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포션 1주 · 창세기 1:1–6:8
브레시트(בְּרֵאשִׁית) — ‘태초에, 처음에’. 토라의 첫 낱말이자 첫 편의 이름입니다. 이 한 주에 창조·에덴·타락·가인과 아벨·노아 직전까지가 들어 있습니다.
창세기 라바 1:10은 왜 세상이 ‘ב(베트)’로 시작했는지 묻습니다. ב는 뒤·위·아래가 막히고 앞만 열려 있어서, ‘창조 이전과 위·아래를 캐묻지 말고 창조된 날부터 이후를 탐구하라’는 뜻이라고 풉니다.
이번 주 일곱 날의 구성: ① 엿새의 창조와 안식일(1:1–2:3) → ② 둘째 이야기, 에덴과 첫 계명(2:4–19) → ③ 여자와 뱀, 타락(2:20–3:21) → ④ 쫓겨남, 가인과 아벨(3:22–4:18) → ⑤ 라멕과 문명의 시작(4:19–22) → ⑥ 라멕의 노래, 셋과 에녹(4:23–5:24) → ⑦ 노아의 탄생과 홍수 직전(5:25–6:8).
하프타라는 이사야 42:5–43:10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신 이’(42:5)로 시작하여 창조 이야기와 짝을 이룹니다.

이번 주 읽는 순서
유대 회당은 한 주에 한 편(파라샤)을 일곱 번에 나누어 읽습니다. 안식일에는 일곱 번째를 마치고 예언서(하프타라)를 읽습니다. 날짜는 올해(5787년) 이스라엘 밖(디아스포라) 일정입니다.
| 요일 | 날짜 | 낭독 | 범위 |
|---|---|---|---|
| 일요일 | 10월 4일 | 첫째 낭독 · 리숀 | 창세기 1:1–2:3 |
| 월요일 | 10월 5일 | 둘째 낭독 · 셰니 | 창세기 2:4–19 |
| 화요일 | 10월 6일 | 셋째 낭독 · 슐리쉬 | 창세기 2:20–3:21 |
| 수요일 | 10월 7일 | 넷째 낭독 · 르비이 | 창세기 3:22–4:18 |
| 목요일 | 10월 8일 | 다섯째 낭독 · 하미쉬 | 창세기 4:19–22 |
| 금요일 | 10월 9일 | 여섯째 낭독 · 쉬쉬 | 창세기 4:23–5:24 |
| 안식일(토요일) | 10월 10일 | 일곱째 낭독 · 슈비이 | 창세기 5:25–6:8 |
마프티르(안식일 마지막 낭독 반복): 창세기 6:5–6:8 · 하프타라(예언서 낭독): 이사야 42:5–43:10
인용 읽는 법 · 용어 설명
라쉬(Rashi) — 11세기 프랑스의 랍비 슐로모 이츠하키(1040–1105). 토라 전체에 주석을 단 사람입니다. 평이한 뜻(페샤트)을 먼저 쓰고, 필요하면 옛 미드라쉬를 인용합니다.
람반(Ramban) — 13세기 스페인의 랍비 나흐마니데스. 라쉬를 존중하되 자주 반론하고 깊은 신학을 다룹니다. 이븐 에즈라 — 12세기 스페인의 문법학자·주석가로 평이한 뜻과 문법에 밝습니다.
미드라쉬 — 고대 랍비들이 성경을 풀어 낸 해석 문헌의 종류입니다(‘창세기 라바’, ‘탄후마’, ‘시프라’ 등). 본문에 없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설교가 많아, 라쉬의 ‘(창세기 라바 36:7)’은 “이 풀이는 미드라쉬에서 옴”이라는 표시입니다.
탈무드 · 미쉬나 — 미쉬나(2세기 초)와 그 토론인 게마라(5세기경)를 합한 책이 탈무드입니다. ‘산헤드린 108b’는 한 논문 책의 쪽수 표기입니다(a=앞면, b=뒷면).
온켈로스 · 탈굼 — 토라를 아람어로 옮긴 번역(탈굼)입니다. 번역자의 해석이 섞여 있어 ‘가장 오래된 주석’으로도 읽습니다.
바로잡기 — 본문이 말하는 것과 전승이 덧붙인 것을 가르기 위한 칸입니다. 전승 인용은 영어 번역본(세파리아)을 읽고 한국어로 옮겼으므로, 중요한 곳은 원문과 대조해 확인해 주세요.
이 글의 차례
- 일요일 · 창세기 1:1–2:3
- 월요일 · 창세기 2:4–19
- 화요일 · 창세기 2:20–3:21
- 수요일 · 창세기 3:22–4:18
- 목요일 · 창세기 4:19–22
- 금요일 · 창세기 4:23–5:24
- 안식일(토요일) · 창세기 5:25–6:8
1. 일요일 · 첫째 낭독 · 창세기 1:1–2:3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엿새 동안 지으시고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뒤, 일곱째 날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랍비 이삭은 토라가 율법책이면 첫 계명(출 12:2, 이 달이 너희에게 달의 시작이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대답은 시 111:6, 곧 하나님이 땅을 지으시고 마음대로 누구에게나 주실 수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을 빼앗았다고 비난받을 때를 위한 대답입니다(야콜 쉼오니).
‘이 구절은 설명을 크게 외친다’고 하며 두 풀이를 줍니다. 랍비들의 풀이는 세상이 토라(잠 8:22 ‘그의 길의 처음’)와 이스라엘(렘 2:3 ‘그의 소산의 처음’)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자대로 읽으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 땅이 혼돈하고…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창조 때 쓰인 이름이 ‘여호와’(자비)가 아니라 ‘엘로힘’(심판자)인 것은, 처음에 하나님이 세상을 엄한 정의로 세우시려 했으나 그렇게는 존속할 수 없음을 아시고 자비를 앞세워 정의와 함께 두셨기 때문이라고 풉니다.
람반은 이 구절을 ‘무에서의 창조’로 받아들입니다. 이븐 에즈라는 ‘바라’가 곧 ‘무에서 만들다’를 뜻한다고 단정하지 않는다고 하며, 대부분의 주석가가 그렇게 풀지만 근거가 문법만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가 공중에 떠서, 비둘기가 둥지 위를 맴돌듯 물 위를 운행했다고 풉니다. 이븐 에즈라는 ‘루아흐’를 바람으로 보아 땅을 말리는 도구라고 읽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좋았다’ 다음에 ‘나누셨다’가 나오는 것을 두고, 악인이 쓰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보시어 첫날의 빛을 의인을 위해 ‘감추셨다’고 풉니다. 이븐 에즈라는 ‘나누셨다’가 물리적 분리가 아니라 ‘낮·밤이라 이름 붙이셨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하늘은 첫날에 창조되었으나 유동적이던 것이 둘째 날 하나님의 꾸짖음으로 굳었다고 풉니다. 둘째 날에는 ‘좋았더라’가 없는데, 물을 가르는 일이 다툼의 시작이어서라고 풉니다. ‘하늘(샤마임)’은 ‘물을 지고 오라’, ‘거기 물이 있다’, ‘불과 물’로 읽는 말놀이로도 소개됩니다(하기가 12a).
해·달·별은 첫날에 이미 지어졌으나 넷째 날 궁창에 걸리도록 명하셨다고 풉니다(하기가 12a). ‘메오로트’의 철자(ו 없이 쓴 מארת)는 ‘저주(מארה)’로도 읽혀, 이 날을 위험한 날로 보았다고 합니다. ‘징조와 절기와 날과 해’는 장차 이스라엘이 받을 절기 계산을 내다본 것이라고도 풉니다.
해와 달이 같은 크기로 지어졌으나 달이 ‘두 왕이 한 왕관을 쓸 수 없다’고 항의하여 작아졌다고 합니다. 본문은 단지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라고 적습니다.
라쉬는 하나님이 천사들과 의논하신 것이라 풉니다. 사람이 천사를 닮았으니 시기할 수 있어 미리 의논하신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겸손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단이 ‘복수’를 빌미 삼을 수 있어도 본문은 겸손의 가르침을 감추지 않는다고 덧붙입니다. 이븐 에즈라는 ‘나아세’를 수동분사로 읽는 견해도 소개합니다.
‘ירדו’는 ‘다스리다’와 ‘내려가다’의 두 뜻이 있어, 합당하면 짐승을 다스리고 합당하지 않으면 짐승보다 낮아져 다스림을 당한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이 구절과 2:21(갈빗대)의 긴장을, 처음에 두 얼굴로 지으셨다가 나누셨다는 미드라쉬로 풉니다. 같은 라쉬가 2:21에서 ‘갈빗대’를 ‘옆구리’(두 면)로 풉니다.
‘여섯째 날’에만 정관사 ‘ה(5)’가 붙은 것을, 창조가 이스라엘이 다섯 권의 토라를 받는다는 조건 위에 서 있다는 암시로 풉니다.
랍비 시므온은 살과 피의 인간은 정확한 시각을 몰라 자기 날에 시간을 보태야 하지만, 하나님은 때를 정확히 아시므로 일곱째 날 ‘바로 그 순간’ 일을 마치신 것으로 쓰였다고 풉니다. 이븐 에즈라는 ‘마치셨다’가 금요일 일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복’은 만나로 주어졌다고 풉니다. 평일에는 한 오멜, 여섯째 날에는 두 배가 내리는 복입니다. ‘거룩하게’도 만나로 했다고 합니다. 이븐 에즈라는 복이 안식일에 몸에는 생식력의 새로워짐을, 영혼에는 지성의 더함을 준다고 풉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로쉬(머리)’에서 나온 낱말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 대개 ‘…의 처음’이라는 연결형으로 쓰이기에 라쉬는 문법으로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시작하신 때에’로도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 동사의 주어는 성경에서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재료로 만들다’는 עָשָׂה(아사)와 구분해서 쓰입니다. 다만 ‘무에서’라는 뜻이 이 낱말에서 곧바로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이븐 에즈라는 짚습니다.
라쉬는 ‘놀랄 만큼 텅 빈’으로 풉니다. 두 낱말의 소리 놀이가 ‘혼돈’을 들려줍니다.
‘메라헤페트’는 어미 독수리가 새끼 위를 ‘맴돌다’(신 32:11)와 같은 낱말입니다. ‘루아흐’는 영·바람·숨의 세 뜻이 겹칩니다.
‘두드려 펴다(רקע)’에서 온 말입니다. 대장장이가 쇠를 얇게 두드려 펴듯 하늘을 펼쳐 놓았다는 그림입니다.
‘첼렘(형상)’은 조각된 상, ‘드무트(모양)’는 닮음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바로잡기 참고).
‘샤바트’의 뿌리 ש־ב־ת는 ‘일을 그치다’입니다. ‘피곤해서 쉬다’가 아니라 ‘일을 마치고 멈추다’에 가깝습니다.
둘째 날부터는 서수 ‘둘째’ ‘셋째’인데 여기만 기수 ‘하나’입니다. 라쉬는 ‘그날 하나님이 홀로 세상에 계셨기 때문’이라고 풉니다.
히브리 배경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에서 세상은 신들의 싸움에서 나옵니다. 마르둑이 바다 여신 티아마트를 쪼개 하늘과 땅을 만듭니다. 창세기의 ‘깊음(תְּהוֹם 테홈)’은 이 이름과 소리가 닮았지만 여기서는 신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물일 뿐입니다. 해와 달에도 ‘샤마쉬·야레아흐’(해·달 신의 이름)를 쓰지 않고 ‘큰 빛·작은 빛’이라 부릅니다.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등불’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한 것도 당시에는 왕에게만 쓰던 표현을 모든 사람에게 돌린 것입니다. 구조도 눈에 띕니다. 첫 사흘은 ‘형태를 만드는 날’(빛과 어둠, 하늘과 물, 땅과 식물)이고 나머지 사흘은 그 안을 ‘채우는 날’(해·달·별, 새·물고기, 짐승과 사람)입니다. 일곱 날로 이루어진 주(週)는 고대 근동의 어떤 문화에서도 자연의 주기에서 나오지 않는, 창조 이야기에서 나온 독특한 시간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이유를 두 갈래로 대답합니다. 하나는 땅이 하나님의 것이어서 누구에게 주시든 자유라는 것(가나안 정복 변호)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이 토라와 이스라엘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에서 창조’를 두고 람반은 분명히 받아들이지만 이븐 에즈라는 ‘바라’라는 낱말만으로는 증명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같은 전승 안에서도 이 교리의 근거에 대한 의견이 다릅니다.
세상이 ‘ב’로 시작한 이유를, 창조 이전과 위·아래를 캐묻지 말라는 경고로 읽습니다.
첫날의 빛이 의인을 위해 감추어졌다는 전승은 이후 ‘장차 올 세상의 빛’ 사상의 뿌리가 됩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라쉬는 ‘브레쉬트’를 연결형으로 읽어 ‘창조하기 시작하셨을 때’로도 풉니다. 람반은 ‘무에서’를 분명히 받아들이지만, 이븐 에즈라는 ‘바라’라는 낱말만으로는 그 뜻이 증명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1은 천지의 시작을 말합니다. ‘무에서’라는 교리는 시 33:9(말씀하시니 이루어졌다), 롬 4:17(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히 11:3(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았다)을 합쳐서 읽을 때 분명해집니다.
칼빈은 창 1:1에서 ‘만들다(야짜르)’가 아니라 ‘창조하다(바라)’가 쓰였으므로 ‘세상은 무에서 만들어졌다’고 결론짓고, 영원한 질료를 말하는 이들을 배격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1은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되 엿새 동안’이라 하고, 벨직 신앙고백 12조도 ‘무에서’라고 합니다.
교리의 방향은 람반과 개혁신학이 같습니다. 다만 칼빈의 ‘바라 대 야짜르’ 논증은 낱말 하나에 무게를 너무 싣는다는 점에서 이븐 에즈라의 지적이 정확합니다. 교리는 이 한 낱말이 아니라 여러 본문이 함께 받쳐 줍니다.
라쉬는 ‘우리가 만들자’를 하나님이 천사들과 의논하신 겸손으로 풉니다. 이븐 에즈라는 ‘엘로힘’을 존칭의 복수로 봅니다.
1:2(하나님의 영), 1:3(하나님이 이르시되)은 창조 이야기 안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영과 말씀이 함께 일하심을 보입니다. 신약은 이를 요 1:1–3, 골 1:16으로 풉니다. ‘엘로힘’의 복수는 문법만으로는 하나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칼빈은 1:26에서 하나님이 땅이나 천사와 의논하셨다는 유대 풀이를 물리치고, ‘존엄의 복수’ 설도 그런 어법이 당시에 없었다며 물리칩니다. 그는 ‘하나님은 밖의 조언자를 부르지 않으시니 신격 안에 구별이 있음을 안다’고 하여 위격의 복수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1:1의 ‘엘로힘’에서는 반대로, 복수 명사로 삼위일체를 증명하려는 억지 풀이를 삼가라고 경고합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사벨리우스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1:26은 신격 안의 의논으로 읽는 것이 본문과 신약 전체 맥락에 맞는다는 것이 칼빈의 판단이고, 1:1의 복수형 하나로 교리를 증명하려는 설교는 칼빈 자신이 말렸습니다. 두 곳을 구별하세요.
라쉬는 ‘형상’을 우리의 유형, ‘모양’을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으로 풉니다(1:26). 이 형상을 따로 지으신 손길의 결과로 보기도 합니다(1:27).
1:26–28, 5:1–3, 9:6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이유를 하나님의 형상에 둡니다. 신약은 새 사람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는 것(엡 4:24, 골 3:10)을 형상의 회복으로 말합니다.
칼빈은 형상과 모양을 구별하지 않고, 형상을 몸에서 찾는 견해를 물리치며, 그 중심을 ‘의와 참된 거룩’(골 3:10, 엡 4:23)과 마음·지성에 두고, 이 형상이 타락으로 지워졌다가 중생으로 회복된다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0문은 ‘지식과 의와 거룩, 피조물을 다스림’이라 하고, 신앙고백 4.2는 ‘지식, 의, 참된 거룩’이라 합니다.
라쉬가 말하는 ‘분별하는 지력’은 개혁신학의 ‘지식’ 면과 겹칩니다. 개혁신학은 여기에 ‘의와 거룩’이라는 도덕적 면과 ‘타락으로 훼손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다’는 구속사적 면을 더합니다. 본문의 인간론(5:1–3과 9:6의 이어짐)을 더 길게 따라가는 읽기입니다.
라쉬는 2:3의 ‘복 주사 거룩하게’를 만나(출 16장)로 풉니다. 평일에는 한 오멜, 여섯째 날에는 두 배가 내리는 복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읽기입니다. 이븐 에즈라는 안식일에 몸과 영혼이 새로워진다고 봅니다.
2:2–3은 ‘이스라엘’이라는 말 없이 창조의 완성에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적습니다. 출 20:8–11은 이 창조의 틀 위에서 계명을 줍니다. 막 2:27(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히 4:9–10(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이 신약의 빛입니다.
칼빈은 2:3에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따로 구별하신 것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이며, 엿새 동안 지으신 것도 하나님이 시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일을 묵상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7은 안식일을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을 묶는 영속적 도덕 계명’으로 보고, 부활 이후에는 한 주의 첫날(주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본문 2:3만 보면 이스라엘에 한정하지 않는 창조 질서로 읽는 쪽이 문맥에 가깝습니다. 다만 ‘토요일에서 주일로 옮겨졌다’는 부분은 창세기가 아니라 신약 증거에 의존한 신학적 결론이며, 유대교와 안식교와의 쟁점이 되는 자리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과 그 이행의 근거를 구분해서 가르치세요.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엘로힘’이 복수형이고 ‘우리가 만들자’가 복수라서 삼위일체의 증거라는 주장은 문법만으로는 서지 않습니다. 이븐 에즈라는 엘로힘이 존칭의 복수라고 봅니다. 라쉬도 이 복수 때문에 이단이 오해할 소지가 있음을 알면서 천사와의 의논으로 풉니다. 기독교는 신약의 빛에서 이 구절을 읽지만, 본문 자체의 문법만으로 논증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엿새’의 ‘날(욤)’이 24시간인지는 본문이 결정하지 않습니다. 1:5에서 ‘욤’은 낮(빛이 있는 시간)을, 2:4는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신 날에’라고 하여 창조 전체를 ‘한 날’이라 부릅니다. 같은 낱말이 문맥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므로, 하나의 길이로 단정하는 것은 본문 이상의 주장입니다.
달이 항의하여 작아졌다(훌린 60b)는 이야기, 첫날 빛이 감추어졌다는 이야기, 두 얼굴의 아담은 모두 본문에 없는 미드라쉬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큰 빛과 작은 빛’이라는 이름의 담담함입니다.
오늘의 물음
2. 월요일 · 둘째 낭독 · 창세기 2:4–19
두 번째 창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고 에덴에 두시며 첫 계명을 주시고,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라쉬는 ‘이것들’이 앞에서 말한 것들이고, 천지의 모든 산물이 첫날에 창조되었다는 증거라고 풉니다. 이븐 에즈라는 ‘톨도트’를 ‘하늘과 땅이 낳은 것(나무·생물)의 이야기’로 읽고, ‘만드신 날’의 ‘아사’를 ‘최종 모양으로 정하다’로 풉니다.
비가 없었던 이유는 땅을 갈 사람이 없어 비의 쓸모를 아는 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와서 비가 필요함을 깨닫고 기도하자 비가 내리고 풀이 났다고 풉니다.
깊음을 올리고 구름에 물을 채워 흙을 적셨고 그러고 나서 사람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빵 굽는 이가 물을 먼저 붓고 반죽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흙을 땅의 사방에서 모았으니 어디서 죽어도 땅이 그를 받아 장사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몸은 땅의 것으로, 영혼은 하늘의 것으로 지어졌다고 봅니다. ‘생령’은 짐승에게도 쓰이지만 사람의 영은 이해와 말을 받은 가장 높은 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완전한 이름(여호와 엘로힘)이 쓰인 것은 영혼의 우월함과 근원을 가리키는 암시라고 풉니다.
라쉬는 ‘에덴의 동쪽에 동산을 만드셨다’고 풉니다. 람반은 온켈로스가 ‘미케뎀’을 ‘이전에’로 옮겼음을 소개하며,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동산이 있었다는 읽기도 있음을 알립니다.
람반은 생명나무가 ‘동산 가운데’라고 적히고 선악과는 그렇게 적히지 않은 점을 주목합니다. 이븐 에즈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지식, 곧 선악의 지식’을 뜻하는 이름이라고 풉니다.
라쉬는 비손을 나일 강이라 풀고 이름을 ‘넘쳐 흐르다(פשו)’에서 찾습니다. 이븐 에즈라는 사아디야 가온의 같은 풀이에 반대합니다. 또 라쉬는 구스와 앗수르가 당시에는 나라 이름이 아니었으나 훗날의 이름으로 적은 것이라고 합니다(크투봇 10b).
하나님이 사람을 ‘부드러운 말로 데려다’ 동산에 들게 하셨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16:5). 이븐 에즈라는 ‘경작하다’는 물을 주는 일, ‘지키다’는 보살피는 일이라고 봅니다.
‘먹는 그때에 죽을 자로 정해진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사람은 곧바로 죽지 않았으나 죽음의 선고가 그때부터 적용되었다는 읽기입니다.
라쉬는 하늘에서 홀로 계신 분이 하나님 한 분이고 땅에서 홀로 있는 이가 사람 하나라면 ‘두 신이 있다’는 말이 나올 수 있어 짝을 주셨다고 풉니다. 람반은 사람이 홀로 지내라고 창조되지 않았고 모든 생물이 암수로 창조되었음을 짚습니다.
‘크네그도(마주하여)’는 합당하면 도움이 되고 합당하지 않으면 대적하여 싸운다는 뜻으로 풉니다.
새도 땅(습지)에서 지어졌다고 풉니다. ‘아담이 부르는 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는 문장은 순서를 뒤집어 읽으면 이름이 영원히 그것의 이름이 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얄라드(낳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창세기를 열 번 가르는 구조 표지로, 여기가 첫 번째(2:4)입니다. 이어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7:2에 나옵니다.
2:7은 ‘흙(아다마)으로 사람(아담)을 지었다’는 소리 놀이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곧 ‘흙의 사람’입니다.
도공이 흙을 빚는 동사입니다. 철자에 ‘י’가 둘 있어, 라쉬는 이 세상을 위한 한 번과 부활을 위한 한 번, 두 번의 빚으심으로 풉니다.
‘네페쉬’는 ‘영혼’이기보다 ‘숨 쉬는 존재, 생명 있는 존재’입니다. 같은 낱말이 짐승에게도 쓰입니다(1:20).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으로 읽히기도 하고, 아카드어 ‘에디누(평원)’와 관련짓는 견해도 있습니다.
‘아바드(섬기다)’와 ‘샤마르(지키다)’는 성막에서 레위인이 하는 일을 가리키는 짝(민 3:7–8)이기도 합니다. 동산을 성소처럼 읽게 하는 단서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동사를 겹쳐 강조하는 형태입니다. ‘죽음이 시작된다’는 뜻으로 읽는 풀이(람반)가 있습니다.
‘에제르’는 시편에서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쓰여(시 33:20) 낮은 지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크네그도’는 ‘그와 마주 보는’입니다.
히브리 배경
2:4 이하는 앞 이야기와 시선이 달라집니다. 1장은 우주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하나님을 ‘엘로힘’이라 부르며, 2장은 땅 위 한 사람과 동산에 가까이 서서 ‘여호와 엘로힘’이라 부릅니다. 학자들은 이를 서로 다른 출처로 설명하기도 하고, 같은 이야기를 넓게 본 뒤 좁혀서 다시 보는 구성으로 읽기도 합니다. 에덴은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의 동산’ 이미지와 닿아 있습니다. 두 강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는 알려진 강이고 비손과 기혼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동산 안에서 하나님이 ‘거니시는’(3:8) 모습, 사람의 ‘경작하고 지키는’ 일, 동쪽 문을 지키는 그룹은 훗날 성막·성전의 모습과 겹칩니다. 에덴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는 원형의 성소라는 읽기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바이쩨르’의 ‘י’가 둘인 것을 이 세상의 몸과 부활을 위한 몸이라는 두 번의 빚으심으로 풉니다. 동물의 ‘바이쩨르’는 ‘י’가 하나인 것과 대비시킵니다.
비가 오지 않은 것은 사람이 비의 쓸모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풀이는,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여 은혜를 주신다는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돕는 짝’이 되는지 ‘대적’이 되는지는 하기에 달렸다는 풀이는 결혼 관계의 책임을 말하는 전승입니다.
죽음의 선고가 ‘먹는 날’에 내려졌다는 풀이는 삶 속에서 죽음이 시작된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람반은 2:17의 ‘먹는 날에 죽으리라’를 ‘먹는 그때 죽을 자로 정해진다’고 풉니다. 유대 전승에는 ‘행위언약’이라는 틀이 없고, 이 계명은 선악과를 금한 하나의 명령으로 읽습니다.
2:16–17은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 것, 그리고 죽음의 경고를 줍니다. 창세기 본문에는 ‘언약’이라는 낱말이 이 자리에 없습니다. 호 6:7(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은 번역이 갈리는 구절이고, 롬 5:12–21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2는 ‘첫 언약은 행위언약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후손에게 완전하고 인격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생명이 약속되었다’고 하고, 4.2는 마음에 새겨진 율법 외에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행위언약’은 2:16–17의 명령·약속·경고와 롬 5장의 대표성을 합쳐 후대 신학이 붙인 이름입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조건, 경고, 이후 생명나무에서 차단되는 3:22–24)과 신학적 종합을 구별해서 가르치세요.
라쉬는 ‘돕는 배필(에제르 크네그도)’을 ‘합당하면 도움, 합당하지 않으면 대적’으로 풉니다(예바못 63a). 또 하나님이 홀로 계신 분이 둘이 되지 않게 하려고 짝을 주셨다고도 봅니다.
2:18은 ‘돕는 배필’, 2:24는 ‘한 몸’을 말하고, 예수님은 1:27과 2:24를 합쳐 결혼의 근거로 인용하십니다(마 19:4–6). 시 33:20에서 하나님도 ‘에제르’라 불리므로 이 낱말은 낮은 지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1은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하는 것’, 24.2는 ‘남편과 아내의 상호 돕기, 합법적 자손의 증가, 거룩한 씨로 교회가 늘어남, 부정을 막음’을 결혼의 목적이라 합니다.
개혁신학은 이 대목을 결혼의 일반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예바못의 ‘대적’ 풀이는 본문의 낱말이 아니라 설교 방식의 확장이라고 봅니다. 라쉬의 ‘두 신이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는 본문 근거가 약합니다.
라쉬는 ‘바이쩨르’의 철자 ‘י’가 둘이라는 데서 이 세상의 몸과 부활을 위한 몸, 두 번의 빚으심을 읽어 냅니다. 또 몸은 땅의 것이고 영혼은 하늘의 것이라고 풉니다.
2:7의 ‘생령’은 짐승에게도 쓰이는 낱말(1:20)입니다. 사람의 차별성은 ‘하나님이 직접 불어넣으셨다’는 방식에 있습니다. 부활의 약속은 이 구절이 아니라 다른 본문(단 12:2, 고전 15장)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2는 사람이 ‘이성적이고 불멸하는 영혼’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두 번 빚음 = 부활’은 철자에서 이끌어 낸 미드라쉬이고 본문의 논증이 아닙니다. 개혁신학이 말하는 ‘영혼의 불멸’도 2:7 한 구절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의존합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1장과 2장의 순서가 다르다(1장은 사람이 마지막, 2장은 사람이 먼저)는 점을 모순으로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라쉬는 2:4에서 ‘모든 것이 첫날에 창조되었다’고 하고, 2장은 ‘비와 식물’이라는 한 측면의 이야기라고 읽습니다. 본문의 구조는 ‘전체 → 사람 중심’의 확대입니다.
비손·기혼·에덴의 위치를 오늘 지도에서 찾는 시도는 추측입니다. 라쉬는 비손을 나일, 이븐 에즈라는 사아디야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본문이 확실히 짚는 것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뿐입니다.
2:7의 ‘생령’은 짐승에게도 쓰이는 낱말(1:20)이므로 ‘영혼 불멸’을 곧바로 읽어 내는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라쉬도 사람의 영이 가장 발달했다는 차이를 말할 뿐입니다.
‘에제르(돕는 자)’를 열등한 위치로 읽는 것은 낱말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시 33:20, 121:1–2에서 ‘에제르’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물음
3. 화요일 · 셋째 낭독 · 창세기 2:20–3:21
여자가 지어지고 두 사람은 벌거벗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뱀이 여자를 유혹하고 둘이 열매를 먹은 뒤 하나님이 심판하시지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하나님이 짐승을 암수로 데려오시자 아담이 ‘모두 짝이 있는데 나만 짝이 없다’고 하여 짝을 구했다고 풉니다. ‘갈빗대’는 ‘옆구리’라는 뜻이며 ‘잠들게 하신 뒤 취하신’ 것은 아담이 살점을 보고 여자를 멸시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라고 합니다(산헤드린 39a).
‘세우셨다(바이벤)’는 건물을 짓듯 아래는 넓고 위는 좁게 지으셨다는 뜻이라 풉니다. 곡식 창고가 아래가 넓어야 무게를 견디는 것과 같다는 비유입니다(베라코트 61a).
아담이 짐승 가운데서 짝을 찾았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하와에게서만 만족했다고 풉니다(예바못 63a).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이 하는 말로, 노아 자손에게도 부도덕한 관계를 금하는 근거라고 풉니다(산헤드린 57b). ‘한 몸’은 아이 안에서 두 부모가 하나로 연합한다는 뜻이라고 보지만 람반은 이 풀이에 반대합니다. 짐승에게도 같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선악을 구별하는 지식이 없어 부끄러움을 몰랐다고 풉니다. 아담이 이름 짓는 지혜가 있었어도 악한 충동은 먹기 전에는 작동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왜 여기에 있는가: 두 사람이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 지식이 없던 이유를 설명하고 타락으로 잇기 위한 것입니다. ‘간교함’과 ‘큰 저주’가 짝을 이룬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19:1).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만 하셨는데 여자가 ‘만지지도 말라’고 덧붙여서 약해졌다고 풉니다(잠 30:6, 창세기 라바 19:3). 뱀은 그 틈을 타 나무를 만지게 한 뒤 ‘만져도 죽지 않으니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뱀은 ‘하나님이 이 나무를 먹고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너도 먹으면 창조자가 될 것이다’고 했다고 풉니다. 같은 일을 하는 자는 서로를 시기한다는 논리를 씁니다(창세기 라바 19:4).
라쉬는 ‘남편에게도 주었다’를 자기만 죽고 남편이 다른 아내를 얻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19:5). 람반은 하와가 그 열매를 쓰고 독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가 보니 먹음직하다고 느꼈다고 풉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지성(마음의 눈)이지 시각이 아닙니다. 앞 못 보는 사람도 벗은 줄은 아니까 ‘벗은 줄 알았다’는 하나님이 맡기신 한 계명을 벗어 버렸음을 깨달았다는 뜻으로 풉니다. 무화과 잎은 먹은 그 나무의 잎이었다고 합니다(산헤드린 70b).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아셨으나, 갑작스러운 선고로 당황하지 않게 대화를 여시려고 물으셨다고 풉니다. 가인에게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과 같습니다.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라고 하여 아담이 배은망덕을 보였다고 풉니다(아보다 자라 5b).
뱀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으신 것은 백성을 우상으로 꾀는 자의 편에서 변호해 주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라고 풉니다(‘선생의 말과 제자의 말이 어긋나면 누구의 말을 듣겠느냐’는 논리를 이용했을 것이므로).
라쉬는 뱀의 속셈이 아담을 먼저 죽게 하고 하와를 차지하는 것이었다고 풉니다. 탈굼 요나단은 여자의 자손이 율법을 지키면 뱀의 머리를 칠 수 있고 버리면 발꿈치를 물리지만, 그들에게는 약이 있어 ‘메시아 왕의 날에 발꿈치의 치료를 얻으리라’고 옮깁니다.
‘고통(이차본)’은 자식을 기르는 수고(에루빈 100b), ‘임신’은 임신의 고통, ‘수고하고 자식을 낳으리니’는 해산의 고통이라고 나누어 풉니다. ‘사모하고’는 부부 관계에 대한 갈망이지만 말로 요구하는 담대함은 없고 ‘남편이 다스리리라’는 모든 것이 그에게서 온다는 뜻으로 풉니다.
땅은 파리·벼룩·개미 같은 저주받은 것을 내게 될 것이고, 가시와 엉겅퀴는 곡식 사이에서 자란다고 풉니다. ‘밭의 채소를 먹으리니’는 1:29의 복과 대비해 수고가 더해진 것이라고 풉니다.
‘하와’는 ‘하야(생명)’와 소리가 같고 자녀를 낳아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매끄러워서 손톱처럼 피부에 붙는 옷이었다는 풀이와, 토끼의 털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재료로 만든 옷이라는 풀이를 함께 적습니다(창세기 라바).
히브리어 낱말 공부
2:23의 소리 놀이입니다. 라쉬는 이 말놀이가 히브리어에서만 성립하므로 창조 때 쓰인 언어가 히브리어라는 근거라고 봅니다.
2:25와 3:1은 같은 소리의 낱말입니다. 벌거벗은 이들의 ‘순진함’이 간교한 뱀을 만나는 장면의 연결입니다.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것’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것’(3:1)이라고 덧붙여 신적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3:16에서 여자의 ‘테슈카’가 남편에게로, 4:7에서 죄의 ‘테슈카’가 가인에게로 향합니다. 같은 낱말이 두 곳에서만 쓰입니다.
3:20은 ‘모든 산 자의 어미’라는 뜻이라 ‘하이(생명)’와 연결합니다. 죽음을 선고받은 직후에 아담이 ‘생명’이라 이름 붙입니다.
3:21. 벗은 부끄러움을 스스로 가리려 한 무화과 잎(3:7) 위에 하나님이 직접 입혀 주십니다.
3:15의 ‘여자의 후손’은 집합적(후손 전체)으로도 단수(한 사람)로도 읽혀, 해석의 차이가 갈립니다.
히브리 배경
뱀은 고대 근동에서 생명·치유·혼돈을 두루 상징했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영웅이 얻은 ‘젊음을 되찾는 풀’을 뱀이 훔쳐 가고 사람은 영생을 잃습니다. 창세기는 비슷한 모티브(뱀·영생의 나무)를 가지고 있지만 뱀을 신이 아니라 피조물로 두며 책임을 사람에게 묻습니다. ‘선악을 아는’은 ‘모든 것을 안다’(양 끝을 말해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거나 ‘스스로 선악을 정하는’ 자율을 뜻한다고 읽습니다. 가죽옷은 하나님이 죄 앞에서도 사람을 돌보시는 첫 장면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만지지도 말라’고 덧붙인 것이 뱀의 공격 지점이 되었다는 풀이는 ‘율법에 울타리를 쳐도 본문과 섞어 가르치지 말라’는 경고로 이어집니다.
그들이 가린 무화과 잎은 먹은 그 나무의 잎이라는 풀이는 ‘죄를 일으킨 바로 그것으로 개선도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입니다.
뱀과 여자의 후손 사이의 싸움을 율법 순종 여부로 읽고, 끝에 ‘메시아 왕의 날’의 치료를 말합니다. 메시아적으로 읽는 유대 전통의 가장 이른 증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담이 ‘주께서 주신 여자’라고 하여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모습을 배은망덕으로 읽습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라쉬는 문자 그대로의 간교한 뱀으로 읽고 형벌도 뱀에게 내려진다고 풉니다. 3:14의 ‘너를 변호해 주지 않았다’는 풀이는 ‘백성을 우상으로 꾀는 자의 편에서 변호하지 말라’는 법적 교훈으로 이어집니다.
3:1은 뱀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임을 분명히 적습니다. 사탄과의 동일시는 신약에서 분명해집니다(요 8:44, 롬 16:20, 계 12:9).
칼빈은 3:1에서 이 본문만으로는 ‘사람이 뱀에게 속았다’는 것까지만 말할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고 분명히 말하므로 뱀은 사탄의 입일 뿐이었다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1도 ‘사탄의 간교함과 유혹에 속아’ 타락했다고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피조물인 뱀이 속였다’이고, 사탄과의 연결은 성경 전체의 증거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의 이 정직한 구분을 따르면 3장 본문과 신약의 증언을 섞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승은 ‘예쩨르 하라(악한 충동)’를 말하지만 타락의 죄책이 후손에게 전가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라쉬는 4:7을 ‘네가 원하면 이길 수 있다’로 읽고(키두쉰 30b), 토라가 그 충동의 약이라고 가르칩니다.
3:6–19는 죄와 죽음의 시작을, 5:3은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대로 낳음을, 6:5와 8:21은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신약은 롬 5:12–19, 엡 2:1–3, 시 51:5로 이를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2–4는 이 죄로 사람이 ‘모든 부분과 기능에서 더럽혀졌고’, 죄책이 전가되고 부패한 본성이 모든 후손에게 전해지며, 이로부터 모든 실제 범죄가 나온다고 합니다. 9.3은 ‘구원에 동반되는 영적 선’을 향한 의지의 능력은 완전히 잃었다고 한정해서 말합니다. 벨직 신앙고백 15조는 원죄를 ‘온 인성의 부패, 태 안의 아기까지 감염시키는 유전된 타락’이라 합니다.
전승이 ‘싸워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곳에서 개혁신학은 ‘명령은 능력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본문은 책임을 묻는 명령(4:7)과 타락의 깊이(6:5)를 함께 둡니다. 개혁신학의 한정(‘구원에 동반되는 영적 선’)은 일상의 선행과 시민적 선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 한정을 놓치면 지나친 단순화가 됩니다.
탈굼 요나단은 여자의 자손이 율법을 지키면 뱀의 머리를 치고, 버리면 발꿈치를 물리지만 ‘메시아 왕의 날에 발꿈치의 치료를 얻으리라’고 옮깁니다. 라쉬는 뱀의 속셈과 형벌을 중심으로 풉니다.
3:15의 ‘제라(후손)’는 집합 단수입니다. 갈 3:16은 아브라함의 ‘씨’를 그리스도 한 분으로 풀고, 롬 16:20은 ‘평강의 하나님이 사탄을 너희 발 아래 상하게 하시리라’고 교회 전체에 적용합니다.
칼빈은 3:15에서 ‘씨’를 집합명사로 보아 사람의 후손 전체로 풀고, 한 사람만으로 읽는 것은 무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아담의 자손이 승리자가 아니므로 반드시 머리에 이르러야 하며, 바울이 아브라함의 씨에서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처럼 ‘머리 아래의 교회 전체’가 사탄을 이긴다고 풉니다(롬 16:20). 또 ‘그녀가 밟으리라’는 불가타 번역에 근거해 마리아에게 돌리는 것을 비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6은 구속의 효력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으로 계시된 약속과 모형과 제사를 통해 모든 시대의 택자에게 전달되었다고 하여 3:15를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으로 읽습니다.
탈굼과 칼빈이 모두 집합적 읽기에서 출발해 ‘끝에 오시는 이’를 말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3:15를 ‘예수님 한 분을 가리킨다’고 곧바로 단정하는 설교보다 칼빈의 구조(집합적 후손 → 머리이신 그리스도 → 그분 안의 교회)가 본문의 문법과 신약의 용례에 더 충실합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선악과 = 사과’는 본문에 없습니다. 본문은 ‘열매(페리)’라고만 합니다. 라틴어에서 ‘악(malum)’과 ‘사과(malum)’의 소리가 같아 서양 그림에서 사과가 되었다는 설명이 흔합니다. 랍비들 사이에서도 밀, 포도, 무화과로 갈립니다(베라코트 40a, 산헤드린 70a–b). 라쉬는 3:7에서 무화과 쪽에 서는 풀이를 소개합니다.
뱀을 사탄과 동일시하는 것은 본문이 아니라 후대의 읽기입니다(지혜서 2:24, 요한계시록 12:9). 라쉬는 문자 그대로 간교한 짐승으로 읽고 징벌도 짐승에게 내려지는 것으로 풉니다. 본문이 분명히 하는 것은 ‘뱀도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3:15를 ‘원시복음’으로 읽어 한 후손(그리스도)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은 기독교의 전통적 읽기이고, 탈굼은 이스라엘 전체의 투쟁과 마지막 날의 치료로 읽습니다. ‘제라(후손)’가 집합 단수이기 때문에 두 읽기가 모두 가능하며, 본문의 문법만으로는 어느 한쪽이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신약의 빛에서 읽는 것이 필요합니다.
3:16의 ‘다스리리라’를 남편의 정당한 지배로 읽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를 기술하는 문장(저주)이지 이상적인 질서를 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2:24의 ‘한 몸’과 대비해 읽으세요.
하와가 ‘만지지도 말라’고 한 것은 라쉬가 지적하는 덧붙임입니다. 이 지적은 본문 2:17에 ‘만지지 말라’가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므로 본문 근거가 있습니다.
오늘의 물음
4. 수요일 · 넷째 낭독 · 창세기 3:22–4:18
사람은 에덴 동쪽으로 쫓겨나고 그룹이 길을 지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가인의 살인과 하나님의 물음, 가인의 유랑과 그의 후손의 성(城)이 이어집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아담이 땅의 존재 중에 홀로 유일하여, 하늘에서 내가 유일한 것과 같다’고 풉니다. 유일함은 선악을 아는 데 있습니다. 또 영생하면 사람들을 미혹해 ‘그도 신이다’ 하게 할 염려가 있다고 합니다.
라쉬는 그룹을 ‘파괴의 천사’(출애굽기 라바 9:11)로 풉니다. ‘화염’은 두려움을 주어 다시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 합니다. 위치는 동산의 동쪽, 곧 동산 바깥입니다.
이 일은 타락 전에 있었다고 풉니다. ‘가인’은 그 말에서 나왔고, ‘여호와로 말미암아’는 하나님과 함께 동역했다는 뜻입니다(니다 31a). 또 ‘에트(את)’가 셋 반복되어 가인과 쌍둥이 누이가, 아벨과 두 누이가 함께 태어났음을 보인다고 합니다.
가인의 제물은 가장 나쁜 소산이었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22:5). 아마씨라는 풀이도 소개합니다.
‘바이샤’는 ‘돌아보셨다’이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 아벨의 제물을 태웠다고 풉니다.
탈굼은 ‘네 행위를 고치면 용서받으리라’고 옮깁니다. 죄는 무덤 문 앞까지 따라다니며 악한 충동이 끊임없이 사모한다고 하고, 그러나 ‘네가 원하면 이길 수 있다’고 풉니다.
가인이 논쟁을 일으켜 죽일 구실을 찾았다고 풉니다. 이를 다룬 미드라쉬가 여럿 있으나 이것이 ‘평이한 뜻’이라고 덧붙입니다.
하나님이 다정한 물음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제가 죽였고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는 지극히 높으신 분을 속일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민수기 라바 20:6).
‘피’가 복수형(데메이)이어서 아벨과 그에게서 날 후손들의 피라는 풀이(창세기 라바 22:9)와, 가인이 어디가 치명상인지 몰라 여러 군데를 쳤다는 풀이가 있습니다.
땅은 이미 한 번 죄를 지었으나(1:11 풀이), 이번에 입을 벌려 피를 받았으므로 가인에게 추가로 저주를 더한다고 풉니다.
이것은 질문이라고 풉니다. ‘위와 아래 세상을 지탱하시는 분이 내 죄 하나는 지실 수 없습니까?’ 하는 항변입니다(창세기 라바 22:11).
하나님이 가인의 이마에 당신 이름의 한 글자를 새기셨다고 풉니다(피르케 드라비 엘리에제르 21). ‘칠 배’는 칠 대째에 이르러 복수하신다는 뜻이며, 라멕이 가인을 죽인다고 풉니다.
‘놋’은 모든 유랑자가 방황하는 땅입니다. 가인은 ‘겸손한 척’ 나갔으나 지극히 높으신 분을 속이려 한 것이라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2:13).
성을 쌓은 이는 가인이고, 성에 이름을 붙인 것은 아들 에녹을 기념하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날개 달린 수호자입니다. 법궤 덮개 위에도 새겨지는 성소의 수호 형상(출 25:18–20)이어서, 에덴이 성소 이미지임을 보여 줍니다.
‘헤벨’은 전도서에서 ‘헛됨’으로 번역되는 낱말입니다. 숨결처럼 사라지는 이의 이름이 비극을 미리 암시합니다.
4:1의 말놀이입니다. 하와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사람을 얻었다’고 외칩니다.
‘샤아’는 ‘눈을 주다·돌아보다’입니다. 이유는 적지 않고 반응만 적습니다.
4:7에서 죄의 갈망이 가인을 향하고 가인은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고 합니다. 3:16과 같은 어휘, 같은 구조입니다.
‘문에 죄가 엎드려 있다’(4:7). 맹수가 웅크려 기다리는 이미지입니다.
‘피’가 복수형입니다. 아벨의 피뿐 아니라 그에게서 나올 후손의 피까지 외친다고 풉니다.
‘나드’와 땅 ‘놋(נוֹד)’(4:16)이 소리를 맞춥니다. 이름 그대로 ‘유랑의 땅’으로 갑니다.
히브리 배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에도 목자와 농부의 다툼 이야기가 있습니다(두무지와 엔킴두). 가인과 아벨은 이 이야기의 틀을 가졌으나 이유와 결말이 다릅니다. 제사의 단어 ‘민하’는 곡물제사와 일반 예물을 모두 가리켜, 본문은 곡식이어서 거절당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4:7이 알려 주는 이유는 ‘선을 행하면’ 하는 가인의 태도이고, 히 11:4는 아벨의 믿음, 요일 3:12는 가인의 악한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가인은 최초의 성을 쌓고(4:17), 아벨의 피가 땅에서 외치는 장면은 살인이 땅과 하나님에 대한 범죄임을 보입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죄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씀은 악한 충동과 싸우는 자에게 힘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키두쉰은 하나님이 ‘토라라는 약’을 주셨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정죄하기 전에 먼저 묻는 분이십니다. 가인이 기회를 놓친 것은 사실을 숨겼기 때문입니다.
‘네 아우의 피(데메이, 복수형)’에서 가인이 아우의 피뿐 아니라 그에게서 날 후손의 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는 가르침을 이끌어 냅니다. 같은 미쉬나가 아담이 한 사람으로 창조된 이유를 들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한 세상을 죽이는 것이고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한 세상을 살리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가인의 표를 하나님 이름의 한 글자로 풉니다. 유랑자에게 주어진 보호의 표라는 읽기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라쉬는 가인이 ‘가장 나쁜 소산’을 바쳤다고 하고(창세기 라바 22:5), 아벨의 제물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 태웠다고 합니다. 이븐 에즈라나 람반은 이 대목을 길게 풀지 않습니다.
4:3–5는 이유를 적지 않고 반응만 적습니다. 4:7은 ‘선을 행하면’이라고 하고, 히 11:4는 아벨이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요일 3:12는 가인의 행위가 악했다고 말합니다.
칼빈은 4:5에서 ‘유대인들이 가인이 이삭을 아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 악은 더 깊은 마음의 불순이다’라고 하고, 아벨의 제사가 불에 탔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증거 없는 ‘유대인의 우화’라며 물리칩니다. 4:4에서는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받으신 뒤에 그의 일을 받으신다고 하고, 가인은 외적 제사로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위선자였다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7은 중생하지 않은 자의 선한 일이 ‘믿음으로 정결해진 마음에서 나오지 않았으므로 죄가 된다’고 합니다.
칼빈의 비판은 본문 문맥에 맞습니다. 본문은 소산의 질이 아니라 가인의 마음과 반응(4:5–7)을 초점에 둡니다. 다만 ‘가인의 모든 행위가 죄’라는 표현은 웨스트민스터 16.7의 신학적 결론이고,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그에게 ‘선을 행하면 받으리라’(4:7)고 문을 열어 두십니다. 이 긴장을 말하는 것이 정직합니다.
라쉬는 ‘악한 충동이 항상 너를 사모하나 네가 원하면 이길 수 있다’고 풉니다(키두쉰 30b). 탈굼은 ‘행위를 고치면 용서받으리라’고 옮깁니다.
4:7의 ‘테슈카(사모함)’는 3:16 이후 두 번째로 쓰이는 낱말이고,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로베츠’는 맹수가 웅크린 모습입니다. ‘다스리라’는 명령이지 능력을 증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칼빈은 4:7을 설명하며 ‘행위를 고치면 용서받으리라’는 히브리 박사들의 풀이가 ‘값없는 사면을 해치는 만족을 상정한다’고 비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9.3은 타락한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영적 선을 행할 의지의 능력을 잃었다고 하며, 7.3은 은혜언약에서 하나님이 ‘믿을 수 있게 하는 성령을 약속하신다’고 합니다.
전승과 개혁신학의 가장 큰 갈림이 이 자리에서 드러납니다. 전승은 사람의 선택과 노력의 길을 말하고, 개혁신학은 명령 앞에서 사람의 무능력을 드러내어 은혜로 이끕니다. 본문은 책임과 가능성(4:7)과 타락한 마음(6:5)을 한 이야기 안에 담아 두어, 어느 한쪽만 읽으면 반쪽이 됩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가인의 제사가 거절된 이유를 ‘피 제사가 아니라 곡식이어서’라고 가르치는 것은 본문에 없습니다. 본문은 ‘민하’(예물)를 쓰고 이유를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라쉬는 가인이 ‘가장 나쁜 것’을 가져왔다고 풀고, 히 11:4는 아벨의 믿음, 요일 3:12는 가인의 행위가 악했음을 말합니다. 4:7(‘선을 행하면’)이 가장 직접적인 단서입니다.
‘가인의 표’를 피부색이나 인종과 연결한 해석은 본문에 없습니다. 이 표는 가인이 죽임 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는 하나님의 보호의 표입니다(4:15).
‘가인의 아내는 누구인가’: 라쉬는 가인과 함께 태어난 쌍둥이 누이로 풉니다. 본문 근거는 5:4(아담이 ‘자녀를 낳았다’)이며 본문이 이름을 밝히지 않으므로 이름과 구체적 계보는 추측입니다.
그룹을 ‘날개 달린 천사 아기(큐피드)’로 그리는 것은 중세 이후 그림이며, 성경의 그룹은 성소를 지키는 강력한 존재입니다(출 25, 겔 10).
오늘의 물음
5. 목요일 · 다섯째 낭독 · 창세기 4:19–22
가인의 후손 라멕이 두 아내를 맞고, 그의 자녀들이 목축·음악·금속 기술의 시조가 됩니다. 짧은 네 절이 문명의 시작을 알립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왜 이 이야기를 길게 적었는가: 하나님이 가인에게 ‘칠 대째에 복수하리라’고 하신 약속을 지키셨음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라쉬는 이 이야기를 가인에게 하신 ‘칠 대째에 복수하리라’는 약속의 성취로 읽습니다.
홍수 전 세대의 풍습이라, 한 아내는 아이를 낳게 하고 다른 아내는 쾌락을 위해 약을 먹여 임신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쾌락을 위한 아내를 꾸며 놓고, 아이를 낳는 아내는 홀대하여 ‘아다(치워진 자)’라 불렀다고 합니다(창세기 라바 23:2).
야발은 처음으로 가축을 기른 이이고, 풀이 떨어지면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에 한 달 여기 한 달 저기 장막을 치고 살았다고 풉니다.
‘두발(תובל)’을 ‘향신료(תבלין)’와 연결해, 가인의 기술을 ‘개선하여’ 살인자를 위한 무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3:3). 그에게는 ‘놋과 쇠로 여러 가지를 날카롭게 한 자’라고 합니다.
나아마는 노아의 아내였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3:3). 다른 전승은 이 이름이 우상 숭배와 관련된다는 풀이를 줍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일부다처가 성경에 처음 나오는 대목입니다. 2:24의 ‘한 몸’과 선명하게 대비됩니다.
아다는 ‘장식’, 씰라는 ‘그늘’로 읽는 풀이가 있고, 라쉬는 ‘아다 = 치워 둔 여자’, ‘씰라 = 그늘 아래 사는 여자’로 풉니다.
여기서 ‘아비’는 직업의 시조·원조를 뜻하는 셈어의 표현입니다. 야발은 장막과 목축의 시조입니다.
현악기와 관악기를 대표로 들어 ‘음악’ 전체를 가리킵니다.
‘라타쉬’는 날을 세워 갈다입니다. 청동기와 철기 기술이 한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이 이 계보에 있습니다.
히브리 배경
4:17–22는 가인의 후손에게서 도시, 목축, 음악, 금속 기술이 나온다고 밝힙니다. 인류 문명의 기원을 가인의 자손에게 돌리는 것은 문명을 맹목적으로 칭찬하지 않는 성경의 시선입니다. 이 기술 가운데 쇠를 다루는 일이 곧바로 4:23–24의 ‘칼의 노래’와 이어집니다. ‘아비’는 동일 업종 공동체의 후견인·시조를 부르는 말(‘장인의 조상’)로 쓰입니다. 고대 근동의 길드를 떠올리면 됩니다. 일부다처는 이 계보에서 처음 보이며, 바로 이어서 폭력의 노래가 나옵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두 아내의 풍습(자녀를 위한 아내와 쾌락을 위한 아내)을 홍수 세대의 타락한 풍습의 한 모습으로 읽습니다.
두발가인이 무기를 ‘개선’했다고 풀어, 문명의 발전이 살인의 도구를 낳은 이야기로 읽습니다. 기술이 도덕에 앞서 가는 모습입니다.
나아마를 노아의 아내로 보는 풀이가 있습니다. 노아의 아내 이름이 성경에 없다는 점을 채우려는 시도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라쉬는 두 아내를 홍수 세대의 풍습으로 풉니다. 한 아내는 자녀를 위해, 다른 아내는 쾌락을 위해 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창세기 라바 23:2).
4:19는 일부다처가 성경에서 처음 나오는 대목입니다. 2:24의 ‘한 몸’, 마 19:4–6, 말 2:14와 대조해 읽습니다. 본문은 라멕을 칭찬하지 않고 곧이어 칼의 노래(4:23–24)를 적습니다.
칼빈은 4:19를 ‘일부다처가 타락하고 잔혹한 가문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그것이 ‘두 사람이 한 몸이 된다’는 하나님이 정하신 영구한 자연 질서를 어긴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타락을 가인의 집에서 나오게 하신 것은 일부다처를 하는 이들이 그 본보기를 부끄러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4.1은 한 남자가 한 아내만 두는 것을 규정합니다.
칼빈의 읽기가 본문 문맥(2:24와의 대조)에 충실합니다. 다만 아브라함과 야곱 같은 신앙의 조상도 일부다처였다는 점을 본문은 직접 평가하지 않으므로, 이 대목의 대조를 모든 구절에 한꺼번에 적용하는 일은 조심해야 합니다.
라쉬는 두발가인이 가인의 기술을 ‘개선하여’ 살인자를 위한 무기를 만들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3:3). 문명의 발전을 폭력의 도구와 연결해 경계하는 읽기입니다.
4:20–22는 목축, 음악, 금속 기술을 가인의 후손에게 돌립니다. 본문은 이를 칭찬하지도 비난하지도 않고 4:23의 칼의 노래와 이어 놓습니다. 출 31:1–5, 사 28:24–29는 기술과 지혜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칼빈은 4:20에서 기술과 생활의 편의를 발명하는 일은 ‘결코 멸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가장 타락한 가문이 오히려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은 가인이 완전히 저주받아 좋은 선물조차 받지 못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두 시선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라쉬는 기술이 도덕을 앞질러 갈 위험을, 칼빈은 하나님이 악한 가문에도 선물을 주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후대에 ‘일반은총’이라 부르게 되는 생각과 닿는 대목입니다. 본문 자체는 평가를 하지 않고 독자에게 맡깁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아다·씰라 이름 풀이(치워진 여자·그늘 아래 여자)와 약을 먹여 불임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라쉬가 소개하는 미드라쉬이고, 본문은 이름만 적습니다. 본문의 의미를 이런 사회 풍습으로 일반화하지 마세요.
‘나아마 = 노아의 아내’는 창세기 라바의 한 의견일 뿐 본문에 없습니다. 노아의 아내는 이름이 없습니다.
문명(성·음악·금속)이 가인의 계보에서 나온다는 점을 곧바로 ‘문명은 악’이라고 읽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기술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4:23의 노래가 보여 주는 폭력과 함께 놓아 긴장을 만듭니다.
오늘의 물음
6. 금요일 · 여섯째 낭독 · 창세기 4:23–5:24
라멕이 복수의 노래를 부르고, 아담에게 셋이 태어나 ‘그때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어 아담에서 에녹까지의 계보가 이어지고 에녹은 하나님이 데려가십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두 가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라멕이 앞을 못 보고 두발가인이 이끌다 멀리서 가인을 짐승으로 알아 활을 쏘게 해 가인을 죽였고, 후에 알고 두발가인을 쳐서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탄후마). 라쉬 자신이 4:24에서 창세기 라바는 라멕이 누구를 죽였다고 하지 않고 아내들이 그에게서 떠났다고만 한다고 덧붙입니다.
가인을 칠 대째까지 유예하신 것이 살의 계획이 있었던 가인의 경우였다면, 사고로 죽인 라멕의 경우는 더 오래 유예될 것이라는 추론입니다. 숫자는 ‘여러 칠 대’를 뜻한다고 풉니다.
라멕의 아내들이 남편을 떠나자 아담을 찾아갔고, 아담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라고 권하자 되받아 ‘당신부터 고치라, 백삼십 년 동안 아내와 떨어져 있지 않았느냐’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아담이 아내를 다시 맞았다고 풉니다.
‘후할’을 ‘속되게 하다’로 읽어 이때부터 사람과 우상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 우상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풉니다. 이에 맞서 평이한 읽기는 ‘비로소 예배(기도)가 시작되었다’입니다.
이 구절에 미드라쉬 풀이가 많다고 하고, 5:1의 ‘창조된 날에’를 아담이 창조된 날에 자녀를 낳았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4:7).
아담은 그때까지 아내와 떨어져 있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4:6).
라쉬는 에녹이 의인이었으나 마음이 쉽게 악으로 기울 수 있어 하나님이 때 이르게 데려가셨다고 풉니다. 온켈로스는 이 구절을 ‘하나님이 그를 죽게 하셨으므로 그는 없었다’(אמית)로 옮깁니다.
‘라카흐(데려가다)’를 ‘때 이르게 데려가다’로 풉니다. 겔 24:16(‘네 눈의 기뻐하는 것을 데려가리라’)과 같은 쓰임입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가인은 ‘칠 배’의 보호를, 라멕은 ‘칠십칠 배’의 보복을 말합니다(4:24). 폭력의 확대를 숫자로 보여 줍니다.
하와가 ‘하나님이 다른 씨를 내게 주셨다’(שָׁת־לִי)고 하는 말놀이(4:25)입니다.
‘아담’과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시적 낱말로, 연약함과 죽을 운명을 강조합니다(시 8:4).
‘후할’은 ‘시작하다’로도 ‘속되게 하다(חלל)’로도 읽힙니다. 라쉬는 후자(이름을 우상에게 붙임)로 풀고 문맥상 ‘시작했다’가 더 평이합니다.
5:3에서 아담이 셋을 낳을 때 쓰인 표현으로, 1:26의 하나님의 형상·모양 어휘가 ‘아버지 → 아들’의 닮음으로 이어집니다.
5장 계보를 관통하는 후렴입니다. 에녹만 이 후렴을 빠뜨립니다.
‘라카흐(데려가다)’는 엘리야(왕하 2:3, 5)에게도 쓰입니다. ‘에이네누(그가 없다)’는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히브리 배경
5장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1:27)을 되풀이하며 시작해, 사람을 낳는 일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어 가는 일임을 밝힙니다. 아담에서 노아까지 열 세대로 이어지는 이 계보는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왕명록’과 닮았습니다. 거기서는 홍수 이전 여덟 왕이 수만 년씩 다스립니다. 성경은 훨씬 완만한 수명(대개 900세 안팎)을 적습니다. 마소라 본문으로 계산하면 창조에서 홍수까지는 1,656년입니다(라쉬가 1:14에서 쓰는 수). 다만 사마리아 오경과 칠십인역은 숫자가 달라, 같은 계보도 본문 전승마다 다릅니다. 에녹 이야기(5:24)는 수명 후렴 속에서 ‘죽음이 없는’ 예외로 서 있습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후할’을 ‘속되게 하다’(חלל)로 읽어 에노스 세대를 우상숭배의 시작으로 봅니다. 랍비 전승에서 흔한 읽기이고, 후대에 마이모니데스(미쉬네 토라, 우상숭배 법 1:1)도 같은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에녹의 ‘데려가심’을 하나님이 그를 죽게 하신 것으로 옮깁니다. 영생으로 승천했다는 읽기와 구분되는 유대 번역의 입장입니다.
에녹은 ‘의인이었으나 흔들릴 수 있어’ 일찍 데려가신 것으로 풀어 약하게 평가합니다. 엘리야와는 다르게 보는 전통입니다.
라멕의 아내들과 아담의 대화는 ‘가르치려면 먼저 자기가 하라’는 주제를 설교하는 미드라쉬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라쉬와 탈굼 온켈로스는 ‘후할’을 ‘속되게 하다’로 읽어, 이때부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우상에게 붙이기 시작했다고 풉니다(온켈로스는 ‘기도를 그쳤다’는 뜻으로 옮김). 마이모니데스도 에노스 세대를 우상숭배의 시작으로 봅니다.
4:26의 앞뒤는 셋의 가문(4:25–26)과 가인의 가문(4:17–24)의 대조입니다. 12:8, 13:4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이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롬 10:13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칼빈은 이 구절을 ‘예배 전체를 가리키는 환유’로 보고, 셋 계통의 경건한 가문이 공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다고 풉니다. 하나님이 그때 다른 이름들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설을 ‘어리석은 우화’라 하며, 모세는 여기서 미신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한 가문의 경건을 칭찬한다고 합니다.
평이한 읽기는 칼빈 쪽입니다. ‘후할’이 ‘속되게 하다’로도 읽힐 수 있다는 문법 가능성과 온켈로스의 번역 전통은 존중하되, 앞뒤 문맥(가인 가문과 셋 가문의 대조)과 12:8의 용례가 ‘예배의 시작’ 쪽으로 기웁니다.
온켈로스는 5:24를 ‘하나님이 그를 죽게 하셨으므로 그는 없었다’고 옮깁니다. 라쉬는 에녹이 쉽게 악으로 기울 수 있어 일찍 데려가셨다고 풉니다.
5장의 후렴은 ‘그리고 죽었더라’이지만 에녹에게만 이 후렴이 없고 ‘데려가셨다’가 나옵니다. 엘리야(왕하 2:11)와 비슷한 표현입니다. 히 11:5는 ‘죽음을 보지 않도록 옮겨졌다’고 풉니다.
칼빈은 5:24에서 ‘이 본문에서 특별한 일이 말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뻔뻔한 논쟁가’라고 하며, 모세가 에녹이 ‘이례적인 방식으로, 기적적으로 주께 받아들여졌다’고 분명히 선언한다고 풉니다. 그는 이것이 ‘복된 부활의 가시적 표본’이며 신자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 주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본문의 후렴 구조(5장)와 히 11:5, 엘리야의 용례는 칼빈의 읽기를 받쳐 줍니다. 온켈로스의 ‘죽게 하셨다’는 전승의 번역 선택이지 본문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녹의 이야기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에게 죽음 너머의 소망이 있다’는 증언으로 읽힌다는 점이 신약적 읽기와 이어집니다.
라쉬는 아담이 백삼십 세까지 하와와 떨어져 있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4:6). 본문의 형상 어휘 자체는 길게 풀지 않습니다.
1:26–27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5:1은 ‘하나님의 모양’으로, 5:3은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대로 셋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어휘가 같으나 대상이 하나님에서 아담으로 바뀝니다.
칼빈은 5:3에서 셋이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났다는 말이 ‘본성의 첫 기원’을 가리키는 동시에 타락으로 아담이 얻은 오염이 후손 모두에게 흘러내렸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타락한 아담은 자기를 닮은 자녀밖에 낳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3과 벨직 15조가 같은 방향입니다.
전승이 이 대목에서 원죄를 말하지 않는 것과 달리, 개혁신학은 1:27과 5:3의 어휘 대비에서 ‘하나님의 형상 → 아담의 형상’이라는 읽기를 이끌어 냅니다. 본문의 대조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죄책의 전가’까지 말하는지는 롬 5장의 도움으로 확인하는 신학적 읽기입니다.
바로잡기 · 주의할 점
‘에녹이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읽기는 히 11:5를 따른 읽기입니다. 창세기 5:24의 히브리어는 ‘그가 없다,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까지만 말하고, 온켈로스는 ‘죽게 하셨다’로 옮깁니다. 본문 자체는 승천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신약이 ‘죽음을 보지 않았다’(히 11:5)고 풉니다. 두 읽기를 구별해서 가르치세요.
‘에녹서’(1 에녹)는 후대의 유대 문헌이며 유다서 14–15절이 인용하지만, 정경 오경 본문은 에녹에 대해 두 절(5:22–24)만 말합니다. 에녹서의 천사 이야기를 창세기 본문으로 읽지 마세요.
5장의 나이는 마소라·사마리아·칠십인역이 서로 다릅니다. ‘창조 6,000년’ 같은 연대 계산은 어느 본문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계보의 ‘열 세대’도 일부는 건너뛴 압축 계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마 1장의 ‘낳았다’도 후손을 뜻할 수 있음).
4:23의 ‘라멕이 가인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라쉬가 탄후마에서 인용하면서도 창세기 라바는 이를 말하지 않는다고 밝힌 풀이입니다. 본문은 라멕의 칼의 노래만 적습니다.
오늘의 물음
7. 안식일(토요일) · 일곱째 낭독 · 창세기 5:25–6:8
므두셀라에서 노아까지의 계보를 마치고, 사람의 악이 커져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며 땅의 사람을 쓸어버리기로 하시지만, 노아는 은혜를 입습니다.
본문 따라 읽기 · 유대 전승의 구절별 풀이
노아가 땅의 수고를 덜어 줄 것이라는 뜻으로, 그때까지 쟁기 같은 농기구가 없던 사람들에게 노아가 농기구를 만들어 주었다고 풉니다. 땅은 저주 때문에 밀을 심어도 가시를 냈으나 노아 때에는 가라앉았다고 합니다.
이전 세대는 백 세에 자녀를 낳았는데 노아는 오백 세에 낳은 이유를 랍비 유단이 묻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악해지면 홍수에 쓸려 가니 늦게 낳게 하여 방주를 짓는 기간을 맞춘다’고 하셨다고 풉니다. ‘셈, 함, 야벳’ 순서는 의로운 셈을 먼저 쓴 것이고 야벳이 맏이라고 합니다.
라쉬는 ‘왕과 귀족의 아들’이라는 풀이를 먼저 주고,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라는 풀이도 소개합니다. 람반은 귀족·재판관이라는 풀이를 택하고, 온켈로스도 ‘귀족의 아들들’로 옮깁니다. 신부 몸치장하는 처녀를 먼저 데려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창세기 라바 26:5).
내 영이 심판할지 자비를 베풀지 다투는 일은 ‘오래’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풉니다.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은 백이십 년 동안 기다리겠다는 인내의 기간이라고 하고, 야벳이 태어난 때부터 홍수까지는 백 년이므로 순서가 앞뒤일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떨어지다’에서 나온 이름으로, ‘그들이 떨어졌고 세상이 떨어지게 했다’고 풉니다(창세기 라바 26:7). ‘그 후에도’는 에노스 세대와 가인의 자손들의 때를 가리킵니다. 에노스 세대가 바닷물이 넘쳐 세상의 삼분의 일을 덮는 심판을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고 풉니다.
하나님이 홍수의 이유로 노아에게 말씀하신 것이 ‘포악(6:13)’이고 이 구절은 그 배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예쩨르’가 빚어낸 마음이 여기서 ‘오직’ 악으로 기울었다고 읽습니다.
라쉬는 ‘나함’을 ‘위로’와 연결해, 사람을 땅에 두신 것이 위로가 되었다고 풉니다. 하늘의 존재였다면 그들도 반역을 부추겼을 테니까요. 또 다른 풀이는 ‘자비에서 심판으로 생각을 바꾸셨다’입니다. 람반은 ‘토라는 사람의 말로 말한다’고 하여 이 표현이 하나님의 본성의 변화가 아님을 밝힙니다.
‘마하(지우다)’는 물로 닦아 내듯 지운다는 뜻이며, 사람이 흙이니 물을 부어 씻어 낸다고 풉니다. ‘짐승까지’는 그들도 길을 어지럽혔기 때문이고, 또 다른 풀이는 만물이 사람을 위해 지어졌으니 사람이 없으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산헤드린 108a).
‘은혜’는 그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고 달콤했다는 뜻이라고 풉니다. 모세에게 ‘내 앞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너를 이름으로 안다’(출 33:17)고 하신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같은 이름을 뒤집어 읽는 말놀이도 있습니다. 노아(נח)를 거꾸로 하면 헨(חן)입니다.
히브리어 낱말 공부
가장 오래 산 사람(969세). 이름의 뜻은 ‘창(槍)의 사람’ 또는 ‘그가 죽으면 (홍수가) 보내진다’로 풀기도 합니다.
5:29. 라멕이 아들 이름을 ‘노아흐’로 지으며 ‘이 아들이 땅의 수고에서 우리를 위로하리라(예나하메누)’고 합니다. 두 낱말의 어근이 다르지만(נוח·נחם) 말놀이로 이어집니다.
욥 1:6, 2:1에서는 하늘의 존재들입니다. 6:2의 뜻은 해석이 갈립니다(배경 참고).
‘나팔(떨어지다)’에서 온 것으로 ‘넘어뜨리는 자들’이라고 라쉬는 풉니다. 민 13:33에서 정탐꾼이 가나안의 거인들을 가리킬 때도 쓰입니다.
‘야돈’의 뜻이 불분명합니다. ‘다투다·심판하다·머물다’로 읽히며, 라쉬는 ‘내 영이 괴로워하며 다투지 않게 하리라’로 풉니다.
‘나함’은 뉘우치다·마음을 바꾸다·위로를 받다의 뜻을 다 가집니다. 노아의 ‘노아흐’와 소리가 얽혀 있습니다.
6:5. ‘예쩨르(빚어낸 것)’는 2:7의 ‘빚으시고’와 같은 뿌리입니다. ‘항상’과 ‘오직’으로 총체적 악을 말합니다.
6:8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성경에서 이 낱말이 처음 나오는 자리이고, 성경 첫 홍수 이야기의 주제를 한 낱말로 정리합니다.
히브리 배경
6:1–4는 성경에서 가장 논쟁적인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세 가지로 읽어 왔습니다. ① 천사 같은 하늘의 존재(1 에녹, 유다서 6, 벧후 2:4, 욥 1:6의 용례와 칠십인역의 일부 사본) ② 셋의 후손(기독교 초기 교부와 어거스틴) ③ 왕과 귀족(라쉬, 람반, 온켈로스는 ‘귀족의 아들들’로 옮김, 시 82:6의 ‘엘로힘’도 재판관). 본문 자체는 이를 정하지 않습니다. 영웅과 신이 사람의 딸들과 낳은 자녀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와 고대 근동에 널리 있어, 성경이 이 이미지를 홍수 직전 ‘인간의 악이 극에 달한 모습’의 하나로 사용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5장 계보의 열 번째 이름 노아에서 이야기는 방향을 바꿔, 사람의 악(6:5)과 하나님의 마음(6:6) 사이에서 노아라는 이름의 ‘쉼·위로’가 의미를 얻습니다.
유대 전승은 이렇게 읽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귀족·재판관으로 읽는 것이 랍비 전통의 주류이고, 라쉬는 천사로 읽는 풀이도 함께 소개합니다. 람반은 이 대목에서 재판관들이 불의를 일삼은 것을 문제로 삼습니다.
‘백이십 년’을 사람의 수명 제한이 아니라 홍수까지 기다리시는 인내의 기간으로 풉니다. 이후 아브라함이 175세를 산 점(25:7)이 이 풀이를 뒷받침합니다.
‘한탄하셨다’를 ‘하나님이 사람의 말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풉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변한다는 뜻으로 읽지 않습니다.
노아(נח)를 거꾸로 쓰면 은혜(חן)가 된다는 말놀이가 전해집니다. 출처가 있는 해석이라기보다 이름을 기억하는 설교의 도구입니다.
세 시선으로 읽기 · 유대 전승 ↔ 본문 문맥 ↔ 개혁신학
라쉬는 ‘귀족과 통치자의 아들들’을 먼저 말하고 천사설도 소개합니다. 람반은 귀족·재판관설을 택하고, 온켈로스는 ‘귀족의 아들들’로 옮깁니다.
‘브네이 하엘로힘’은 욥 1:6, 2:1, 38:7에서 하늘의 존재들을, 신 14:1과 호 1:10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시 82:6에서 재판관을 가리킵니다. 유다서 6절과 벧후 2:4는 범죄한 천사를 말하지만 6:1–4와의 직접 연결은 논쟁이 있습니다. 마 22:30은 천사는 장가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입양으로 구별된 셋 가문의 신자들로 보고, 천사가 여자들과 어울렸다는 옛 이야기를 ‘그 어리석음으로 스스로 반박되는 허튼소리’라 부릅니다. 또 귀족과 평민의 혼인으로 보는 ‘갈대아 역본(온켈로스)’의 풀이도 ‘냉랭하다’고 물리칩니다. 문제는 신앙의 구별선을 넘은 결혼이며, 그것이 교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고 풉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 정하지 않습니다. 칼빈의 셋 계통설은 가인 가문과 셋 가문의 대조(4–5장)에 서 있고, 라쉬·람반의 귀족설은 시 82:6의 용례에 서 있으며, 천사설은 욥기의 용례에 서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성경의 확정된 답’으로 가르치지 말고, 각 읽기의 근거를 함께 두세요.
람반은 ‘토라는 사람의 말로 말한다’고 하여 이 표현이 하나님의 본성의 변화가 아님을 밝힙니다. 라쉬는 ‘나함’을 ‘위로’로도, ‘자비에서 심판으로의 생각의 변화’로도 풉니다.
민 23:19와 삼상 15:29는 하나님이 ‘후회하시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출 32:14, 욘 3:10, 삼상 15:11은 같은 낱말로 ‘뜻을 돌이키셨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반응하시는 모습을 사람의 말로 그립니다.
칼빈은 6:6에서 하나님의 후회는 ‘엄밀히는 그분께 속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이해를 위한 것’이며, 하나님은 예기치 않은 일이 없으시고 슬퍼하지도 않으시지만, 죄에 대한 미움의 크기를 알리시려고 성령이 우리 수준에 맞추신다고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은 하나님을 ‘몸도 부분도 감정(passions)도 없으신 불변의 분’이라고 말합니다.
람반의 ‘토라는 사람의 말로 말한다’와 칼빈의 ‘성령의 맞추심’은 같은 열쇠를 가리킵니다. 같은 주제를 두고 서로 다른 전통이 거의 같은 해석 원리에 도달한 드문 일치점입니다. 다만 개혁신학의 ‘불변성·무감정’ 표현은 후대의 철학적 어휘이고,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마음 아픔(6:6)을 가볍게 보게 하지 않도록 칼빈이 그 끝에서 ‘죄를 미워하라’는 권면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함께 읽으세요.
람반은 ‘은혜’를 노아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고 달콤했다는 뜻으로 풉니다. 노아(נח)를 거꾸로 쓰면 은혜(חן)가 된다는 말놀이도 전합니다.
6:8은 6:5–7의 심판 선언 직후에 ‘그러나’로 이어집니다. 6:9는 노아의 의로움을 말하고, 히 11:7은 그가 ‘믿음으로’ 경고를 받아 방주를 지었다고 풉니다. 엡 2:8–9는 구원이 믿음을 통한 은혜라고 합니다.
칼빈은 6:8에서 ‘사람이 은혜를 입는 것은 자기의 노력과 공로로 구한 때문’이라고 헛되이 추론하는 이들을 지적하며, 노아가 깨끗했다는 것은 인정하되 ‘그 온전함을 어디서 얻었는가? 선행하는(앞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다. 이 은총의 시작은 값없는 자비다’라고 합니다.
람반의 읽기는 ‘기뻐하신 행위’를 말하고, 칼빈은 그 행위조차 은혜가 앞서 이루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은혜’가 첫 낱말로 나오고(성경에서 ‘헨’의 첫 용례) 이어서 노아의 의가 서술되는 순서가 칼빈의 강조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라쉬는 ‘그도 육체’를 ‘이런 성품이 그에게도 있어 흙이면서 겸손하지 않다’고 풉니다. ‘백이십 년’은 하나님의 인내의 기간이라고 합니다.
6:3은 ‘영’과 ‘육’을 대립시킵니다. 고전 2:14는 육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는다고 하고, 요 3:6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합니다.
칼빈은 6:3의 ‘육체’가 영혼의 낮은 부분만이 아니라 온 사람, 곧 지성의 눈멂과 감정의 비뚤어짐을 모두 포함한다고 풉니다. 또 하나님이 오래 다투시다가 이제 그 다툼을 끝내고 심판을 현재형으로 선포하시는 것이라 풉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2는 ‘영혼과 몸의 모든 부분과 기능이 더럽혀졌다’고 합니다.
라쉬의 ‘겸손하지 않은 흙’이라는 도덕적 읽기와 칼빈의 ‘온 사람이 육’이라는 읽기는 같은 방향이지만 칼빈은 지성까지 포함해 더 넓게 봅니다. ‘백이십 년’의 뜻은 이 칸에서 다루지 않았으니 앞의 ‘유대 전승’ 칸(라쉬의 인내의 기간)과 함께 보세요.
바로잡기 · 주의할 점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보는 읽기와 셋의 후손으로 보는 읽기, 귀족으로 보는 읽기는 모두 오래된 해석입니다. 본문은 선택하지 않습니다. 마 22:30(천사는 장가가지 않는다)을 천사설 반대 근거로 쓰는 이도 있고, 유다서 6절은 천사설의 근거로 쓰입니다. 어느 한쪽을 ‘성경의 확정된 답’으로 가르치지 마세요.
‘백이십 년’을 ‘사람의 최대 수명 제한’으로 읽는 것은 널리 퍼진 읽기이지만, 노아 이후에도 사람이 120세를 넘게 산 것(창 11, 25:7 아브라함 175세)과 부딪힙니다. 라쉬처럼 ‘홍수까지의 유예 기간’으로 읽으면 이 긴장이 풀립니다.
‘네피림=거인’은 칠십인역이 ‘기가스’로 옮긴 전통에서 나온 풀이입니다. 히브리어 낱말 자체는 ‘넘어뜨리는 자들’ 또는 ‘떨어진 자들’이며, 본문은 크기를 말하지 않고 ‘용사’ ‘명성 있는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한탄하셨다(וינחם)’를 하나님이 실수하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민 23:19와 삼상 15:29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같은 낱말을 쓰는 점에서, 사람이 이해하도록 하나님이 ‘사람의 말로’ 말씀하신 표현입니다(람반).
‘노아와 헨’의 말놀이는 히브리어에서 자음이 뒤바뀐다는 데 의존한 설교이고 본문의 어근 설명은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과 이어 나오는 노아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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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와 읽는 법
- 토라 두루마리 사진: CC0 — Wikimedia Commons
성경 본문과 구절 번호는 개역개정 기준입니다. 히브리어 성경과 번호가 다른 곳은 개역개정 번호로 옮겼습니다. 이 글에 적은 성경 참조는 모두 개역개정에 있는 구절인지 확인했습니다. 유대 전승의 인용은 세파리아(Sefaria)의 영어 번역본을 읽고 한국어로 옮긴 공부용 소개이며,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과 전승이 덧붙인 것은 「바로잡기」 칸에서 갈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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