의 설명이 9:21의 포도주 사건까지 함께 읽게 해 줍니다.
라쉬는 6:18의 언약이 필요한 이유를 열매가 썩지 않게 하려는 것, 악한 세대가 노아를 죽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1:12).
6:18은 성경에서 ‘언약(브리트)’이라는 낱말이 처음 나오는 대목입니다. 앞에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이, 뒤(6:22)에는 ‘그대로 다 준행하였다’가 있습니다.
칼빈은 6:18에서 방주 짓기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이 약속을 덧붙여 노아를 격려하신다고 하며, 약속이 붙은 명령이어야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믿음의 교리가 선한 일의 열심을 약하게 한다’는 로마교의 비난은 어리석고, 약속이야말로 우리를 살려 순종하게 한다고 반박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3은 은혜언약에서 하나님이 ‘믿을 수 있게 하는 성령’을 약속하신다고 하고, 14.2는 믿음이 명령에는 순종하고 약속은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라쉬의 설명은 언약을 보호의 수단으로 보고, 칼빈은 약속이 순종을 낳는 방식에 초점을 둡니다. 6:18–22의 순서(약속 → 준행)가 칼빈의 강조를 뒷받침합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노아는 그 세대에서만 의인이었다’는 읽기는 낱말 하나(בְּדֹרֹתָיו)를 붙들고 한쪽으로 끌고 간 해석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동행했고’(6:9),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6:22)고 먼저 말합니다. 신약도 노아를 믿음으로 경고를 받고 방주를 예비한 자(히 11:7), ‘의를 전파하는 자’(벧후 2:5)로 평가합니다.
‘테바 = 낱말’ 설교는 아름답지만 성경 히브리어의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테바는 오직 ‘상자·방주’이고, ‘낱말’의 뜻은 미쉬나 시대 이후의 쓰임입니다. 말놀이는 말놀이로 읽어야 합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다’는 숫자는 본문에 없습니다. 6:3의 ‘백이십 년’(사람의 날수)과 방주를 짓는 기간을 이은 풀이이며, 라쉬도 이를 미드라쉬로 소개합니다.
오늘의 물음
2. 월요일 · 둘째 낭독 · 창세기 7:1–16
하나님이 노아와 온 가족, 짐승들을 방주로 부르시고, 칠 일 뒤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립니다. 문은 하나님이 직접 닫으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6:9와 달리 ‘온전한’은 빠져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는 장점의 일부만 말하고, 없는 데서는 전부 말하는 법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람반은 이 대목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자비)로 바뀐 점을 주목합니다.
장차 이스라엘에게 허락될 짐승을 가리키므로 노아가 토라를 배웠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일곱씩’은 방주에서 나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창세기 라바 34:9).
이 이레는 의인 므두셀라를 애도하는 이레로, 하나님이 그를 존중하여 벌을 미루셨다고 풉니다. 120년의 말미에 더해진 기간입니다(산헤드린 108b). ‘사십 일’은 아이가 빚어지는 기간에 대응하는데, 그들이 불법적인 출생으로 창조주를 괴롭혔기 때문이라고 풉니다.
‘노아도 믿음이 부족한 자들 중 하나여서,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하여 물이 밀려들 때까지 들어가지 않았다’(창세기 라바 32:6). 노아를 낮추어 보는 쪽 전승의 대표 구절입니다.
‘깨끗하지 않은(אשר איננה טהורה)’은 ‘부정한’이라는 거친 말을 피하느라 글자를 여덟 자 더 쓴 것이므로, 사람은 입으로 추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랍비 여호수아 벤 레위가 가르칩니다.
짐승들이 노아에게 ‘스스로’ 왔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2).
랍비 엘리에제르는 마르헤쉬반 달, 랍비 여호수아는 이야르 달이라고 합니다. 일 년을 어느 달에 시작하느냐의 차이입니다. ‘큰 깊음(תהום רבה)’에는 ‘사람의 악이 큼(רבה רעת האדם)’과 같은 ‘큼(רבה)’이 쓰이니, 큰 죄를 큰 깊음으로 갚으신 것이라고 풉니다.
처음에는 ‘비(גשם)’라 하고 17절부터 ‘홍수(מבול)’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처음엔 자비로 부드럽게 부으셔서, 돌이키면 복의 비가 되게 하려 하셨다는 풀이입니다.
사람들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부수고 죽이자’ 하여,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들어가게 하여 누구의 말이 이기는지 보자고 하셨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2:8).
미드라쉬는 곰과 사자로 방주를 둘러싸 사람들이 부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라쉬는 문자 그대로의 뜻이 ‘물을 막아 문을 닫으셨다’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가라(לֵךְ)’가 아니라 ‘오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안에 계신다는 뉘앙스로 읽는 해석이 전해집니다.
정결한 짐승(7:2)은 ‘일곱씩’입니다. 번제(8:20)를 드릴 것을 미리 준비하는 셈입니다.
‘부정하다(טְמֵאָה)’ 대신 ‘정결하지 않은’이라고 돌려 말합니다. 탈무드는 이 한 곳 때문에 토라가 글자를 더 썼다고 가르칩니다.
노아의 홍수를 가리킬 때만 쓰는 특별한 낱말입니다(시 29:10에서 하나님의 보좌 아래 물에도 쓰임). 아카드어 ‘아부부’(홍수)와의 관계를 말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창 1:2의 ‘깊음(תְהוֹם)’과 같은 낱말입니다. 창조 때 갈라 놓은 물이 되돌아오는 그림입니다.
문을 닫으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심판의 문을 닫는 손이 동시에 보호하는 손입니다.
히브리 배경
고대 사람들은 하늘 위에도 물이 있고(궁창 위의 물, 창 1:7) 땅 아래에도 물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7:11은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고 하여 창조 때 나눈 위와 아래의 물이 합쳐지는 그림을 그립니다. 홍수는 비가 많이 온 사건을 넘어 ‘창조의 되돌림’입니다. 시각도 정확히 적습니다. 노아 600세, 둘째 달 17일. 이 연대 계산은 이후 8장에서 방주 안에서 보낸 날들을 날짜 단위로 헤아리는 뼈대가 됩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깨끗하지 않은’(7:8)은 거친 말을 피하려고 글자를 여덟 자 더 쓴 것이라며, 입에서 나오는 말도 조심하라고 가르칩니다.
홍수의 시작을 두고 랍비 엘리에제르는 마르헤쉬반(둘째 달), 랍비 여호수아는 이야르(니산을 첫 달로 센 둘째 달)라고 합니다.
비가 처음에는 자비로 내렸고 회개하지 않자 홍수가 되었다는 구분은 ‘비(גשם)’와 ‘홍수(מבול)’의 낱말 차이에서 나온 풀이입니다.
노아를 믿음이 부족한 자로 낮춰 보는 풀이입니다.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라쉬는 7:7에서 ‘노아도 믿음이 부족한 자 중 하나여서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하여 물이 닥친 뒤에야 방주에 들어갔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2:6).
7:5는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하였다’고 하고, 7:7은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다’고 적습니다. 본문은 노아의 망설임을 말하지 않습니다.
칼빈은 8:1에서 방주 안에서 오래 기다리는 동안 노아의 마음이 여러 감정으로 흔들렸을 것이고 큰 시험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는 받아들인 약속을 끝까지 굳게 붙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그의 믿음과 인내를 단련하셨다는 것입니다.
라쉬의 ‘믿음 부족’은 본문에 없는 추정입니다. 칼빈의 읽기는 ‘흔들림과 붙듦이 함께 있는 시험받은 믿음’으로, 본문의 서술(7:5, 6:22)과 히 11:7에 더 가깝습니다. 노아를 낮추는 풀이와 이상화하는 풀이의 중간 지점입니다.
라쉬는 7:2의 ‘정결한’이 장차 이스라엘에게 허락될 짐승을 가리키므로 노아가 토라를 배웠다는 증거라고 풉니다.
7:2는 정결한 짐승을 일곱씩, 8:20은 노아가 번제를 드린 것을 적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한참 뒤에 주어집니다. 4:4에서 아벨은 이미 짐승 제사를 드렸습니다.
칼빈은 4:3–5에서 제사의 관습이 사람이 지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신 것이고, 그 제사는 속죄의 필요를 가르치는 것이었다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2와 19.1–2는 창조 때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말하고, 이 율법이 타락 뒤에도 ‘완전한 의의 규범’으로 남아 시내산에서 십계명으로 주어졌다고 합니다.
라쉬의 ‘노아가 토라를 배움’은 시대착오적인 풀이입니다. 개혁신학은 이 문제를 ‘창조 때부터의 도덕적 계시와 하나님이 일찍이 정해 주신 제사 질서’로 설명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정결/비정결의 구분이 이미 있었다는 것까지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짐승은 쌍으로 하나씩’이라는 흔한 그림은 본문 한쪽만 본 것입니다. 6:19는 모든 짐승 ‘암수 한 쌍’을, 7:2는 정결한 짐승 ‘일곱씩’을 말합니다. 일반 규칙과 정결한 짐승의 예외로 읽으면 부딪히지 않습니다. 라쉬는 일곱씩을 방주에서 나와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으로 풉니다.
비가 사십 주야(7:12), 물이 불어난 기간은 백오십 일(7:24)입니다. 사십 일 만에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홍수 전체는 이듬해 둘째 달 27일(8:14)까지 약 일 년입니다.
‘정결한 짐승 = 토라를 배운 노아’(라쉬 7:2)는 토라가 주어지기 전의 정결·부정 구분을 거꾸로 읽은 풀이입니다. 본문 자체는 노아가 이미 정결한 짐승을 구분했다고만 말합니다.
오늘의 물음
3. 화요일 · 셋째 낭독 · 창세기 7:17–8:14
물이 땅을 백오십 일 덮은 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시고’ 물이 줄기 시작합니다. 방주는 아라랏 산지에 머물고,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방주는 짐 실은 배처럼 물에 열한 규빗 잠겨 있었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2:9). 8:4에서 이 계산이 입증된다고 합니다.
열다섯 규빗은 산꼭대기 위로 열다섯 규빗이라는 뜻으로 읽습니다(요마 76a).
‘마른 땅에 있던 것’이 죽었다는 말은 바다의 물고기는 죽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습니다(산헤드린 108a).
문자적 뜻은 ‘노아 하나만’입니다. 미드라쉬는 ‘아크(אך)’를 한정으로 읽어 노아가 짐승을 돌보느라 피를 토했다고 풀고, 의인도 이 세상에서 갚음을 받는다는 잠 11:31을 인용합니다.
‘엘로힘’은 본래 엄한 정의의 이름인데 의인의 기도로 자비로 바뀐다고 합니다. 악인의 행위는 반대로 자비를 정의로 바꾼다고 하며 6:5의 여호와가 6:6에서 달리 쓰인 점을 근거로 듭니다. 짐승을 기억하신 까닭은 홍수 전에도 그들이 짝을 어기지 않았고 방주에서도 따로 지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샘들이 터질 때는 ‘모든’ 샘이었는데 막힐 때는 ‘모든’이 빠졌다고 짚습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샘, 곧 티베리아의 온천 같은 것은 막지 않으셨다는 풀이입니다(산헤드린 108a).
라쉬는 7월 17일이라는 날짜로 방주가 열한 규빗 잠겼음을 계산합니다. 온켈로스는 ‘아라랏’을 ‘쿠르두’ 산들이라 옮깁니다. 이븐 에즈라는 11:2의 ‘동쪽에서’를 근거로 아라랏이 동쪽에 있다고 봅니다.
라쉬는 까마귀가 노아가 자기 짝을 해칠까 의심하여 방주 둘레를 맴돌기만 했다고 풉니다. 탈무드에서 레쉬 라키쉬는 까마귀가 ‘당신의 주인도 나를 미워하고 당신도 나를 미워한다’고 설득력 있게 항변했다고 전합니다.
‘샬라흐’는 ‘놓아주다’의 뜻입니다. 쉴 곳을 찾으면 돌아오지 않을 터이므로 물이 빠졌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레를 더 기다렸다는 데서 처음에도 이레를 기다린 것을 알 수 있다고 계산합니다.
문자적으로는 ‘뜯었다’입니다. 미드라쉬는 ‘타라프’를 ‘먹이’로 읽어, 비둘기가 ‘꿀처럼 단 것을 사람 손에서 받느니 쓴 것을 하나님 손에서 받겠다’고 말했다고 풉니다.
‘정월’은 랍비 엘리에제르는 티쉬리, 랍비 여호수아는 니산이라 합니다(로쉬 하샤나 11b). 8:14의 열흘은 태양년이 태음년보다 긴 날수여서, 홍수 세대에 대한 벌이 태양년 한 해 동안 이어졌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3:17).
히브리어 낱말 공부
히브리어 ‘기억하다(זָכַר 자카르)’는 머릿속의 회상이 아니라 ‘행동에 옮기다’입니다(출 2:24, 삼상 1:19). 이 절이 홍수 이야기의 한가운데 돌쩌귀입니다.
‘머물다·쉬다(נוח 누아흐)’는 노아(נֹחַ)의 이름과 같은 뿌리입니다. ‘쉼’이라는 이름이 방주에서 이루어집니다.
복수형입니다. 한 봉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아라랏 지역의 산들’입니다.
‘요나(יוֹנָה)’는 선지자 요나의 이름과 같은 낱말입니다.
‘타라프(טָרָף)’는 ‘뜯다·찢다’이고 같은 뿌리 ‘테레프’가 ‘먹이’입니다. 방금 뜯은 싱싱한 잎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배경
‘아라랏’은 아시리아 비문에 나오는 ‘우라르투’ 왕국(오늘의 동부 터키·아르메니아·이란 서북부)과 연결됩니다. 오늘 터키의 아르 산(5,137m)을 ‘아라랏 산’이라 부르는 것은 후대의 관습입니다. 새를 날려 육지를 가늠하는 것은 옛 항해자의 방법이어서, 길가메시 서사시 11번 토판에도 비둘기·제비·까마귀가 차례로 날아갑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같은 세계에서 나온 것을 보여 주면서, 감람 잎 한 장으로 ‘땅이 다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는 증거를 주는 점이 다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엘로힘’은 본래 정의의 이름이지만 의인의 기도로 자비로 바뀌고, 악인의 행위는 자비를 정의로 바꾼다고 봅니다.
‘아라랏’을 ‘쿠르두 산들’로 옮깁니다. 오늘 터키의 아르 산이라는 해석은 전승 전체의 공통 의견이 아닙니다.
까마귀는 짝을 해칠까 의심했다는 풀이(라쉬)와, ‘당신의 주인도 나를 미워한다’고 노아에게 항변했다는 풀이(레쉬 라키쉬)가 따로 전해집니다.
비둘기가 ‘쓰더라도 하나님의 손에서’ 받겠다고 했다는 풀이입니다. 라쉬는 문자적 뜻이 ‘뜯었다’임을 먼저 적습니다.
홍수가 열두 달에 열흘을 더해 태양년 한 해 동안 이어졌다고 계산합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라쉬는 ‘엘로힘’이 본래 엄한 정의의 이름이지만 의인의 기도로 자비로 바뀌고, 악인의 행위는 자비를 정의로 바꾼다고 풉니다. 창세기 라바 33:3은 엘로힘을 심판의 속성, 여호와를 자비의 속성으로 봅니다.
8:1의 ‘엘로힘이 노아를 기억하사’는 자비의 행위인데 정의의 이름이 쓰입니다. 7:16에서는 ‘여호와’가 문을 닫으십니다. 출 2:24, 창 19:29에서도 ‘기억하다’는 구원의 행동을 시작하신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칼빈은 8:1에서 하나님은 노아를 한 순간도 잊으신 적이 없지만, 방주가 다섯 달 넘게 물 위에 떠 있던 지체가 ‘잊으신 듯’ 보이게 하여 노아의 믿음과 인내를 훈련하신 것이라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5.1은 하나님이 ‘틀림없는 예지와 자유롭고 불변하는 경륜에 따라’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고 합니다.
이름을 속성의 교대로 읽는 전승의 도식은 8:1에서 스스로 설명이 필요해집니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경륜 안에서, 사람에게는 ‘잊으신 듯’ 보이는 방식으로 일하신다고 읽고(칼빈의 맞추심), 본문의 이름 대비를 속성론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방주가 터키 아르 산에서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본문의 근거가 없습니다. 본문은 ‘아라랏 산들’이라고 지역만 밝히고, 온켈로스는 ‘쿠르두’라고 옮깁니다.
‘올리브 가지를 문 비둘기 = 평화’의 상징은 후대 기독교 도상에서 퍼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땅이 말랐다’는 신호입니다. 유대 전승은 오히려 ‘쓴맛이라도 하나님의 손에서’라는 독립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까마귀의 항변(산헤드린 108b)과 비둘기의 대답(에루빈 18b)은 본문에 없는 상상입니다. 가르침으로는 풍성하지만 본문의 사실로 가르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오늘의 물음
4. 수요일 · 넷째 낭독 · 창세기 8:15–9:7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제단을 쌓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해도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하십니다. 새 복과 첫 번째 계명(피·살인)이 주어집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방주에 들어갈 때는 남자와 여자를 따로 적었는데(6:18) 나올 때는 ‘너와 네 아내’를 함께 적어 부부 생활이 다시 허락되었음을 보인다고 합니다. ‘땅에서 번성하라’는 ‘방주 안에서가 아니라’는 뜻이라 짐승도 방주에서는 짝을 나누었다고 봅니다.
노아가 ‘하나님이 정결한 짐승을 일곱 쌍 들이라 하신 것은 제사를 드리려는 것이었다’고 이해했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4:9).
이 말씀은 그때 예언자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모세에게 토라를 쓰라 명하신 날에야 알리셨다고 합니다.
‘민네우라브’에서 ‘ו’가 빠진 철자를 근거로, 태아가 독립하여 움직이기 시작할 때부터 악한 충동이 주어진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4:10). 람반은 사람이 이렇게 창조되었고, 이 성향은 어릴 때 강하다는 두 가지를 하나님의 자비의 이유로 풉니다.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한 것은 맹세라는 표시입니다. 이사야 54:9의 ‘노아의 물’이 가리키는 것이 이것입니다.
여섯 철을 두 달씩 나누어 씨 뿌림·추위·겨울·거둠·여름·더위를 꼽습니다(바바 메지아 106b). ‘낮과 밤이 쉬지 않으리라’는 홍수 동안에는 멈췄다는 뜻으로 읽습니다(창세기 라바 34:11).
아담에게는 푸른 채소만 주셨으나 이제는 푸른 채소처럼 모든 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산헤드린 59b).
‘생명 있는 채로의 살’은 살아 있는 짐승에서 떼어 낸 지체를 먹지 말라는 금지(에벨 민 하하이)이고, 이어서 ‘피’까지 금하는 것입니다.
‘너희 피’는 스스로 자기 피를 흘린 자에게도 찾으신다는 뜻으로 풉니다(창세기 라바 34:13). 9:6의 ‘사람에 의해’는 증인이 있으면 죽인다는 뜻이고,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4:14).
9:1은 복이었고 이 절은 명령입니다(크투봇 5a). 살인 다음에 놓은 것은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을 피 흘림에 견주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예바못 63b).
히브리어 낱말 공부
‘니호아흐(נִיחֹחַ)’는 ‘누아흐(쉬다)’에서 왔습니다. ‘노아흐 → 쉼 → 니호아흐’. 노아의 이름과 같은 소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쉬게 하는 제사를 낳습니다.
‘예쩨르’는 ‘빚다(יצר)’에서 온 말로 도공이 흙을 빚는 동사입니다(2:7 וַיִּיצֶר). 마음이 ‘빚어낸 모양’이라는 뜻입니다.
‘나아르(נַעַר 아이)’에서 나온 말입니다. 6:5의 ‘항상(כָּל־הַיּוֹם)’과 비교해 보세요.
9:4에서 ‘피 있는 채로 먹지 말라’고 하며 생명(נֶפֶשׁ 네페쉬)이 피에 있다고 합니다(레 17:11과 이어짐).
דם(피)과 אדם(사람)이 맞물리는 소리놀이입니다.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피를 흘린다는 균형이 낱말 속에 있습니다.
히브리 배경
8:20은 ‘제단(מִזְבֵּחַ)’이라는 낱말이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자리입니다. 정결한 짐승 중에서 번제를 드립니다(앞 장에서 일곱씩 데려온 이유). 같은 순간을 길가메시에서는 신들이 제물 냄새를 ‘파리처럼 몰려와 맡는’ 장면으로 그리지만, 성경은 신인동형의 표현을 쓰되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말씀하셨다’(8:21)고 하며 오히려 은혜의 결심을 담습니다. 8:21의 ‘다시는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사람이 선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여전히 악하지만’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어려서부터’의 철자가 달라 ‘태아가 움직일 때부터 악한 충동이 주어진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4:10). 이어지는 하나님의 ‘그럼에도’가 여기서 더 두드러집니다.
이 대목을 바탕으로 ‘노아 자손의 일곱 계명’(우상숭배·신성모독·재판 제도·살인·성적 부도덕·도둑질·산 짐승의 살)을 정리합니다. 이 일곱을 지키는 이방인을 ‘의로운 이방인’으로 봅니다.
9:6의 ‘사람 안에서(בָּאָדָם)’를 ‘사람 안에 있는 존재(태아)’로 읽는 해석을 랍비 이스마엘이 제시합니다.
아담에게는 채소만 허락되었고 노아 때 고기가 허락되었다고 하며, 살아 있는 짐승의 살을 금하는 것이 가장 먼저 주어진 육식의 규칙이라고 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라쉬는 ‘어려서부터’를 ‘태아가 움직일 때부터 악한 충동이 주어진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4:10). 람반은 이 악함이 사람이 그렇게 창조되었고 젊을 때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치지 않으시는 이유가 된다고 풉니다.
6:5(‘항상 악할 뿐’)는 홍수의 이유이고, 8:21(‘어려서부터 악하다’)은 다시는 멸하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 사람이 나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상태가 같은데도 은혜가 먼저 선언됩니다.
칼빈은 8:21에서 노아의 제사가 ‘향기’를 낸 것은 짐승의 연기가 하나님을 달래서가 아니라 자기 생명이 자비의 선물임을 인정한 경건 때문이며, 이는 사람의 이해에 맞추신 표현이라고 합니다. 또 사람이 마땅히 받을 대로 대하신다면 날마다 홍수가 필요하므로 하나님이 심판의 방식을 바꾸어 땅을 보존하신다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4와 벨직 신앙고백 15조는 이 부패가 모든 실제 죄의 뿌리라고 합니다.
람반과 칼빈은 ‘사람의 악함이 곧 은혜의 이유가 된다’는 방향에서 만납니다. 차이는 깊이입니다. 람반은 이 성향을 약화시켜(젊을 때) 하나님의 자비를 설명하고, 개혁신학은 이를 전적 부패로 깊게 읽으며 은혜의 값없음을 더 강조합니다. 본문의 ‘6:5와 8:21의 거의 같은 말’이 두 읽기를 모두 허용합니다.
라쉬는 9:5의 ‘사람의 손’을 고의로 죽인 경우로, ‘형제의 손’을 실수로 죽인 경우로 나누어 풀고, 9:6의 ‘사람에 의해’는 증인이 있으면 죽인다는 뜻이라 합니다. 산헤드린 57b는 ‘사람 안에서’를 태아까지 포함하는 말로 읽습니다.
9:6은 사람을 죽이는 이유를 하나님의 형상에 둡니다. 출 21:12–14와 민 35:11–24는 고의와 과실을 구분하고 도피성을 둡니다.
칼빈은 9:5에서 ‘유대인이 살인을 네 종류로 나누는 것은 하찮다’고 하고, 9:6의 ‘사람에 의해’를 ‘증인 앞에서’로 읽는 것도 억지라며, 이 구절은 살인이 얼마나 잔혹한 범죄인지를 강조하는 말이라고 풉니다. 또 하나님이 살인자를 징벌하시되 관원에게 칼을 들려 피 흘림이 처벌 없이 지나가지 않게 하신다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1은 관원에게 ‘칼의 권세’를 맡기셨다고 합니다.
칼빈이 이 자리에서 구분을 물리치는 것은 9:5–6 본문에서 구분을 읽어 내는 것이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고의와 과실의 구분 자체는 모세의 율법(출 21, 민 35)에 분명히 있습니다. 문제는 구분이 있느냐가 아니라, 이 구절에서 그 구분을 읽어 내도 되느냐입니다. 칼빈의 신중한 구분이 오히려 정확합니다.
산헤드린 56a는 노아 자손이 재판 제도, 신성모독, 우상숭배, 부도덕한 성관계, 살인, 도둑질, 산 짐승의 살을 먹는 것의 일곱 계명을 받았다고 정리합니다. 근거는 창 2:16 등의 해석입니다.
9:4–6에 직접 있는 것은 피째 먹지 말라와 살인 금지뿐입니다. 롬 2:14–15는 이방인에게도 율법이 마음에 새겨져 있다고 하고, 행 15:20, 29는 이방인 신자에게 우상의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1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고 하며(4.2), 19.2는 이 율법이 타락 뒤에도 십계명으로 주어진 ‘완전한 의의 규범’이라고 합니다.
랍비 체계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보편 도덕 질서를 이끌어 내려는 시도로, 개혁신학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자연적 도덕법)’과 방향이 닮았습니다. 차이는 근거입니다. 랍비들은 창 2:16 같은 구절의 해석에, 개혁신학은 창조 때 새겨진 율법과 롬 2:14–15에 둡니다. 어느 쪽이든 ‘일곱’이라는 숫자는 본문에 없는 체계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일곱 계명’은 본문에 일곱으로 나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문에 직접 있는 것은 9:4–6의 ‘피째 먹지 말라·살인하지 말라’뿐입니다. 나머지는 랍비들이 2:16 같은 구절에서 끌어내 만든 체계입니다. 유익한 체계이지만 ‘성경이 말한 일곱’은 아닙니다.
8:21의 ‘마음의 생각이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인간관은 6:5의 ‘항상 악할 뿐’과 짝입니다. ‘인간이 악해서 홍수를 보냈다’와 ‘악해도 다시는 보내지 않겠다’ 사이의 간격이 은혜입니다. 전승이 이를 ‘악한 충동’으로 정리하는 것과 기독교의 원죄 이해가 갈리는 지점입니다. 람반은 오히려 이 악한 성향이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시는 이유라고 읽습니다.
‘노아의 제사가 처음의 제단’이라는 것은 ‘제단(מִזְבֵּחַ)’이라는 낱말이 처음 나온다는 뜻이지,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제단 없이 드려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의 물음
5. 목요일 · 다섯째 낭독 · 창세기 9:8–17
하나님이 노아와 모든 생물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구름 속의 활’을 그 표징으로 삼으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하나님이 아들들에게는 아버지를 통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들들은 예언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네 뜻에 동의한다’는 뜻이라 합니다. 노아가 다시 자녀를 낳기를 두려워했으나, 하나님이 세상을 다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다는 풀이입니다(탄후마).
‘땅의 짐승’은 사람과 함께 다니는 짐승이고, 이어 나오는 말은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맹수까지 포함시킵니다.
‘레도롯(לדרת)’이 ‘ו’ 없이 쓰여 있어, 믿음이 ‘모자란’ 세대에만 표징이 필요하다고 풉니다. 히스기야 세대와 시므온 벤 요하이 세대는 완전히 의로워 필요 없었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5:2).
완료형 ‘내가 두었다’는 무지개가 이미 창조 때부터 있었음을 보인다고 합니다. 젖은 공기에 햇빛이 비치는 자연 현상이며, 하나님이 여기서 새 뜻을 주신 것이라는 풀이입니다. 활의 양 끝이 땅을 향해 굽은 모양은 ‘하늘에서 땅으로 화살을 쏘지 않겠다’는 뜻이고, 전사들이 평화를 청할 때 무기를 거꾸로 드는 법에 비깁니다.
라쉬는 ‘구름을 일으키리니’를 세상에 어둠과 멸망을 가져오려는 때로 읽습니다. 람반은 하나님의 정의의 속성이 구름에 나타날 때 무지개를 보고 자비로 기억하신다고 풉니다.
라쉬는 ‘하늘의 정의의 속성과 너희 사이’로 읽습니다. 람반은 미드라쉬가 그렇게 풀려는 것이 아니라고 짚습니다.
하나님이 무지개를 가리키며 ‘이것이 내가 말한 표징’이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전쟁에 쓰는 ‘활’과 같은 낱말입니다. ‘내 활을 구름 속에 두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무기를 걸어 두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오트’는 안식일(출 31:13), 할례(창 17:11)에도 쓰입니다. 언약마다 눈에 보이는 표징을 주십니다.
8:1의 ‘기억하사’와 이어집니다. 표징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장치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장치입니다(9:15–16).
언약이 사람에게만 아니라 새·가축·들짐승 모두에게 세워집니다(9:10).
6:11–12에서 땅이 ‘부패하였다’와 6:13 ‘멸하리라’, 9:11, 15 ‘멸하는 홍수’는 모두 같은 뿌리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망가뜨린 것을 하나님이 거두시는 모양이었는데, 이제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히브리 배경
고대 근동의 조약은 증인과 표징을 두었습니다. 여기서는 그 표징을 하나님이 하늘에 거십니다. 바벨론 창조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에는 마르둑의 활이 하늘에 별자리로 놓이는 대목이 있어, 일부 학자는 ‘하늘에 걸린 신의 활’이라는 상을 비교합니다. 성경은 이를 신의 승전 기념이 아니라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바꿉니다. 이 언약은 사람이 지켜야 할 조건 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맹세하신 것이라는 점도 특징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무지개는 자연 현상이지만 하나님이 새 뜻을 주신 표징이라고 봅니다. 활이 땅을 향해 굽은 모양은 ‘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대대에’의 결여된 철자를 근거로, 완전히 의로운 세대(히스기야, 시므온 벤 요하이)에는 표징이 필요 없다고 풉니다.
무지개를 보면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에 신실하시며 그 말씀을 이루시는 분을 찬송하나이다’라는 복을 합니다.
무지개를 뚫어지게 쳐다보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닮은 빛이기 때문입니다(겔 1:28).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람반은 9:13의 완료형 ‘내가 두었다’를 근거로 무지개가 이미 창조 때부터 있었고 하나님이 새 뜻을 주신 것이며, 활이 땅을 향한 모양은 ‘쏘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라쉬는 ‘대대에(לדרת)’의 결여된 철자를 믿음이 모자란 세대에만 표징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풉니다.
9:12–17은 무지개를 ‘언약의 표징(오트)’이라 하고, 하나님이 구름 속의 무지개를 보시고 ‘기억하리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출 31:13)과 할례(창 17:11)도 ‘오트’라 불립니다.
칼빈은 9:13에서 ‘홍수 이전에는 무지개가 없었다’고 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하찮다고 하며, 하늘의 활은 본래 자연에 있었으나 여기서 ‘표징과 보증’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어 새 직무를 받았다고 풉니다. 또 표징은 말씀과 떼어서는 안 되고, 우리 마음의 무지함과 연약함을 돕기 위해 믿음을 붙들어 주는 도구라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7.1은 성례를 ‘은혜언약의 표징과 인’이라고 정의합니다.
람반과 칼빈이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무지개는 자연 현상이며 하나님이 새 뜻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읽기는 9:13의 완료형과 ‘오트’의 용례에 서 있습니다. 라쉬의 ‘믿음이 모자란 세대에만’은 철자 한 자에서 끌어낸 미드라쉬이고, 칼빈의 ‘우리 연약함을 돕는 표징’이 본문의 목적(‘기억하리라’)에 가깝습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무지개가 홍수 때 처음 생겼다’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 이상입니다. 람반은 완료형 ‘내가 두었다’를 근거로 무지개가 창조 때부터 있었고, 하나님이 여기서 새 뜻을 주신 것이라고 봅니다.
‘다시는 홍수가 없다’는 약속은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מַבּוּל לְשַׁחֵת כָּל־בָּשָׂר)’에 한정됩니다. 지역적인 물난리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대로 믿음이 부족한 세대에만 표징이 필요하다’는 라쉬의 풀이는 철자 하나(לדרת)에서 이끌어낸 미드라쉬입니다. 본문은 ‘영원한 언약의 표징’(9:16)이라고만 말합니다.
오늘의 물음
6. 금요일 · 여섯째 낭독 · 창세기 9:18–10:32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고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는 일이 일어나며, 저주는 ‘가나안’에게 떨어집니다. 이어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70민족이 나뉩니다(열국 족보).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를 여기 굳이 적은 것은, 함이 죄를 지어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라쉬는 ‘바야헬’을 ‘속되게 했다’로 읽어 노아가 먼저 다른 것을 심었어야 했다고 하며, 방주에 포도 가지를 가져갔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6:3). 람반은 ‘이쉬 하아다마’를 ‘땅의 주인’으로 푼 라쉬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라쉬는 어떤 랍비들은 가나안이 보고 아비에게 알렸다고 하고, 또 거세했다는 설과 성적으로 욕보였다는 설을 전합니다(산헤드린 70a). 이븐 에즈라는 본문이 노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고 하며, 가나안이 범인이라고 봅니다.
‘셈이 (옷을) 가져다’는 단수여서 셈이 더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셈의 자손이 특권을 받았다고 풉니다. ‘얼굴을 돌이켜’가 반복된 것은 가까이 가서도 돌아선 채로 덮었다는 뜻입니다(창세기 라바 36:6).
라쉬는 함이 ‘우리 아버지에게 넷째 아들이 생기려 한다’며 노아가 넷째 아들을 낳지 못하게 했으니, 노아가 함의 넷째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6:7). 이븐 에즈라는 ‘구스 사람들이 노아의 저주로 종이 되었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하며, 홍수 뒤 첫 왕이 구스 사람 님롯이었음을 증거로 듭니다.
‘셈의 하나님’은 장차 가나안 땅을 셈의 후손에게 주실 분입니다. ‘셈의 장막에 거하시게’는 하나님의 임재(쉐키나)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온켈로스도 이렇게 옮깁니다. 미드라쉬는 고레스(야벳 자손)가 둘째 성전을 지었지만 쉐키나는 솔로몬(셈 자손)의 첫 성전에 거하셨다고 풉니다(요마 10a).
‘디라스’는 페르시아라고 풉니다(요마 10a).
‘용사’는 온 세상이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부추긴 힘, 곧 바벨탑 계획을 가리킵니다(창세기 라바 23:7). ‘사냥꾼’은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올무에 걸어 하나님께 반역하게 한 것이고, ‘여호와 앞에서’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일부러 도발했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그래서 뻔뻔하게 악을 행하는 사람을 ‘님롯 같다’고 말한다고 합니다(시프라).
앗수르는 아들들이 님롯의 말을 듣고 반역하는 것을 보고 그들 가운데서 떠나 나갔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7:4).
‘야벳의 형’이라 하고 ‘함의 형’이라 하지 않은 것은, 두 사람은 아버지를 공경했고 함은 욕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에벨의 모든 자손’은 ‘강 건너편(עבר)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때에 언어가 혼란해지고 시날 평지에서 흩어졌다고 풉니다. 아버지 에벨이 아들 이름으로 이를 예고했으니 에벨은 예언자였다고 봅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노아가 농부가 되어 포도나무를 심었다’(9:20)의 ‘시작하여’는 ‘속되게 되다(חלל)’와 철자가 같습니다. 라쉬는 ‘스스로를 속되게 했다’로 읽습니다.
저주가 함이 아니라 ‘가나안’에게 향합니다. 라쉬는 함이 노아가 넷째 아들을 낳지 못하게 했으므로 넷째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다고 풉니다.
‘야프트(יַפְתְּ 넓히다)’와 ‘예페트(야벳)’의 말놀이입니다.
‘셈(שֵׁם)’은 ‘이름’입니다. 바벨 사람들이 ‘우리 이름을 내자’(11:4) 한 것과 대비됩니다.
‘리프네(앞에서)’를 ‘여호와를 마주하여, 대항하여’로 읽는 전승이 있습니다.
10:25 ‘벨렉(פֶּלֶג)’의 이름 풀이입니다. 그의 때에 땅이 나뉘었다는 것은 다음 장 바벨의 흩어짐과 이어지는 복선입니다.
히브리 배경
10장의 ‘열국표’는 지도와 같은 목록입니다. 야벳 계열은 에게해·소아시아·북쪽, 함 계열은 이집트·구스·가나안·메소포타미아의 일부, 셈 계열은 아시리아·엘람·아람·아라비아 쪽입니다. 족보이지만 인종 목록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알던 세계의 ‘민족·지역 지도’입니다. 70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완전수로, 야곱의 가족이 70명(창 46:27)인 것과 맞물립니다. 님롯의 이름은 학자들이 메소포타미아의 영웅·왕의 모습과 비교합니다. 포도주 사건은 가나안 땅에 사는 이들을 정복할 때 이스라엘이 얻은 ‘도덕적 이유’를 말해 주려는 이야기로 읽는 학자도 있습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함이 노아에게 한 일을 두고 ‘거세했다’와 ‘성적으로 욕보였다’의 두 풀이가 전해집니다. 본문의 침묵을 더 큰 죄의 암시로 읽는 전통입니다.
함이 노아가 넷째 아들을 낳으려는 것을 막았기에, 노아가 함의 넷째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다고 풉니다.
본문은 노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고 하며, 가나안이 범인이라고 봅니다. 구스 사람이 노아의 저주로 종이 되었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못 박습니다.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를 ‘쉐키나(임재)를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리라’로 옮기고 풉니다.
님롯을 온 세상이 하나님께 반역하게 한 자로 봅니다. 바벨탑과 아브라함을 박해한 왕으로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후대 미드라쉬이고 본문에는 없습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라쉬는 함이 노아가 넷째 아들을 낳지 못하게 해서 가나안이 저주받았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36:7). 이븐 에즈라는 ‘구스 사람이 노아의 저주로 종이 되었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하며 홍수 뒤 첫 왕이 구스 사람 님롯임을 듭니다. 탈무드(산헤드린 108b)에는 함이 피부가 검어지는 벌을 받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9:25의 저주는 ‘가나안’에게 향합니다. 본문에 피부색 이야기는 없고, 후대에 가나안 족속이 이스라엘에게 복속되는 일(수 9:23, 왕상 9:20–21)이 이 저주의 한 성취로 읽힙니다.
칼빈은 9:25에서 노아가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 까닭을 두 가지로 다룹니다. 하나님이 하신 큰 존귀 때문에 저주가 아들에게 옮겨졌다는 유대 풀이는 ‘헛된 추측’이며, 하나님은 죄를 지은 자의 후손에게까지 심판을 확장하시되 악한 후손은 스스로 허물이 있는 자라고 풉니다. 이 대목에서 칼빈은 피부색이나 아프리카인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븐 에즈라와 본문 문맥이 같은 쪽을 가리킵니다. 저주는 가나안에게 한정되고 피부색은 본문에 없습니다. ‘함의 저주’를 특정 인종을 노예로 삼는 근거로 쓴 일은 본문, 이븐 에즈라, 그리고 이 대목의 칼빈 주석 어디에서도 지지되지 않습니다.
라쉬와 온켈로스는 ‘하나님이 쉐키나를 이스라엘(셈) 가운데 거하게 하시리라’고 풉니다. 미드라쉬(요마 10a)는 고레스(야벳 자손)가 둘째 성전을 지었으나 쉐키나는 솔로몬(셈 자손)의 첫 성전에 거하셨다고 풉니다.
9:27의 ‘거하다(וְיִשְׁכֹּן)’의 주어는 본문에 적혀 있지 않아 ‘하나님’도 ‘야벳’도 가능합니다. 사 56:6–7, 행 15:14–17, 엡 2:13–19는 이방인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옴을 말합니다.
칼빈은 9:27에서 야벳의 후손이 한동안 셈의 장막에서 멀리 흩어졌다가 결국 ‘같은 장막, 같은 집’으로 모일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풉니다. 이천여 년 뒤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믿음으로 모였고, 이 예언은 복음 안에서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입양으로 갈라진 이들을 한 백성으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같은 구절을 전승은 ‘이스라엘 안의 하나님의 임재’로, 칼빈은 ‘이방인의 부르심’으로 읽습니다. 주어의 모호함이 두 읽기를 모두 가능하게 합니다. 개혁신학의 읽기는 이 구절의 문법적 가능성과 신약의 이방인 구원 증언이 함께 받쳐 주고, 전승의 읽기는 이스라엘의 성소 중심성이 받쳐 줍니다.
라쉬는 님롯을 온 세상이 하나님께 반역하게 한 자로, 사냥꾼을 말로 사람의 마음을 올무에 걸어 하나님께 반역하게 한 자로 풉니다. ‘여호와 앞에서’는 일부러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도발했다는 뜻입니다(창세기 라바 37:2).
10:8–9의 ‘기보르(용사)’와 ‘짜이드(사냥)’는 본문에서 평가되지 않지만, 11:1–9의 바벨과 이어집니다. 미 5:6은 앗수르를 ‘님롯의 땅’이라 부릅니다.
칼빈은 10:8에서 사람들이 서로 평등하게 존경하던 때에 님롯이 인간임을 잊은 듯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지배한 야심 때문에 그의 이름이 ‘영원한 오명의 낙인’을 받았다고 풉니다. 그는 ‘사냥’이 사납게 약탈하는 폭군의 은유라고 합니다.
라쉬와 칼빈 모두 님롯을 부정적으로 읽지만 초점이 다릅니다. 라쉬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 칼빈은 사람을 향한 교만과 폭군의 지배입니다. ‘여호와 앞에서’를 도발로 읽는 것은 전승의 해석이고, 평이한 읽기는 ‘여호와 앞에서도 두드러진’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함의 저주’로 특정 인종을 노예로 삼아도 된다는 주장은 성경이 아닙니다. 본문에 저주를 받은 이는 함이 아니라 ‘가나안’이고, 피부색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탈무드(산헤드린 108b)에는 방주 안에서 규율을 어긴 세 존재 중 함이 ‘피부가 검게 변하는 벌을 받았다’는 말이 있는데, 본문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후대에 노예제를 정당화하는 데 잘못 쓰였습니다. 이븐 에즈라 자신이 ‘구스 사람이 저주로 종이 되었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반박했습니다.
함이 ‘무엇을 했는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거세/욕보임 설은 전승의 추정이고, 이븐 에즈라는 가나안이 범인이라고 봅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아버지의 수치를 보고 형제에게 알렸다’와 두 형제가 ‘뒷걸음쳐 덮어 드렸다’는 대비입니다.
노아가 취한 사건을 변호도 비난도 없이 담담히 서술하는 본문의 태도를 기억하세요. 성경은 영웅의 약점을 지우지 않습니다.
오늘의 물음
7. 안식일(토요일) · 일곱째 낭독 · 창세기 11:1–32
한 언어, 한 말을 쓰던 사람들이 벽돌로 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하다가 흩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셈에서 데라까지의 족보가 아브람을 소개합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라쉬는 ‘거룩한 언어’, 곧 히브리어라고 합니다(탄후마). 이븐 에즈라는 학식 있는 이나 무식한 이나 같은 말을 했고, 흩어진 때는 홍수 뒤 백 년쯤이라고 봅니다.
세 가지로 풉니다. ① 한 계획: ‘하늘을 하나님만 독점하게 둘 수 없으니 올라가 싸우자.’ ② 한 분(하나님)에 관한 말. ③ 날카로운 말: ‘1,656년마다 하늘이 흔들리니 받침대를 만들자’(창세기 라바 38:6).
그들은 모두 들어갈 자리를 찾아다녔으나 시날 평지 말고는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8:7).
바벨은 평지라 돌이 없어서 흙을 구워 벽돌(타일)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라쉬는 하나님이 재앙으로 흩으시지 못하게 하려는 것으로 읽습니다. 이븐 에즈라는 정반대로, 탑을 쌓은 이들이 정말 하늘에 오르려 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반역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몰랐던 것이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는 신 1:28처럼 과장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실 필요는 없으나, 재판관들에게 직접 보고 이해하기 전에 피고를 유죄라 선언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고 합니다(탄후마).
하나님이 하늘의 법정과 의논하셨고 이는 지극한 겸손이라고 합니다(산헤드린 38b). 또 ‘자, 짓자’에 ‘자, 내려가자’로 갚으셨다고 풉니다.
이 흩어짐은 오는 세상에 몫이 없음을 뜻한다고도 합니다(산헤드린 107b). 그러나 두 세대의 죄를 견주어, 홍수 세대는 강탈과 다툼 속에 있었고 바벨 세대는 사랑과 우애 속에 있어서 후자는 멸망하지 않았다고 풉니다. 다툼이 얼마나 하나님께 미운 것이며 화평이 얼마나 큰지 배우라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38:6).
문자적으로는 ‘아버지 생전에’입니다. 미드라쉬는 데라가 아브람을 님롯에게 고발했고, 아브람은 불가마에서 구원받았으나 줄을 잘못 선 하란이 불에 타 죽어서 ‘우르(불) 카스딤’이라 한다고 풉니다. 라쉬는 메나헴 벤 사룩의 다른 풀이도 함께 적습니다. ‘우르’는 골짜기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스가는 사래의 다른 이름이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미래를 내다보았고, 모든 사람이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풀이입니다(메길라 14a).
데라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뒤로도 60년을 더 살았다고 계산합니다(데라 70세에 아브람 출생, 아브람 75세에 출발, 데라는 205세에 사망). 본문이 데라의 죽음을 먼저 적은 이유는 ‘아브람이 늙은 아버지를 두고 떠났다’는 소문이 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합니다(창세기 라바 39:7). 또 ‘하란(חרן)’의 ‘נ’이 뒤집혀 있어 아브라함 때까지 하나님의 진노(חרון)가 세상에 있었다는 뜻이라 풉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사파(입술)’는 말의 ‘가장자리’를 뜻합니다. ‘아하딤’은 ‘하나씩의 것들’, 곧 한 가지 뜻으로 일치한 말입니다.
‘헤마르’는 역청, ‘호메르’는 회반죽(진흙)입니다. 이 말놀이를 통해 인공물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12:2)고 약속하신 것과 정면으로 대비됩니다.
‘내려가자’(11:7)입니다. 사람들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하나님이 ‘내려가서’ 보셔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바벨’은 아카드어 ‘밥 일리(신의 문)’에서 나온 이름이지만, 본문은 히브리어 ‘발랄(혼잡케 하다)’로 풀어 조롱합니다(11:9).
‘우르(אוּר)’는 지명이지만 히브리어로는 ‘불’과 같은 낱말이라 전승이 불의 이야기를 만듭니다.
히브리 배경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마다 계단식 신전탑(지구라트)이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에테멘아키(하늘과 땅의 기초의 집)’가 대표적이고, 꼭대기가 신이 내려오는 자리였습니다. 11:3의 ‘구운 벽돌과 역청’은 돌이 없는 충적평야의 건축 방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람이 신에게 올라가려 한 탑을 하나님이 ‘내려가서’ 보시는 모습은 신전탑을 가진 문화를 향한 풍자입니다. 그리고 11장 후반은 이 이야기를 아브람으로 곧바로 이어 줍니다. 흩어진 인류 중에서 한 사람을 부르는 12장의 배경이 이 장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같은 말’을 ‘하나님과 싸우자는 한 계획’으로 풉니다. 한편 ‘우리 이름을 내자’는 말에서 반역보다 자기 영광의 욕심을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탑을 쌓은 사람들이 정말 하늘에 오르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몰랐던 것이라고 보며, 라쉬와 다르게 읽습니다.
홍수 세대와 바벨 세대의 죄를 견주어, 서로 사랑하며 화목했기에 바벨 세대는 멸망하지 않았다고 풉니다.
‘우르 카스딤’을 ‘갈대아 사람의 불’로 풀어 아브람이 불가마에서 구원받은 이야기를 말하지만, 같은 라쉬가 ‘우르’를 골짜기로 푼 메나헴 벤 사룩의 풀이도 함께 적습니다.
데라가 아브람이 떠난 뒤 60년을 더 살았다는 계산은 라쉬의 풀이입니다. 본문이 죽음을 먼저 적은 것은 아브람이 아버지를 버렸다는 소문을 막으려는 것이라고 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라쉬는 ‘같은 말’을 ‘하나님과 싸우자는 한 계획’으로 풉니다(창세기 라바 38:6). 이븐 에즈라는 그들이 정말 하늘에 오르려 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닿는’은 과장법이며, 하나님의 뜻을 몰랐을 뿐이라고 풉니다.
11:4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9:1(‘땅에 충만하라’)에 거스르는 말입니다. 11:9의 ‘혼잡케 하다’와 행 2장의 오순절 방언은 이 흩어짐이 복음으로 모이는 대조입니다.
칼빈은 11:3–4에서 이 일이 폭군 님롯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서로 부추긴 공모이고, 석재도 모르타르도 없는 어려움을 무릅쓴 점이 죄를 더 무겁게 한다고 풉니다.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는 자랑하는 과장법이며, ‘이름을 내자’는 하늘을 버리고 땅에서 불멸을 구하는 인간의 끊임없는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칼빈과 이븐 에즈라는 ‘꼭대기가 하늘에’를 과장으로 본다는 점에서 같고, 죄의 성격(교만·야심)에서는 칼빈이 라쉬와 더 가깝습니다. 본문의 직접 증거는 ‘이름을 내자’와 ‘흩어짐을 면하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쟁이라는 라쉬의 풀이는 본문에 없습니다.
라쉬는 ‘우르(불) 카스딤’을 데라가 아브람을 님롯에게 고발했고 아브람이 불가마에서 구원받았으며 하란이 거기서 죽었다는 미드라쉬로 풉니다. 같은 라쉬가 메나헴 벤 사룩이 ‘우르’를 ‘골짜기’로 풀었다는 것도 적습니다.
11:28은 하란이 ‘아버지 데라 앞에서 그의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다고만 적습니다. 수 24:2는 데라가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합니다.
칼빈은 11:28에서 ‘유대인들이 고유 지명을 보통 명사로 바꾸어 불 속에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꾸며낸 이야기’이고 수 24:1–2가 이 가문이 그 땅만큼이나 미신에 물들어 있었다고 증언한다고 합니다. 우르의 뜻은 불(‘우르’), 해의 광채, 골짜기 등 여러 가능성이 있으나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합니다.
칼빈의 비판은 본문 문맥에 맞고, 라쉬도 이야기와 평이한 풀이를 나란히 적습니다. 불가마 이야기는 본문의 사실이 아니라 미드라쉬의 설교입니다. 수 24:2가 이 가문의 우상숭배라는 본문의 증거입니다.
라쉬는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았고 아브람이 75세에 하란을 떠났으니 그때 데라는 145세였고 이후 60년을 더 살았다고 계산합니다. 본문이 데라의 죽음을 먼저 적은 이유는 아브람이 아버지를 버렸다는 소문을 막으려는 것이라고 풉니다.
11:26, 32, 12:4를 그대로 읽으면 데라 죽음 뒤 아브람이 떠난 것처럼 읽힙니다. 행 7:4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옮기셨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오경은 데라의 나이를 145세로 적어 이 긴장을 푸는 이문입니다.
칼빈은 11:32에서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 그때 아버지가 205세에 죽었으니 아브람은 데라가 130세에 낳았고, 11:26의 ‘아브람, 나홀, 하란’ 순서는 출생 순서가 아니라 중요도 순서라고 풉니다. 아브람이 하란에서 60년을 머물렀다는 풀이는 ‘매우 있을 법하지 않다’고 하고 스데반(행 7:2–4)의 증언을 따릅니다.
본문 숫자를 마소라 본문대로 읽으면 라쉬(떠난 뒤 60년 더 삶)와 칼빈(데라의 죽음 뒤 떠남)이 갈리고, 행 7:4는 칼빈의 읽기에 가깝습니다. 사마리아 오경의 이문은 같은 긴장을 풀 또 다른 길입니다. 한쪽을 ‘성경이 정한 답’으로 확정하기보다 근거(마소라 숫자, 행 7:4, 이문)를 함께 두세요.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아브람이 우상을 부수고 불에 던져졌다는 이야기는 라쉬가 소개해도 본문에는 없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하란이 ‘아버지 데라 앞에서’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다(11:28)는 것뿐입니다. 라쉬 자신도 ‘우르’를 골짜기로 풀이한 다른 해석을 함께 적습니다. 수 24:2는 데라가 다른 신을 섬겼음을 말합니다.
데라의 나이 문제: 11:26의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는 반드시 아브람이 맏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라쉬처럼 ‘데라는 아브람이 떠난 뒤 60년 더 살았다’고 보면 행 7:4와 창 12:4 사이의 긴장이 풀리지만, 이것은 계산에 의한 풀이입니다.
바벨 이야기를 ‘언어가 갈라진 형벌’로만 읽으면 절반입니다. 본문의 죄는 언어가 아니라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자기 중심의 연합입니다. 라쉬는 하나님께 반역하려는 계획으로 읽고 이븐 에즈라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고 읽는데, 본문의 직접 증거는 ‘이름을 내자’와 ‘흩어짐을 면하자’(11:4)뿐입니다. 오순절(행 2)에서 이 흩어짐이 복음으로 다시 모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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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와 읽는 법
- 토라 두루마리 사진: CC0 — Wikimedia Commons
성경 본문과 구절 번호는 개역개정 기준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번호가 다른 곳은 개역개정 번호로 옮겼습니다. 이 글에 적은 성경 참조는 모두 개역개정에 있는 구절인지 확인했습니다. 유대 전승의 인용은 세파리아(Sefaria)의 영어 번역본을 읽고 한국어로 옮긴 공부용 소개이며,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과 전승이 덧붙인 것은 「바로잡기」 칸에서 갈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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